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역사(2) - 경전과 계율의 결집>
1. 결집의 동기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불교 교단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부처님의 상수(으뜸) 제자였던
사리불 존자와 목련 존자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섭 존자, 아난 존자,
아나율 존자, 우파리 존자, 라훌라 존자 등은
생존해 계시며 교단을 이끌고 계셨습니다.
부처님 열반 후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분은
두타제일 가섭 존자였습니다.
가섭 존자는 부처님 열반 당시 다른 곳에서
포교 중이었기 때문에 쿠시나가라에는 없었습니다.
가섭 존자는 부처님 열반 소식을 듣고
쿠시나가라로 달려왔습니다.
쿠시나라가의 모든 부처님 제자들은
모두 비탄에 잠겨 슬퍼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제자는 달랐습니다.
그는 슬퍼하는 다른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살아계실 때는 매일같이
'이렇게 수행하라, 저렇게 수행해라'라고 해서 성가셨는데
이제는 돌아가셨으니 잘 되었다.
이제는 무엇이든 내가 하고 싶은대로
자유롭게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
그 말을 들은 가섭 존자는 부처님께서
돌아가신지 얼마 안되었는데도 저런데,
시간이 흐르면 어떻게 될 것인지 매우 걱정스러웠습니다.
그리고, 가섭 존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보존하여
불교 교단을 잘 지켜나가야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많은 제자들도 가섭 존자의 뜻에 찬동하였습니다.
가섭 존자는 대중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2. 경전과 계율의 결집
"벗이여!
우리는 모름지기
부처님의 교법과 계율을 결집해서
나쁜 법이 성하며 바른 법이 쇠퇴하고,
나쁜 계율이 성하고 바른 계율이 퇴색하며,
정법을 말하는 자가 약하고
비법(非法)을 말하는 자가 강하며,
나쁜 계율을 말하는 자가 힘을 얻고
바른 계율을 말하는 자가 약해지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벗이여! 우리들 가운데 부처님의 가르침을
결집하기 위한 비구 스님들을 선출해주시오."
그래서,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지 3개월만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편집하는 첫 모임이 열렸습니다.
이 모임을 "결집(結集)"이라고 하는데,
결집은 "상그라아(Samgraha)"를 번역한 말로 ‘모으다’는 의미입니다.
첫번째 결집 이후로도 여러 차례 열렸으므로
순서를 붙여 제1결집, 제2결집, 제3결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제1결집은 부처님께서 돌아가신 후 3개월 만에
마가다국의 수도인 왕사성 칠엽굴에서 열렸으며,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5백 명의 대표들이 참석했습니다.
그래서 제1결집을 '왕사성 결집' 또는 '5백 결집'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최초의 ‘경전 편집회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여시아문(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이때 가섭 존자가 의장이 되었고,
부처님의 비서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장 많이 듣고
기억력이 뛰어났던 아난 존자가 부처님이 설하셨던 가르침을 외웠습니다.
또한, 교단의 생활 규범인 계율을 가장 잘 지켜
‘지계 제일’로 이름 높던 우팔리 존자는 계율을 외웠습니다.
아난 존자는 5백 명의 스님들 앞에 나아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기억해서 외웠습니다.
그것은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부처님께서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이러한 내용을 설하였다'와 같은 형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불교의 모든 경전의 첫 부분이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즉,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시작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4. 합송(合訟)
원래 부처님의 설법은
듣는 사람의 능력이나 입장에 따라
가장 적절한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이 특색이었습니다.
항상 상대를 눈앞에 두고 가장 효과적인
교화를 펴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난 존자는 경전 서술을
여시아문으로 시작하여 육하원칙에 의해
경전이 설해진 이유나 대상을 분명히 밝힌 것은
이러한 부처님의 가르침의 특성을 잘 살린 것입니다.
아난 존자가 이와 같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야기하고
5백 명의 제자들로부터 틀림없다는 확인을 받은 다음,
그 자리에서 5백 명의 대중이 확인한 내용을 다함께 합송(合訟)하였습니다.
합송은 '함께 외운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교단의 생활규범인 계율에 대해서는
우팔리 존자가 앞에 나와 똑같이 외우고
500명의 대중들로부터 확인받고 합송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은
기원후 1세기경 문자로 기록된 최초의 성문 경전인
팔리어 아함경이 문자로 기록되기 전까지
제자들의 입에서 입으로 외워서 전승되었습니다.
당시 인도에 이미 문자가 알려져 있었지만,
종교나 문학은 문자 대신 경탄스러운 기억력에 의해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는 것이 관습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불교 경전은 한 사람에 의해 쓰여진 게 아니라,
대중들이 모여서 민주적 절차를 거쳐 편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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