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구경(9) 사리뿟따 존자와 마하 목갈라나 존자 이야기(1)>
부처님께서 웰루와나(죽림정사) 수도원에 계시던 어느 때,
부처님의 으뜸가는 두 제자인 사리뿟따와 마하목갈라나 존자,
그리고 그들은 과거 스승이었던 산자야와 관련하여 게송 11번과 12번을 설법하셨다.
라자가하(왕사성) 근처의 작은 지방에 '우빠띳사'와 '꼴리따'라는
이름을 가진 두 개의 마을이 이웃에 나란히 자리잡고 있었다.
어느 때 우빠띳사 마을의 브라흐만 부인 루빠사리가 아기를 가졌는데,
공교롭게도 이웃 꼴리따 마을에 사는 꼴리따 부인 역시 아기를 가졌다.
이들 두 집안은 칠대 선조 때부터 친형제처럼 지내오던 다정한 사이여서,
궂은 일이든 좋은 일이든 모두 터놓고 상의해 오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경사의 경우에도 서로간의 임신 소식을 알게 되어
서로 돕는 가운데 열 달이 지나갔다.
마침내 아기들이 태어났는데, 둘 다 사내 아이였다.
아기들의 이름을 짓게 되는 날
루빠사리 부인의 아기는 우빠띳사 마을에서 태어났다 하여 '우빠띳사',
꼴리따 부인에게서 태어난 아기도 태어난 마을 이름을 따서 '꼴리따'라고 정해졌다.
그들 두 아기는 씩씩한 소년들로 자랐으며,
당시의 최고급 학문을 모두 섭렵했다.
소년 우빠띳사는 가끔씩 집에서 가까운 강둑에 나가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생각에 잠기곤 했다.
그럴 때면 오백 명이나 되는 어린 아이들이 우빠띳사를 따라다녔다.
그들은 우빠띳사를 매우 존경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정은 꼴리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꼴리따에게도 언제나 오백 명의 어린아이들이 따라다녔다.
그래서, 그들 두 소년이 만날 때에는 천 명이나 되는 많은 어린 아이들이
구름 떼처럼 뒤따라 참으로 엄청난 장관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때, 라자가하(왕사성)에 축제의 계절이 왔다.
매년 이때가 되면 라자가하의 젊은 남녀들은
이 축제에 참석하기 위해서 여러 곳으로부터 모여들곤 했다.
이들 두 젊은이들 또한 예년과 다름없이 그 축제에 참석했는데,
이들을 위해서 두 대의 수레가 따로 준비되었다.
그 수레는 매우 화려하게 장식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탄 수레가 거리를 지날 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바라보며 감탄하는 것이었다.
우빠띳사와 꼴리따는 언제나 그랬듯이
이날 축제 때에도 함께 있으면서 기쁨과 즐거움을 나누고 있었다.
그 축제 가운데에는 수행자들에게 음식을 바치는 한편
널리 많은 사람들과 나누어 먹는 행사가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완전히 성숙하여
사물을 깊이 있게 통찰할 수 있는 나이가 된 이들 두 사람은
축제의 여러 가지 놀이나 우스운 행사들을 보아도 아무런 흥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제 울어야 할 때 울음이 나오지 않았고,
웃어야 할 때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웬일인지 모든 것이 무의미하고 덧없이 보이는 것이었다.
그들 두 젊은이는 그때 높은 언덕 위에 올라가
사람들과는 따로 떨어져 앉아 있었다.
내려다보이는 저 아래에서 많은 사람들이
노래하고 춤추면서 즐거운 듯이 이리저리 뛰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광경을 보면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렇게 생각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저 광경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
아, 불과 백 년도 지나지 못하여 저 밑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 이 땅 위에서 사라져 아무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이는 실로 무서운 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해탈의 길을 찾아서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던 중 꼴리따가 우빠띳사에게 말을 걸었다.
“벗이여, 그대는 지난해의 축제 때처럼 즐거워하지 않는구나.
그대는 지금 아주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우빠띳사가 대답했다.
“벗 꼴리따여, 나는 지금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무릇 세상사에 있어서 만족은 오래 가지 않는 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저기서 춤추고 노래부르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이와 같이 사는 세상사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묻고 있었다.
그런 나머지 나는 이런 인생의 무의미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해탈을 성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벗이여, 그대 또한 내가 보기에는 매우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가?”
그러자 꼴리따는 우빠띳사가 자기에게 한 것과 같은 말로 대답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서로간 너무나 유사한 생각을 한 것을 발견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참으로 희유한 일이로구나.
우리 두 사람이 꼭 같은 생각을 하였으니!
자, 이제 우리는 해탈의 길을 찾아 나서자.
우리 함께 집을 떠나자.”
그렇게 되어 두 사람은 집을 떠날 것을 결심했는데,
어떤 스승을 따를 것인지는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마침 당시 많은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던 수행자인
산자야가 제자들과 함께 라자가하 성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우빠띳사가 꼴리따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저 산자야를 따라 그의 제자가 되어 수행하기로 하자.”
그리하여 그들은 자기들을 따르는 각각 오백 명의 추종자들은 물론
화려하게 장식된 수레를 집으로 되돌려 보내고
가정을 떠나 산자야의 수행 단체에 들어가 그의 제자가 되었다.
이로써 산자야로서는자신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높은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들처럼 우수한 제자는 실로 흔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 두 젊은이는 산자야 밑에 들어가 수행자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산자야가 가르치는 모든 수행과 학문에 숙달하게 되었다.
그때 그들은 스승에게 물어보았다.
“스승님, 이것이 스승님께서 가르치는 진리의 전부입니까?
아니면 다른 무엇이 또 남아 있습니까?”
스승이 대답했다.
“이것이 전부다.
너희는 이제 내가 아는 것을 모두 알고 깨달았다.
너희들 또한 이제 스승이다.
너희들은 이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
스승의 이런 대답을 들은 우빠띳사와 꼴리따는 매우 실망했다.
그들은 서로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만약 스승이 하신 말씀이 진실이라면
우리는 이제 이 수행 단체에서 더 이상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우리가 집을 떠나 수행자가 된 것은 스승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의 무의미로부터 벗어나 해탈을 성취하고기를 원해서였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스승이 알고 깨달은 모든 것을 배워 그것에 통달했지만
우리 마음은 아직 해탈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이 스승으로부터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가 없구나.
그러나 사바세계는 넓고 사람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을과 마을, 시장과 시장들을 여행하면서 새로운 스승을 찾아보자.
아마도 우리는 해탈의 길을 올바르게 가르쳐 주실 스승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산자야를 떠나서 온 세상을 헤매어 떠돌아 다녔다.
그들은 어느 곳이든 스승이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바로 그곳으로 달려가 가르침을 받았다.
그들이 찾은 스승 중에는 출가한 수행자도 있었고, 혹은 속인들도 있었다.
또 그들은 그런 여행 중에 상대방의 질문을 받게 되면
그에 대하여 대답해 주기도 했는데,
일단 토론이 벌어지면 그들을 당해내는 사람이 없었다.
이 같은 방법으로 그들은 이 세상을 샅샅이 돌아다녔지만,
그들을 만족시켜 줄 스승을 끝내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 두 사람은 마침내 집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그때 우빠띳사가 꼴리따에게 말했다.
“벗 꼴리따여, 우리 둘 사이에 이런 약속을 하자.
누구든지 먼저 죽음을 초월하는 진리를 만나거든
지체하지 말고 서로간 알려주기로.”
이에 꼴리따도 동의하여 그들은 약속을 간직한 채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성취하시고
사르나트(녹야원)의 사슴동산에서 첫 설법을 하시었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시게 되었다.
그 즈음 부처님께서는 초기 제자들로 하여금 전법을 떠나게 하시고
당신께서도 붓다가야에 오시어 우루벨라 까사빠 삼형제를 제자로 삼으셨다.
그런 다음 마가다국의 빔비사라왕으로부터 웰루와나 수도원을 기증받으셨다.
그때 부처님의 최초의 제자 다섯 사람 가운데
막내 격인 앗사지 비구는 부처님과 여행을 같이하면서
웰루와나 수도원(죽림정사)에 도착하여 숙소를 정하고
아침 일찍 라자가하 시내로 탁발을 나갔다.
바로 이때, 우빠띳사는 아침 일찍이 일어나
수행하는 수행자들을 찾아보기 위해서
라자가하 시내를 걷다가 앗사지 비구를 만나게 되었다.
우빠띳사는 앗사지 비구가 탁발을 하기 위해 점잖고 위엄 있게,
자신의 정신을 걸음걸이에 잘 집중 밀착시키면서
흔들림 없는 태도로 걸어가는 것을 유심히 바라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그는 아직까지 저렇게 단아하고, 맑고, 번뇌 없는 태도로,
다만 걸을 뿐 아무런 잡념이 없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우빠띳사는 혼자 중얼 거렸다.
‘나는 아직껏 이같이 진정한 수행자다운 태도를 지닌 이를 만난 적이 없다.
이런 수행자라면 틀림없이 아라한 과를 성취한 성자일 것이다.’
앗사지 비구의 위의(威儀)에 감동 받은 우빠띳사는
곧 그에게 다가가 여러 가지 질문을 하고 싶었다.
예컨대, 당신은 무엇을 구해서 출가하여 수행자가 되었습니까?
당신은 어느 분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습니까?
당신은 어떤 가르침을 배우고 있습니까? 등등.
그렇지만 그는 지금 이 수행자가 거룩한 태도로
탁발을 하는 중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래서 우빠띳사는 혼자 생각했다.
‘내가 내 생각만을 앞세워
지금 이 분에게 질문을 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이분은 탁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분의 뒤를 조용히 따라 가다 보면 어느 땐가 질문을 할 적당한 기회가 올 것이다.’
우빠띳사는 이런 생각으로 앗사지 비구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랐다.
마침내 앗사지 비구는 음식을 얻은 다음에 어떤 장소로 향하는 것이었다.
앗사지 비구가 그 장소에 이르러 앉기를 원한다고 느꼈을 때
우빠띳사는 얼른 자기의 좌복를 꺼내어 깔아 앗사지로 하여금 자리에 앉을 수 있게 했다.
그리고 비구가 음식을 다 들기를 기다려 자기의 물병을 꺼내어 그에게 바쳤다.
이런 모든 행위는 제자가 스승에게 바치는 마땅한 존경의 표시였다.
그런 다음 두 사람은 서로간 즐거운 인사를 나누었다.
이때 우빠띳사는 앗사지 비구에게 물었다.
“사문이시여,
수행자 당신의 모든 감각 기관은 매우 맑고 고요하고 깨끗하며 또한 밝습니다.
당신의 피부는 아주 투명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당신은 틀림없이 매우 깊고 높은 가르침을 닦는 분일 것입니다.
나는 당신에게 묻습니다.
당신께서는 무엇을 구하여 가정을 떠나 수행자가 되셨습니까?
그리고 당신의 스승은 누구십니까?
당신께서는 어느 분의 가르침을 수행하고 계십니까?”
앗사지 비구는 우빠띳사의 질문을 받고 생각했다.
‘이 사람은 나와 내 수행에 대해서 좋은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구나.
그러므로 나는 이 사람에게 부처님 법의 참다운 깊이를 보여줘야 마땅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앗사지 비구의 말은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게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그는 말했다.
“형제여, 나는 이 진리에 관한 한 초보적인 수준에 지나지 않는 사람이오.
나는 비구가 된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이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수행하는 진리를 잘 설명할 수가 없소이다.”
우빠띳사는 앗사지의 겸손한 태도에 깊은 호의를 느꼈다.
그는 진지하게 청했다.
“스승이시여, 제 이름은 우빠띳사입니다.
저는 당신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의 수행의 정도와 관계없이 오직 진리에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께서 아시는 정도까지만이라도 제게 가르쳐 주십시오.
저는 당신이 해주는 짧은 가르침을 가지고
그 수백 배나 될지도 모르는 넓고 깊은 진리의 참뜻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자부합니다.
저는 실로 많은 수행자들과 스승들을 만나서 가르침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이르러서 앗사지 비구는 자기가 알고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서 게송 하나를 골라내어 읊어 주었다.
"모든 현상의 진행은 조건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빠띳사는 이 게송을 듣자마자 바로 진리에 대한 바른 눈을 갖추게 되었다.
그는 이 한 줄 게송을 듣는 것만으로
그 배후에 있는 일천 가지의 진리를 능히 유추해 내었던 것이다.
우빠띳사가 의외로 쉽게 법안을 갖추고 크나큰 환희심을 일으키는 것을 본
앗사지 비구는 다시 게송 하나를 더 읊어 주었다.
"여래께서는 말씀하신다.
모든 현상은 조건에 의해 일어나고
또한 조건에 의해 사라진다고."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빠띳사는 이 게송에서는 기쁨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여기에는 반드시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앗사지 비구에게 말했다.
“제게는 이 정도로 충분합니다.
더 이상 말씀하지 마십시오.
다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의 스승이신 그분께서는 어디에 계시는지요?”
앗사지 비구가 대답했다.
“형제여, 부처님께서는 지금 웰루와나 수도원에 계신다오.”
이에 우빠띳사는 앗사지 비구에게 말했다.
“비구께서는 먼저 웰루와나 수도원으로 떠나십시오.
제게는 아주 절친한 친구가 한 사람 있습니다.
저는 그와 누구든지 죽음을 초월하는 진리를 발견하면
지체없이 상대방에게 전해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 가장 드높은 진리의 길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니 저는 약속을 지켜야만 합니다.
아마도 제 친구 또한 제 권유를 받고 나면
반드시 부처님께 귀의하고 싶어할 것입니다.
저는 곧 친구와 함께 비구님의 뒤를 따라
스승께서 계시는 곳으로 가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우빠띳사는 앗사지 비구에게 오체투지로 절을 한 뒤
오른쪽으로 세 바퀴를 돌아 최상의 존경을 표시한 다음
곧 그 자리를 떠나 친구 꼴리따에게로 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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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삶의 무상성과 허망함
불교 교단의 두 기둥이었다고 하는
사리불 존자와 목련 존자가 부처님께 귀의하기 전의 인연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인상 깊은 부분은 두 존자가 해탈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입니다.
<법구경> 이야기에서 그 계기는 축제 때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놀고 즐기고 희희낙락하고 있는데,
두 존자는 그 축제 장면을 보고 오히려 무상함과 허망함을 느끼셨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출가하시기 전에도 이러한 장면이 나옵니다.
아버지인 정반왕은 출가전의 부처님께 3개의 궁전을 지어주고,
많은 시녀들을 붙여 재미있게 노는 즐거움에 빠지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 부처님의 고뇌는 더욱 깊어져 갔고,
출가하시기 전날 밤 흥청망청 노는 축제가 끝난 후
추하게 쓰러져 자는 미희들의 모습을 보고 오히려 무상함을 느끼셨다고 합니다.
야사 비구도 쾌락에 빠져 매일 노는 하루하루에 답답함을 느끼고
이 쾌락적 삶 속에서 오히려 삶의 허망함을 강하게 자각하고
부처님을 만나 불법에 귀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는 저렇게 춤추고 노래부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이렇게 사는 세상사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묻고 싶다.'
이러한 사리불 존자의 삶의 무상함, 허망함에 대한 독백이
어떻게 보면 진리를 구하는 출발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놀이에 빠져 사는 삶, 일에 빠져 바쁘게 사는 삶을
부처님께서는 좋아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노는데 빠지고 바쁘게 살게 되면
이러한 삶의 무상성, 허망함을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삶의 무상성, 허망함을 깊이 느끼고 자각해야
두 존자처럼 도를 구하는 길을 떠나게 됩니다.
2. 삼법인
불교에는 결코 변할 수 없는 세가지 진리가 있다고 합니다.
"삼법인"이라고 하는 "무상, 고, 무아"의 진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무상, 고, 무아를 얼마나 깊이 통찰하고 자각하느냐가
깨달음의 길로 가는 열쇠라고 생각합니다.
출가하기 전의 사리불 존자와 목련 존자는
무상과 고에 대한 깊은 자각으로 진리를 구하게 되었고,
앗사지 존자로부터 모든 것은 연기되어 있다는 무아의 게송을 듣고는
무아의 이치에 눈을 뜨면서 한없는 법열을 느끼게 되었고 부처님께 귀의하게 되었습니다.
삶의 허망함(무상과 고)을 얼마나 깊이 느끼고 자각하여
열반의 진리를 구하고자 하는 열망을 갖는 것의 중요함을
두 존자의 불법에 귀의하기 전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세지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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