<불교의 역사(3) - 바이샤와 크샤트리아 계급의 불교 귀의>
1. 불교 교단의 확장
부처님 열반 후 약 100년간은
불교 교단에 대한 특별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불교 교단은 북인도의 넓은 지역에 산재해 있었지만,
통일된 중앙 기관이나 횡적인 연결 기관도 없었습니다.
부처님 열반 후 구심점을 잃었기 때문에
교단의 분열과 함께
악의적인 외부인들로 인한 분란으로
불교 교단에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할 위험성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입멸 후 100년간
부처님의 가르침을 직접 받았던 직계 제자들과
그 아랫 제자들이 부처님의 유훈을 받들어
잘 화합하고 수행하며 불교 교단을 확장해나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부처님은 열반에 드실 때 특별히 후계자를
지명하여 교단을 운영할 것을 지시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제1결집에서 가섭 존자와 아난 존자,
우팔리 존자의 세 분의 제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분들이 오늘날 교황처럼
통일적 교단의 통치자는 아니셨고,
수행력이 뛰어나서 다른 스님들의 귀감이 될만한 분들로
부처님 가르침의 정신적 상속자에 해당하는 큰 제자분들이었습니다.
따라서,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까지
생존해 계셨던 가섭 존자, 아난 존자와 같은 큰 제자분들은
여러 지역에서 많은 제자들과 함께 수행과 포교를 병행하며
부처님의 교법과 계율을 바탕으로
교단을 운영하고 성장해나가도록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셨습니다.
이처럼 브라만교에 비해 신생 교단이었던 불교가
부처님의 열반 후에 특별히 후계자를 정하지 않았슴에도
큰 불협화음없이 100여년간 교세를 확장하고 유지한데는
부처님의 유훈을 잘 받들어 수행과 포교를 원만히 진행한
제자분들의 공이 컸다고 생각됩니다.
2. 불교 교단을 후원한 재가자 그룹
아울러 불교 교단의 안정에는 많은 재가자들,
특히 상인 출신의 바이샤 계급과 왕족 출신인
크샤트리아의 지지와 지원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부처님이 활동하신 기원전 6세기경
갠지스강 중하류 지역은 토지가 비옥한데다
철제 농기구가 보편화되며 농업 생산량이 크게 증가하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지역과 교류가 활발해지며
교역이 확대되고 화폐의 발달로 인해
상업과 무역이 발전하였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상업의 중심지에는 도시가 발달하면서
상인의 대표는 도시의 유력인사가 되어
생산 자금을 조달하고 생산자를 통솔했습니다.
상인들은 그들의 이익 보호와 생산,
유통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상업 동업 조합을 결성했고,
이들 중 일부는 관리의 역할을 맡기도 했습니다.
한편, 왕들은 왕권 강화를 위해
상인들의 경제적 지원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왕들은 상인 세력의 대표에게
관리적 성격을 부여하여
이들을 국가 권력 내부로 끌어들이려 했습니다.
이렇게 왕권(크샤트리아)과
상인 세력(바이샤)의 유대가 강화될 수 밖에 없었고,
이러한 시대 상황 속에서 상인 세력이
사회의 상층부로 성장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3. 바이샤 계급과 크샤트리아 계급의 불교 귀의
이러한 부유한 상인 세력을
불교 경전에는 "장자(長者)"라고 부릅니다.
부처님께 기원정사를 보시한 수닷타 장자는
코살라 국에서 제일 큰 상인(장자)이었습니다.
그러나, 상인 계급은 카스트 계급으로 보자면
브라만 계급과 크샤트리아 계급 뒤에 나오는
세 번째에 속하는 피지배 계급이었습니다.
“크샤트리아와 브라만은
바이샤와 수드라의 뒤에 갈 수가 없다.”는
브라만교 경전의 표현처럼 상위 두 계급과
하위 두 계급 사이에 그어진 구분선은
사회의 변화와 발전에도 불구하고
기존 종교 질서인 브라만 교에서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경제력을 바탕으로 사회적 영향력이 커진
바이샤 계급에게 카스트 제도의 차별을
그대로 감수하기는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경제력을 상승시킨 상인(바이샤) 계급은
낡은 카스트 제도와 같은 신분적 차별을 부정하고
해탈을 향한 종교적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새로운 종교가 필요했습니다.
이 시기에 브라만 계급은
신에 대한 의식과 제사에 의존했습니다.
그리고, 복잡한 의례와 제사를 통해
부와 명예를 축적한 브라만들의
도덕적 타락과 퇴폐 현상이 증가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혐오감도 점점 증가하였습니다.
사회의 발전과 신흥 사상의 발전에도
브라만교는 오히려 계급적 차별을 강조하고
신분에 따른 의무만을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브라만교의 주장에 대해
정치적, 군사적 실권을 갖고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크샤트리아 계급도 반감을 갖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불교의 성립으로 평등 사상이 등장하자 출
생에 따른 계급 차별의 모순을 절감하고 있던
부유한 상인과 크샤트리아 왕족들은 불교에 매료되었습니다.
낡은 카스트 제도의 사회적 차별의 부당함을 인식하고,
제사나 의례보다 해탈과 수행을 가르치는
불교의 합리적인 가르침에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불교에 귀의한 많은 상인들(바이샤)과
왕족들(크샤트리아)은 불교 교단의 사회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불교 교단의 중심이 되었던 여러 커다란 사원들이
이들의 지원으로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불교는 상인 계층의 적극적인 경제적 보시와
크샤트리아의 정치적 지지를 바탕으로 성장하였습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에도 신흥 종교였던
불교가 세력을 신장하게 된 배경에는
불교의 평등 사상과 해탈과 수행을 향한 합리적 가르침에 귀의했던
상인 계층의 바이샤와 크샤트리아 왕족을 포함한
많은 재가자들의 지지와 보시가 기반이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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