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불교의 역사

불교의 역사(26) - 반야부 경전(5) / 반야심경(2) - 색즉시공 공즉시색

by 아미타온 2023. 12. 24.

<불교의 역사(26) - 반야부 경전(5) / 반야심경(2) - 색즉시공 공즉시색>

 

<스님과 장군>

 

1. 장군과 스님 이야기

 

지난 시간에 ‘오온개공’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어느 장군의 이야기를 통해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이치를 한번 더 살펴보겠습니다.

 

전쟁터에서 큰 전공을 세운 용맹한 장군이 있었습니다.

 

장군은 불교와 스님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며

나라와 백성을 지키는 자신과는 달리,

속세와 떨어져 마음이 부처라며 깨달음을 이야기하는

스님들을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장군은 나이가 들어 은퇴하였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중에 유명한 고승이 있다는 말을 듣고

고승을 혼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절을 찾아가서 고승과 마주하였습니다.

 

“나는 장군이요. 그대에게 물어볼 것이 있어 왔소.

나는 전쟁터에서 많은 사람들을 내 칼로 죽이고 군사들을 시켜 죽이게 했소.

불교에서는 살생을 하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했으니 나는 지옥에 떨어질 것이요.

그렇지만 만약 내가 전쟁을 승리로 이끌지 못했다면

이 나라의 백성들은 적의 손에 죽음을 당했을 것이요.

그 점에서 보면 나는 나라와 백성을 구했으니

극락에 오를 수 있는 게 아니겠소.

나는 극락에 오르는 것이요,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요?”

 

지옥간다 말해도 틀리고,

극락간다 말해도 틀리고,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심산이었습니다.

 

그런데, 작은 키에 옹색해 보이는 외모의 고승은

위풍당당한 거구의 장군을 위아래로 한번 훑어보고는 콧웃음을 쳤습니다.

 

“네 까짓 놈이 장군이라고?

웃기고 있네.

거렁뱅이라도 네 놈보다는 낫겠다.

배가 고프다면 밥한술 줄테니 먹고 썩 꺼지거라.”

 

장군의 눈에는 불똥이 튀었습니다.

 

어디서나 극진한 예우와 존경을 받던

장군으로서 이런 수모는 처음이었습니다.

 

있는대로 열이 받은 장군은 벌떡 일어나 칼을 빼어 들었습니다.

 

순간 고승의 음성이 귓청을 때렸습니다.

 

“분노하는 그 순간에 지옥문이 열린다.”

 

찰나에 장군의 머릿속을 강타하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장군의 눈에는 일점의 두려움이나 당황하는 빛이 없이

고요하고 평화롭게 앉아 있는 고승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움과 증오가 사라지는 그 때에 극락이 열리는 것이지요.”

 

고승은 더 이상 말이 없었고, 장군은 손에 든 칼을 내려놓았습니다.

 

무섭게 치밀어 오르던 증오와 분노의 불길이 어느샌가 씻은 듯이 사라졌습니다.

 

장군은 고승에게 예를 표하고 고승과 함께 생활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고승의 고요와 평화가 장군에게도 찾아왔습니다.

 

<연꽃>

 

2. 이고득락

 

불교는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는 이고득락(離苦得樂)의 가르침입니다.

 

어떻게 해야 지긋지긋한 고통이 끝나는 걸까요?

 

장군과 고승의 일화에서 보자면 칼을 버림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장군은 칼을 버렸습니다.

수십년간 차고 있는 장검과 함께 마음의 칼도 버렸습니다.

 

진정 무서운 칼, 세월이 지날수록

날이 시퍼래지는 미움과 증오의 칼을 버린 것입니다.

 

칼이 없는 그 마음에서 고요와 평화의 꽃이 피게 됩니다.

꽃이 없는 그 곳이 지옥이고, 꽃이 만발한 그 곳이 극락입니다.

 

꽃을 피우고 싶다면 반드시 칼을 버려야 합니다.

칼이 있는 한 고통의 윤회, 복수의 윤회, 원한의 윤회가 끝날 수 없습니다.

 

칼만 없으면 꽃은 순식간에 피어납니다.

장군이 분노의 칼을 거두는 순간 마음의 꽃이 활짝 피어 났습니다.

 

마음은 원래 텅 비어 있는 것(공-空)입니다.

빈 그릇(무아-無我)입니다.

 

여기에 (악업- 惡業)을 담거나,

(선업-善業)을 피울지를 결정하는 주인은

'나(오온-五蘊- 육체와 정신작용)'입니다.

 

불교에서 ‘나’가 없다는 말은

칼이나 꽃과 떨어진 독립된 존재로서의 ‘나’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나는 공한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칼을 택하는 순간 칼과 나는 하나가 되고,

꽃을 피우는 순간 꽃과 나는 하나가 됩니다.

꽃도 칼도 아닌 그 밖의 내가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칼이 지옥갈 때 나도 지옥가야 하고,

꽃이 극락갈 때 나도 극락가는 것이지,

칼이 지옥갈 때 나는 멀쩡하고,

꽃이 극락가도 나는 고생바가지를 뒤집어써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나(오온)는 공하지만,

칼을 들면 나는 칼이 되고,

꽃을 피우면 나는 꽃이 됩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3. 진공묘유

 

공하지만,

인연 따라 묘하게 삶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비어 있고 실체가 없는데도

업을 따라 삶이 나타나는 것이기에

대승 불교에서는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합니다.

 

반야심경에서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이와 같이 ‘진공묘유’ 또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철저히 납득하고 깨달아 얻는 지혜를 ‘반야’라고 합니다.

 

<반야심경>에서 설하는 반야의 지혜란

‘오온개공’의 ‘공성(空性)을 납득하는 것이지만,

그 방식은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진공묘유’의 방식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마음’이라는 텅빈(空) 하늘 위에

‘오온(육체와 정신작용)’이라는 구름으로

칼을 그리면 칼이 나이고, 꽃을 피우면 꽃이 나입니다.

 

마음은 무엇에도 걸림 없고 물듦이 없지만,

그 무엇이라도 거부하지 않습니다.

 

관념, 생각, 의식, 정신, 이성, 감정 등으로

불리는 구름이 모든 것을 짓고 부수는 것입니다.

 

구름이 인연 따라 욕심 따라

이런 저런 모양을 만들어가며

내가 누구다, 내가 무엇이다, 하는 것일 뿐입니다.

 

칼의 망념을 버릴 때 나는 칼이 아닙니다.

고요와 평화의 꽃을 피울 때 나는 꽃입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삶을 살고 있는 내가

칼을 잡고 있는지,  꽃을 피우고 있는지를 잘 통찰해서

고통에서 벗어나는 나의 길이 무엇인지를 찾으라는 가르침이

<반야심경>의 오온개공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