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강경(15) 제5분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 - 형상 >
<금강경(15) 제5분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 - 이치에 맞게 실답게 보라>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몸의 상(相)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볼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몸의 상은 곧 몸의 상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다.
상에서 상 없음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여래를 보는 것이다."
1. 진리의 눈
제 5분의 제목은 "여리실견(如理實見)"분입니다.
이치에 맞게 실답게 보라.
진리의 눈으로 참 모습을 보라.
이와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보는 것이 이치에 맞고,
어떤 것이 진리의 눈으로 참 모습을 보는 것일까요?
4장까지의 부처님 말씀에 의하면
"상(相)에 집착하지 않고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틱낫한 스님의 금강경 해설은 제목을
<상에 집착하지 않는 진리>라고 제5분의 제목을 지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혜안(지혜의 눈)이 열린다"는 것은
상에 집착하지 않고 대상을 보는 눈이 열린다는 의미입니다.
2. 몸의 형상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몸의 형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볼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몸의 상은 곧 몸의 상이 아닙니다."
금강경의 3,4분에서 <금강경>의 가르침은 설해졌습니다.
보살들이 큰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에 의지하고 어떻게 그 마음을 닦아 나가야하느냐입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살들은 중생들을 괴로움에서 건지고
보살도의 길을 걷겠다는 서원을 가지고 살아가라.
이와 같이 중생들을 제도하지만,
내가 중생을 제도한다든지 하는 공명심이나
삿된 마음없이 물처럼 바람처럼 자연스럽게 행하라.
그리고, 보살은 중생을 괴로움에서 건지고
이들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보시를 행해야 한다.
그러나, 보시를 행할 때 상에 집착하지 말고 보시를 행해야 하며,
그렇게 보시할 행할 때 보시의 즐거움은 한량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결론은 났지만,
부처님께서는 수행자들을 위해서
더 깊은 이해와 통찰을 얻게 하시려고
5분부터 32분까지 예를 들어 계속해서 법문을 하시는 것입니다.
사홍서원에서 "법문무량서원학"이라고 했습니다.
결론은 하나라고 해도 법문은 무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중생들의 상황과 이해도가 다르기 때문에
무량하게 많은 법문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무량한 법문을 설하는 것은
부처님의 자비심이 참으로 깊기 때문입니다.
금강경 제 5분은 "부처님의 32상"을
예로 들어 "상에 집착하지 않는 법"을 설합니다.
인도의 전통적 사고에 의하면
부처님이나 전륜성왕과 같이 위대한 분은
일반 사람과는 다른 신체적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을 흔히 "32상 80종호"라고 합니다.
32가지의 큰 신체적 특징과
80가지 미세한 몸의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들이 불상을 보면
부처님의 머리꼭대기 한 가운데
살이 솟아올라 꼭 상투머리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일반 사람과 차이가 나는
32가지의 몸의 상(신상 身相)의 차이를 보이신다는 것입니다.
당시 인도 사람들은 부처님과 같은 위대한 분은
우리 중생들과는 다른 과보의 신체적 특징을 가진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처님은 "이러한 32가지 몸의 상으로서 여래를 볼 수 있겠는가?" 라고
수보리 존자에게 질문하셨습니다.
금강경 3~4분에서 '색성향미촉법에 집착하지 않는 무상의 진리'를 받아들인
수보리 존자는 부처님의 질문의 의도를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색(형상)으로 보이는 부처님의 32신상만으로
부처님을 보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은 물론 거룩한 상호를 가지고 계시지만,
부처님의 32상만으로 부처님을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 라는 답변이셨습니다.
3. 법을 보는 자
<아함경>의 박칼리 비구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부처님께서 죽림정사에 계실 때
박칼리라는 늙은 비구가 병환이 깊어
마지막 소원으로 부처님을 뵙고자 하였습니다.
성 밖에 계시던 부처님은
이 말을 전해듣고 그 길로 성 안으로 직접 오셨습니다.
박칼리 비구가 부처님을 직접 찾아가
예배를 드리지 못함을 원통하게 생각했지만,
이제 부처님을 마지막으로 보아서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부처님은 늙은 박칼리에게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박칼리여!
이 썩어질 몸둥이를 보고 예배를 해서 어쩌자는 것이냐!
법(法)을 보는 자는 나를 보는 사람이요,
나를 보는 사람은 법(法)을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나를 보려면 법(法)을 보아라"
이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박칼리 비구는 지혜의 눈을 떴다고 합니다.
박카리 비구의 이야기는 부처님의 참 모습은 몸뚱아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가르치신 법(法)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왜 대승 불교 시대에 부처님을 '진리의 몸'인 "법신(法身)"으로
파악하려는 움직임이 나왔는지 이해가 되는 부분입니다.
수보리 존자의 "여래께서 말씀하신 몸의 상은 곧 몸의 상이 아닙니다."라고 하는 답변은
"나를 보려면 곧 법을 보아라. 법을 보는 자가 곧 여래를 본다"는 말씀의 다른 표현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형상에 얽매여 살아갑니다.
그러나, 진정 중요한 것은 진정한 법의 향기와 인격의 향기를 보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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