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무량수경과 정토신앙>
1. 관무량수경과 위제희 부인
정토 경전 중에
<관무량수경>이 있습니다.
<관무량수경>은 인도 왕사성에서
일어났던 비극적 사건에서 출발합니다.
주인공은 '위제희 부인'이라는 왕비입니다.
그녀의 아들인 아사세 왕은
아버지 빔비사라 왕의 왕위를 찬탈하고
감옥에 유폐시켜 굶어 죽이는 패륜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남편인 빔비사라왕을 도우려 했던 어머니인
위제희 왕비까지 골방에 감금시켜 버렸습니다.
자식에 의해 남편을 잃은 고통과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 속에서
위제희 부인은 영취산에 계시는
석가모니 부처님께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비극적 운명에 이 세상에 정나미가 떨어져
고통 없는 좋은 세상에 태어나고자
하는 원을 호소합니다.
이에 감응하여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신통의 힘으로
위제희 부인에게 수많은 불국토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위제희 부인은 수많은 불국토 중에서
아미타 부처님의 서방 정토가
가장 훌륭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뿐 아니라 후세의 모든 중생들이
함께 서방 정토에 왕생하는 길을 여쭈어 보았습니다.
<관무량수경>에서 부처님은 일체 중생을
아홉 부류로 나누어 극락 왕생법을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대승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상품의 세 부류,
둘째는 악을 행하지 않고
선을 행하는 중품의 세 부류,
셋째는 악에 물들어 크고
작은 죄업 속에 살아가는
하품의 세 부류.
전설에 의하면 아사세 왕자가 태어나기 전
자식이 없었던 빔비사라 왕과 위제희 부인은
매우 초조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수행자가 수행을 마치고
3년 후에 죽으면 자신의 아들로
태어난다는 예언을 듣게 됩니다.
두 사람은 아들을
빨리 얻고 싶은 탐욕에
그 수행자를 살해하는
큰 죄업을 저질렀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아들이 아사세 왕자이며,
위제희 부인의 고통은 수행자를
죽인 죄업의 과보라는 것입니다.
2. 오탁악세 죄업 중생의 구제
<관무량수경>의 가르침은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부모와 자식이 미워하고 다투는
죄악과 고통이 가득한 세상을 살아가는
'위제희 부인'으로 대표되는
오탁악세 중생들까지도
부처님은 자비의 빛을 비추어 주시고
구제의 길을 열어주시는 것이
<관무량수경> 가르침의 근본 의미입니다.
죄업이 깊은 하품 중생까지 버리지 않고
구제하시는 부처님의 큰 원력과 자비에 의지하면
누구라도 극락왕생할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합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
어느 기독교 선교 동아리가 있었습니다.
그 동아리에 과 선배가 있었는데,
기숙사에 있던 저를 찾아와 적극적인 선교를 했습니다.
그 때 '원죄(原罪)'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으면서
인류는 죄악을 짊어지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어
우리 인류의 죄업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부활했으니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당시 '원죄'라는
개념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내가 죄인이라니?
그때 기독교적 공부나 지식이 없어서
제가 '죄인'이라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3. 죄(罪)와 고(苦)의 바다
나중에 불법을 만났을 때
불교는 '죄(罪)'보다
'고(苦)'라는 개념을 이야기했다.
'인생이 고(苦)'라는 가르침은 납득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삶이 괴로웠기 때문이었습니다.
대학 들어가면 힘든 공부 끝나고
행복한 삶이 펼쳐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해야 옳은지 등
가치관의 혼란 때문에
많이 괴롭고 힘들었습니다.
그 시기에 불교를 만났기 때문에
부처님이 말씀하신 '고(苦)'라는
개념이 잘 납득이 되었습니다.
특히, 코끼리에 쫓겨 우물 속에 들어가
칡넝쿨에 매달린 채 꿀을 빠는 남자의 비유는
정말 절묘한 비유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은 해탈하지 않으면 '생사고뇌' 속에서
윤회의 우물 속을 헤매며 살아간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진리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정토의 가르침을 공부하면서
'고(苦)'와 함께 '죄(罪)'의 개념을 다시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뿌리 깊은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으로
몸과 말과 생각으로 잘못된 죄업(악업)을 저지르고
죄업(악업)의 과보로 고통스런 윤회 속에 살아갑니다.
즉, 혹(惑,미혹)-업(業,죄업)-고(苦,고통).
미혹해서 죄업을 저지르고
고통 속에서 살아갑니다.
기독교에서 아담의 원죄로 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바라보면
'혹-업-고'의 인간 실존의 모습과 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크든 작든
<관무량수경>의 위제희 부인처럼
‘혹-업-고’의 삶의
수레 바퀴 속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토 신앙은 고
와 죄의 바다 속을 살아가는
나를 포함한 주변을
훨씬 솔직하고 따뜻하게 바라봅니다.
죄와 고의 바다 속을 헤매는
우리 인간의 실존을 통찰하여
아미타 부처님의 자비와 원력 속에서
함께 구제받아야 할 벗인
'동행(同行)'으로 바라봅니다.
그리고, 고와 죄의 현실 속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아미타 부처님의 자비와 원력을 믿고
극락왕생하여 진실된 불법의 길을 가고야 말겠다는
절실한 열정의 불교가 정토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유튜브 극락회상 - 나무아미타불(4) 관무량수경과 정토신앙>
https://youtu.be/c7dDQlOTHtM?si=ZoQ1uCl1e90Cb1h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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