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역사(19) - 반야 바라밀>
1. 세속적 지혜와 반야의 지혜
보살의 6바라밀 중 제일 마지막 바라밀은 반야 바라밀입니다.
‘반야’는 ‘완전한 지혜, 완전한 인식’을 의미하는 인도 말인
‘프라즈나(Prajna)’의 소리 번역입니다.
불자들이 많이 독송하는 <반야심경>의
‘마하반야바라밀’ 할 때의 바로 그 반야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할 때는
‘반야’라는 말보다는 ‘지혜’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지혜에는 ‘세속적 지혜’와 ‘반야적 지혜’가 있습니다.
세속적 지혜는 사물과 자연 현상에 대한 이해와 응용,
사회 속에서의 적절한 대인 관계와 정치, 경제, 사회 구조 등등에 대한
폭넓은 지식과 이에 따른 올바른 가치관을 포함하는 개념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반야의 지혜는 인과와 연기법,
사성제에 입각한 정견(正見)에 입각한 직관의 지혜를 말합니다.
즉, 탐욕과 분노와 이를 조장하는 여러가지 어리석음에 기반한
번뇌로부터의 해방된 깨달음의 상태를 의미하는 지혜입니다.
2. 공성(空性)의 자각
이러한 반야의 지혜는 대승 불교의 시대에 오면서
특히 ‘공성(空性)’에 대한 자각이 강조되어졌습니다.
아무튼 ‘세속적 지혜’와 ‘반야적 지혜’의 두 가지 지혜는
우리가 인간으로서 특히 재가 보살로서 살아가려면 반드시 필요한 지혜입니다.
우리는 세속적인 지혜를
지나치게 폄하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도 지나치면 편견과 오류에 빠지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지혜의 힘은 세간과 출세간의 삶 속에서
인과와 시비(옳고 그름)의 진실을 선명하고 명확히 아는 힘입니다.
그래서, 자신과 타인의 참된 행복을 지켜나가는데 있어서,
세간의 행복과 출세간의 행복이 무엇인지를 아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지혜의 힘은
광명(밝음)으로 비유되어 ‘지혜 광명’이라고 했습니다.
어두움, 즉 무명(無明)이 사라져
모든 것이 환하게 밝아져 ‘있는 그대로’의
진실의 모습을 선명하게 볼 수 있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지혜의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세속적 지혜’와 ‘반야적 지혜’를
함께 통찰할 수 있는 안목과 지혜를 통해
자신과 타인을 진정으로 행복의 세계로 인도해줄 수 있는 능력인
‘반야 바라밀’을 수행하는 것은 보살에게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반야심경과 반야바라밀
그렇다면 대승 불교의 시대로 오면서
왜 공성(空性)에 대한 자각으로서의 반야바라밀로서 강조되었을까요?
불자들이 자주 독송하는 <반야심경>을 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야심경은 관세음보살님께서
‘반야바라밀’에 대해 설하는 짧은 경전입니다.
관세음보살님은 "오온(五蘊)의 본성이
공(空)함을 비추어 보고(공성에 대한 자각에서)
일체의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셨다"고 합니다.
보살은 무소득(無所得, 얻을 것이 없다는)의
반야바라밀에 의지하는 까닭에 마음에 걸림이 없고,
마음에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이
전도 몽상(뒤바뀐 꿈같은 생각)을 멀리 떠나 궁극의 열반을 이룬다고 합니다.
그리고, 삼세의 모든 부처님들께서도 반야바라밀에 의지하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최상의 깨달음)를 이룬다고 하셨습니다.
‘공(空)’은 ‘텅 비어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 생각, 감정, 의지, 인식 등에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절대적 이유와 실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절대적 이유와 실체에 집착하고 고집하며
다툼과 망상 속에 살아갑니다.
그런데, ‘텅 비어있다’는 ‘공성’의 의미는
인연지어진 모든 것에는
그런 절대적 이유와 실체는 없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공성을 통찰하게 되면
그 절대적 이유와 실체에 집착하거나 고집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의 가르침처럼 보살은
공성에 대한 자각 속에 무집착, 무소득, 무소유의
끝없는 자유와 실천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4. 보시와 반야 바라밀
예를 들어, 보시를 생각해봅시다.
보시를 행하면 보시를 받는 사람이 곤란과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보시를 행하는 목적입니다.
그런데, 보시를 받은 사람의 반응이나 보답,
보시한 물품에 대한 아까움과 아쉬움,
보시에 대한 공덕의 기대 등에 마음이 집착하고
감정이 생기게 된다면 좋은 보시에 때가 끼게 됩니다.
분명 훌륭한 보시를 행했지만,
집착과 감정으로 오염된 마음 때문에
보시를 통한 평화와 행복과 자유를 충분히 누리기 힘들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나 오랫동안 보시를 계속해 나갈 수 있을까요?
<반야심경>에는 ‘무소득(얻을 것이 없다)’의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그 마음에 걸림이 없다고 했습니다.
즉, 공성의 이치를 깨달아 나의 보시행에 어떤 때가 끼지 않도록
그 어디에도 걸림없고 집착없이 보시의 목적에 맞게 보시행만 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공성의 반야바라밀을 통찰하여 무집착과 무소득의 보시를 행할 때
자타가 행복할 수 있고 지치지 않고 끝없는 보시행을 해나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공성에 기초한 반야바라밀은 무엇이 진리인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 나가야 하는지를 말하는 실천의 이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야바라밀은 무소득의 공성의 자각 하에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등의 다른 바라밀의
끝없는 실천 속에서 체득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6바라밀의 실천에는
항상 반야의 지혜가 자리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즉, 6바라밀이 사(事)라고 한다면,
반야바라밀은 이(理)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야 바라밀은 끝없는 진리의 실천을 말합니다.
반야바라밀의 성취를 통해 무량한 지혜로
무량한 생명을 얻어 이 세상을 불국토로 만드는 일을
세세생생 해나가자는 것이 관세음보살님이
설하시는 반야심경의 요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승불교에서 그렇게
반야바라밀을 강조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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