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구경(11) 난다 비구 이야기>
부처님께서 제따와나 수도원에 계시던 어느때
부처님의 이복 동생 난다 비구와 관련하여 게송 13번과 14번을 설법 하셨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성취하시어
영광스러운 담마의 수레바퀴를 굴리시기 시작하시고
라자가하(왕사성)의 웰루와나(죽림정사)에 머무르셨다.
그때 부왕인 숫도다나왕은 부처님께 사신을 보내
고향인 까필라왓투를 방문해주시기를 청하셨다.
그리하여 부처님께서는 여행하기에 가장 알맞는 때를 잡아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시고 당신의 고국인 카필라 성에 도착하시게 되었다.
부처님께서 고국인 카필라 성에 도착한지 3일이 지난 어느 날이였다,
그날은 부처님의 이복 동생인 난다의 결혼식이 있을 예정이었다.
이날 난다는 자기 결혼일을 맞아
집안에 성수를 뿌리는 등 축제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부처님께서 비구 제자들을 거느리고 난다에게로 오셨다.
난다는 부처님께 공손히 공양을 올렸다.
공양이 다 끝나고나서 부처님께서는
당신의 공양 그릇을 난다의 손에 들려주셨다.
부처님께서는 난다의 공양의 공덕을 축복해 주신 다음에
난다에게서 공양 그릇을 돌려 받지 않으셨다.
난다는 부처님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했기 때문에
부처님 발우를 되돌려 드리려고 부처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난다로부터 발우를 돌려 받지 않으시자
결국 부처님과 난다는 왕궁 밖의 길거리까지 나오게 되었다.
그때 신부 측 사람들이 왕궁으로 들어오다가 신랑인 난다 왕자가
부처님의 발우를 공손하게 들고서 부처님을 뒤따라 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이 소식은 금방 아내가 될 신부 자나빠달깔야니에게도 전해졌다.
그들은 신부에게 다음과 같이 알려주었다.
"부처님께서 지금 난다 왕자를 데리고 어디론가 가십니다.
아마도 그 분을 당신으로부터 빼앗으시려는것 같습니다."
이에 당황한 신부 자나빠달깔리니는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
머리는 산발한채로 황급히 나와서 난다 왕자를 쫓아갔다.
그녀는 눈물겨운 목소리로 신랑을 불렀다.
"왕자님! 속히 돌아오세요."
신부의 애절한 목소리를 들은 난다 왕자의 심정은 사정없이 떨렸다.
그렇지만 부처님은 난다가 들고 있는 발우를 끝내 돌려받으시지를 않으셨다.
하는 수 없이 난다는 부처님을 쫓아 결국은 수도원까지 오게 되었다.
수도원에 도착한 부처님은 난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난다야, 너는 비구가 되고 싶지 않느냐?"
난다는 감히 그렇지 않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본 마음과는 다르게 대답 하고 말았다.
"예. 저도 비구가 되고 싶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옆에 있는 비구에게 지시하셨다.
"난다를 비구로 출가시켜라."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까빨리성에 도착하신 지 사흘만에 난다를 비구로 만드셨다.
부처님께서는 나중에 다시 비구 대중들과 함께 라자가하(왕사성)로 돌아오셨다.
이 때 사왓티(사위성)에 추진 중이던 제따와나 수도원(기원정사)이 완공되었으므로
부처님께서는 다시 사왓티로 가셨다.
이때 난다 역시 부처님을 따라 수행 장소를 사왓티로 옮겼다.
난다는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출가한 형편이었으므로 수행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는 제따와나 수도원에 있는 동안 수행 생활에 대한 불편과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는 다른 비구들에게 때때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형제들이여, 나는 이 생활이 만족스럽지 않소.
도대체 이런 수행 생활을 견디는 것이 몹시 힘이 드오.
비구계를 반납하고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도 있소."
이와 같이 갈등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 이야기는 부처님께도 전해졌다.
어느날 부처님께서는 난다를 부르시어 이렇게 물으셨다.
"난다여, 이러이러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것이 사실이냐?
너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여래는 너에게 묻겠다.
너는 무엇 때문에 성스러운 생활을 하지 않고
왜 계를 버리고 가정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냐?"
"부처님 제가 집을 떠나 왔을 때
그 날은 저의 결혼식이 있던 날이었습니다.
제가 부처님을 따라 이곳으로 올때
저의 아리따운 신부인 자나빠달꺌야니는
고운 머리카락을 흐트리고 제 뒤를 따라오며
돌아오라고 목이 메어 저를 불렀습니다.
제게는 자꾸만 자나빠달꺌야니의 정다운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럴 때면 저는 현재의 생활을 만족스럽게 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가정으로 돌아가서 재가 신자로서 생활하기를 원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난다의 이야기를 다 들어 주신 후
신통력으로 난다를 데리고 천상의 세계로 가셨다.
그렇게 천상으로 가는 길에 부처님께서는
산불이 난 숲 속에서 귀와 꼬리를 불에 태워 잃어버린 암원숭이를 보여 주셨다.
그 원숭이는 나무 등걸 위에 앉아서 게걸스럽게 음식물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이 때 부처님께서는 난다에게 물으셨다.
"난다여, 저 귀와 꼬리가 없는 원숭이와 네 신부 중에 어느편이 더 사랑스러우냐?"
그러자 난다는 "부처님, 어찌 저 원숭이와 자나빠달꺌야니가 비교가 되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부처님과 난다는 곧 33천상세계에 도착했다.
그러자 놀랍도록 아름다운 천녀들이 마중 나왔다.
난다는 천녀들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부처님께서는 난다에게 물으셨다.
"난다야, 네가 그렇게 애착하는 자나빠달꺌야니와
저 천녀들 중 어느 쪽이 더 예쁘고 사랑스러우냐?"
"부처님 저 천녀의 아름다움은 자나빠달꺌야니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저 천녀들의 아름다운 자태와 비교할 때
자나빨달깔야니는 아까 본 암원숭이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난다야, 네가 만약 열심히 수행 정진한다면
여기 수많은 천녀들을 네 곁에 머물게 할 수 있다고 여래가 보증하겠다."
이 말씀에 난다의 가슴은 설레였다.
그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부처님께서 그렇게 보증하신다면 저는 열심히 수행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약속이 성립되고 부처님과 난다는 수도원으로 돌아왔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비구들 사이에 소문이 돌았다.
그 소문은 난다는 천상의 천녀들을 얻기 위해 수행하고 있으며,
그에 대해 부처님께서 보증까지 하셨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런 마음 가짐으로 수행하는 난다는
마땅히 "고용된 수행자"라고 불러야 하며,
"보상을 기대하고 수행하는 사람"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말이 들렸다.
이런 소문과 동료 비구들의 시선은 난다에게 민망함과 고통을 주었다.
그렇지만 그는 고귀한 가문의 출신답게 그런 소문에 개이치 않고 수행에 매진했다.
이런 모든 불명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굳은 결심을 세우지 않을수 없었다.
그래서 쉬지 않고 선정 수행에 몰두했고 마침내 깨달음을 성취했고 위없는 경지를 증득했다.
그는 이제 일체의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고,
모든 갈애와 집착에서 벗어난 대자유인이 된 것이었다.
그렇게 모든 장애로 부터 벗어났고 수행자로서 목표를 성취한 난다는
부처님을 찾아뵙고 지극한 경외심과 감사의 마음으로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는 다음과 같이 말씀드렸다.
"부처님, 부처님께서 전날 제가 깨달음을 얻으면
아름다운 천녀들의 주인이 될 것이라고 보증하셨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저는 이제 깨달음을 얻었지만,
저와 하신 그 보증을 철회해 주실것을 요청합니다."
이에 부처님은 미소지으며 대답하셨다.
"난다야, 훌륭하구나!
너는 이제 집착과 애욕으로부터 벗어났고 성자가 되었으니
아름다운 여인이 무슨 즐거움이 되겠느냐?
여래는 네가 깨달음을 성취하던 그 때 이미 그 보증을 풀어 버렸느니라."
뒷날의 어느 때 몇 사람의 비구가 난다에게 물은 일이 있었다.
"형제여, 전엔 수행 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으며,
가정 생활로 돌아가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한 적이 있었소.
지금은 어떠하오?"
난다가 대답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어리석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오."
그러나 그 대답을 들은 비구들은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듣지 않고
난다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부처님께 나아가 난다가 거짓말을 한다고 사뢰자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그것은 그대들이 잘못 안 것이니라.
난다의 지난 날의 마음은 마치 엉성하게 지붕을 이은 집과 같았으나,
지금은 튼튼하게 지붕을 지은 집과 같이 되었느니라."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다음의 게송 두 편을 읊으셨다.
마치 성글게 이은 지붕에
비가 쉽게 스며들 듯이
올바로 수행되지 않은 마음에
탐욕과 갈망은 쉽게 스며든다.
마치 튼튼하게 이은 지붕에
비가 스며들지 못하듯이
올바로 수행된 마음에
탐욕과 갈망은 스며들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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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속적 유산과 탈세속적 유산
부처님의 이복 동생인 난다 비구 이야기를 읽다보면 웃음이 나옵니다.
부처님은 사랑하는 여인과의 결혼식을 앞둔날 동생을 찾아가 출가시키셨습니다.
신부는 울부짖고, 가족들은 황망해하며 결혼식은 파토가 났을 것입니다.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결혼식 날 혼란의 상황이 짐작이 갑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발우를 들고서 마치 고삐에 코를 꿴채
주인을 따라가는 송아지같은 난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마음으로는 당장에 약혼녀의 품으로 달려가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부처님을 따라와서는 부처님의 출가 권유에 응낙하는
난다를 보면 일면 착하기도 하고 그 심정이 어찌했을지 공감이 갑니다.
왜 부처님께서는 결혼식 날의 혼란 속에서
출가 의지가 크지 않았던 이복 동생 난다 왕자를 출가시키셨을까요?
첫째는 아들 라훌라를 출가시키신 것처럼
사랑하는 동생에게 세속적 유산(왕위,재산,사랑)보다는
윤회의 사슬을 끊는 깨달음의 유산을 전해주고 싶은 부처님의 마음이셨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는 난다 왕자의 그릇됨이
능히 깨달음에 이를만한 지성과 수행력이 있으므로
수행을 통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부처님의 혜안이 있으셨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세번째는 고귀한 가문의 왕자이고 결혼을 앞둔 상황이지만,
출가하여 수행자의 길로 들어서는 모습을 보고
많은 석가족 사람들이 윤회의 사슬을 끊는 수행의 가치가
세속적 권력과 사랑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각성시키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부처님께서 카필라성을 방문하시고
석가족 사람들에게서 출가 열풍이 분 것은
난다와 라훌라의 출가가 큰 몫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합니다.
2. 출가의 동기
난다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출가 수행자가 되어 수행에 대한 의지도 강하지 않았고,
수행을 하게된 동기 또한 천녀들과 사랑을 위한 목적으로 천박한 측면이 있었습니다.
깨달음을 얻는데 있어 수행을 시작하게 된 동기가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요?
난다 비구의 이야기를 통해 보면 수행의 동기는 중요할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해탈을 위한 굳은 신념에서 수행자의 길로 접어들었다면
자기 목표가 분명하므로 훨씬 강력하게 수행의 길로 나아갈수 있겠지요.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럴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나 실연을 통한 삶의 허무함에서
불교에 관심을 갖고 수행의 길을 가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어린 나이에 가난한 가정 상황이나 부모님이 출가를 시켜
어쩔 수 없이 수행자가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난다 비구처럼 수행을 잘 하면 약혼녀보다 100배 예쁜 천상의 여인과
연애시켜주겠다는 당근 때문에 수행할수도 있는 것이구요.
따라서, 수행의 길로 접어들게 된 동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수행의 길로 들어왔고 수행의 열의를 내게 되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갈애와 집착이 강한 사람에게는
오히려 그 강한 갈애와 집착이 수행의 동기로 활용될수 있다는 것.
이런 측면에서는 자신의 갈애와 집착의 정체를 명확히 아는 것,
즉, '고'의 정체를 명확히 아는 고성제에 대한 자각이야말로
수행의 출발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3. 갈애와 집착에서 벗어나는 인식 구조
난다 비구는 수행의 동기가 천박했기 때문에
나중에 난다 비구나 아라한이 된 것을 사람들이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난다 비구가 해탈하였슴을 증명하셨고,
난다는 더 이상 여인의 미색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인의 미색뿐 아니라 갈애와 집착에서 완전히 벗어나
어떤 상황에서도 대상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즉, 튼튼하게 이은 지붕처럼
갈애와 집착과 유혹의 비가 침투할 수 없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아라한은 바로 이와 같이 튼튼하게 이은 지붕처럼
갈애와 집착과 유혹의 비가 침투할수 있는 성자(星者)를 말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렇게 마음에 흔들림이 없고
탐욕과 갈망의 비가 침투할 수 없는 튼튼한 지붕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을까요?
신심명에 "좋다 싫다 따지는 그 분별심이 없으면 툭 트이어 명백해지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좋다 싫다 따지는 그 분별심이 왜 생길까요?
결국은 자신의 마음 속의 갈애와 집착이 채워지면 좋은 것이며,
마음 속의 갈애와 집착이 채워지지 않으면 싫다는 분별심이 생기지 않을까요?
난다 비구가 어떻게 깨달음을 얻을수 있었을까요?
자신의 마음 속의 애욕으로 인해
암원숭이, 약혼녀, 천상의 천녀에 대해
좋아하고 혐오하는 인식의 시스템의 구조를 깨닫고
이러한 좋고 싫음, 애착과 혐오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인식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요?
게송에서 "올바르게 수행된 마음"이란
이러한 새로운 인식 시스템을 갖춘 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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