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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역사

불교의 역사(20) - 대승 불교의 다불(多佛) 신앙과 불신관(佛身觀)

by 아미타온 2023. 12. 12.

<불교의 역사(20) - 대승 불교의 다불(多佛) 신앙과 불신관(佛身觀)>

 

<천불의 부처님을 모신 마곡사 영산전>

 

1. 대승불교의 특징

 

앞 시간까지 대승 불교의 출현과

보살의 6바라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보살은 서원을 세우고 6바라밀을 통해

고통 속에 있는 중생들을 구제하여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는 자비로운 수행자를 말합니다.

 

대승불교는 이와 같은 보살들의 노력으로

이 세상을 불국토로 장엄하는 보살 불교

추구하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곡사 영산전의 수많은 부처님(多佛)>

 

2. 다불 (多佛)  신앙

 

그리고, 대승불교의 또 하나의 특징 중 하나는

다양한 불보살님들에 대한 신앙을 중시하는 불교라는 것입니다.

 

대승불교에서 부처님을 바라보는 관점인 불신관(佛身觀)

소승 불교와는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소승불교는 부처님은 한 시대 한 국토에

오직 한 분밖에 계시지 않는다는 일불(一佛)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대승불교는 한 시대 한 국토에

여러 부처님이 계실 수 있다는 다불(多佛)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승 불교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남방 불교권인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을 가보면 법당에 오직 한 분의 부처님,

즉 석가모니 부처님만을 모시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승 불교를 표방하는 우리나라의 절에는

다양한 부처님과 보살님들을 모시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법당은 대웅전,

아미타 부처님을 모신 법당은 극락전(무량수전),

비로자나 부처님을 모신 법당을 대적광전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문수, 보현, 관음, 지장보살과 같은

대보살님들을 전각에 따로 모시고 신앙합니다.

 

이처럼 수많은 부처님과 보살님을 모시는 다불 신앙은

대승 불교권에서만 나타나는 신앙의 모습입니다.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여래불의 3존불을 모신 대웅보전 (천안 광덕사)>

 

3. 다불 신앙의 배경

 

대승불교의 다불 신앙은 크게 2가지의

사상적, 신앙적 배경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일체 중생들이 모두 불성(佛性)

갖고 있다는 불성에 대한 믿음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부처님의 성품이자

성불의 가능성인 불성(佛性)을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중생들도 부처님의 종자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보살도 이러한 불성에 대한 자각으로 자신과 타인을 함께

성불의 길을 가는 동행(同行)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대승 불교의 불성 사상은 많은 부처님과 보살들이

출현할 수밖에 없는 사상적 씨앗을 갖고 있습니다.

 

둘째는 일체의 모든 생명을 남김없이

다 구제하겠다는 대승의 이타(利他) 사상에 있습니다.

 

다양한 부처님과 보살님들이 필요한 것은

중생들의 다양한 요청에 의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병고에서 고통받는 중생에게는

병고의 고통에서 해방시켜줄 부처님과 보살님이 요청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대승의 이타 사상에 의하면 중생들의 요청에 의해

다양한 불보살님들이 출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육신의 몸으로 우리곁에 오신 석가모니 부처님 (인도 쿠시나가라)>

 

4. 부처님은 진리 그 자체

 

그런데, 이러한 다불설(多佛說)

처음부터 성립된 것이 아니라 단계가 있습니다.

 

초창기에는 법신불(法身佛), 화신불(化身佛), 보신불(報身佛)의

3신불로 발달되었다가 마침내 다불설로 정립되었습니다.

 

대승 불교는 부처님은 과연 누구이며,

부처님의 과보를 가져오는 이유에 대해 깊이 궁구했습니다.

 

초기 경전인 아함경의 <박칼리경>에는

부처님이 늙은 ‘박칼리’라는 제자에게 법을 설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늙은 박칼리가 죽기 전에 부처님의 몸을 한번 보고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하자,

부처님은 박칼리를 꾸짖으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이 썩어 문드러질 몸뚱이에 예배해서 어쩌자는 것이냐?

나(부처)를 보려거든 진리(法)를 보아야 하고,

진리(法)를 보는 자가 나(부처)를 보리라.”

 

<박칼리경>의 부처님 말씀을 살펴보면

법신(法身,진리의 몸)으로서 부처님에 대한 모티브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진리(법) 그 자체가 부처님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열반도>

 

5. <법화경>에서 설하는 영원한 생명의 부처님

 

대표적인 대승경전인 <법화경>은 이를 더욱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법을 설하실 때 삼천대천 세계가 진동하며

땅 속에서 백천억 보살들이 허공으로 동시에 치솟아 올라왔습니다.

 

많은 제자들은 6년의 수행 끝에 깨달음을 얻어

40년 동안 중생을 제도하신 부처님이 어떻게 저렇게

수많은 보살들을 제도하실 수 있었는지에 대해 큰 의문을 품었습니다.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은 내가 석가족에 태어나서 출가하고

6년 동안 수행해서 성불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은 나는 아주 한량없는 오랜 옛날에

이미 성불하여 항상 법을 설하여 왔노라."

 

즉, 부처님은 영원한 생명이고 영원한 진리 그 자체이지만,

인도의 석가모니불로 몸을 나투신 것은

단지 중생들에게 진리를 드러내 보이고 제도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몸은 오고 가는 것이 있어 80년을 사시며

인연 있는 중생들을 제도하시며 열반에 드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법신(진리의 몸)으로서 부처님은

오고 가는 것이 없이 시공의 제약 없이 항상 하시지만,

중생들의 요구에 의해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역사적으로 몸을 나투신다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역사적으로 몸을 나투신 부처님을

화신불(化身佛) 또는 응신불(應身佛)이라고 합니다.

 

중생들의 요청에 응하여 역사적으로 몸을 나투신 부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법신불은 진리 그 자체이기 때문에

시공의 제약을 받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두루합니다.

 

절에 가면 볼수 있는 "불신충만어법계(佛身充滿於法界)"라는

(부처님의 몸은 언제나 진리의 세계(법계)에 충만해 계신다는 뜻)

대승 불교의 법신불에 대한 관점이 성립된 것입니다.

 

<수덕사 원통보전 관세음보살님>

6. 보신불(報身佛)

 

그리고, 대승불교의 발전과 함께 법신불과 화신불 사이에

보신불(報身佛)에 대한 관점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보신불은 보살이 큰 서원을 세우고

바라밀을 수행한 결과로 받은 한량없는 공덕의 부처님의 몸을 말합니다.

 

보신불은 지혜, 자비, 실천력 등에서 무한한 공덕을 지녔기 때문에

중생들에게 원력과 가피를 주실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보신불이 아미타 부처님과 약사여래 부처님입니다.

 

아미타 부처님은 법장 보살 시절의 큰 원력과 바라밀행을 통해

극락 세계를 장엄하여 극락으로 중생들을 구제하고 계십니다.

 

약사여래 부처님도 보살 시절의 12가지 서원의 성취를 통해

중생들의 병고를 치유할 수 있는 가피의 능력을 갖고 계십니다.

 

그리고,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지장보살과 같은

대보살님들도 보살로서 큰 서원을 세우고 6바라밀을 수행한 과보로

받은 한량없는 공덕의 몸으로서 중생들을 위해 부처님이 되지 않고

보살로 계시면서 중생을 구제하는 보신의 보살님입니다.

 

이와 같은 3신불(三身佛)의 정립

대승불교에서 다양한 부처님과 보살님들의 출현과 신앙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월인천강 (月印千江) >

 

7. 월인천강 (月印千江)

 

옛 선인들은 이러한 3신불의 비유를

밝은 달이 일천강에 비치는 월인천강(月印千江)의 비유로 표현했습니다.

 

밤 하늘에 비치는 밝은 달이 일천 개의 강에

그 모습을 비치는 아름다운 광경을 생각해 보십시오.

 

달 그 자체는 법신(法身)이고,

달의 밝음은 보신(報身)이며,

일천개의 강물에 비친 달빛은 화신(化身)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법신, 보신, 화신의 삼신은

따로 떨어진 제각각의 모습이 아니라,

부처님의 본질과 과보와 작용을 통해

세 방향에서 바라본 하나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