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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인물사

불교 인물사(7) - 신라 불교의 새벽별, 원효 대사(7) - 원융

by 아미타온 2024. 3. 14.

<불교 인물사(7) - 신라 불교의 새벽별, 원효 대사(7) - 원융>

 

<원효 대사가 수행하며 발심수행장을 지었다고 전하는 우금굴이 있는 부안 개암사>

 

 

<송고승전>의 <원효 전>의 기록에 따르면,

원효 대사는 거사들과 함께 어울려 술집이나 기생집에 드나들었고,

어떤 때는 가야금과 같은 악기를 들고 사당에 들어가 음악을 즐기는가 하면

광대들의 칼과 봉을 가지고 악기를 탔으며 여염집(속가)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산천에서 좌선을 하기도 하였으며,

쇠칼이나 쇠망치를 가지고 다니며 바위에 불상이나 글을 새기기도 하였고,

<화엄경> 등의 여러 불경에 대한 주석서를 지어서 강의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원효 대사는 일정한 규범과

틀에 얽매이지 않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기존 불교계의 승려들은 원효 대사를

"미치광이 같은 말을 내밷으며 해괴한 짓을 하고 다닌다"는

악평을 하며 파계승으로 이단시하고 비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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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암사 대웅보전 석가모니 삼존불>

 

1. 이규보가 본 원효 대사

 

고려 시대 때 <동국이상국집>을 지어 민족의 웅비를 노래했던 이규보는

당시 원효 대사의 소조상이 안치되어 있던 경주 분황사에 들렀다고 합니다.

 

분황사에는 원효 대사의 소조상이 출가한 승려의 모습이 아니라,

머리를 기른 세속인의 모습으로 안치되어 있었다고 전합니다.

 

이규보는 원효 대사 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머리를 깎아 빢빢머리이면 원효대사요,

 머리를 길러 두건을 쓰면 소성 거사로다.

 몸을 백가지로 나투어도 알아 보기 쉬우니

 이 두 모습이 한바탕 연극인 것을..."

 

<개암사 지장전>

 

2. 원효 대사와 유마 거사

 

'원효'라는 이름 뒤에 붙는 명호는 다양합니다.

 

'스님'이란 뜻의 "원효 대사"라고도 하고,

'성스러운 스승'이란 뜻의 "원효 성사(聖師)"라고도 하고,

이규보의 글 속에 나오는 "소성 거사(居士)" 라고도 합니다.

 

원효 대사는 어찌보면

비승비속(非僧非俗, 스님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

의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삶은 어찌보면 유마 거사의 삶과 많이 닮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마경>을 보면 유마 거사의 모습이

송고승전에 나타난 원효 대사의 모습과 유사합니다.

 

<유마경>에서는 유마 거사가

술을 마신 것은 자신이 마시고 싶어서가 아니라,
술집에서 많은 사람에게 불법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상사에 얽매여 사는 중생들에게

세상사에 얽매여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유마거사는 세속에 살았다고 합니다.

 

<개암사 대웅전 청룡의 여의주>

 

3. 원융무애

 

원효 대사는 우리의 인식의 작은 그릇에는 담을 수 없는

한량 없는 큰 그릇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조그만 계율적 지식으로

원효 대사를 재단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원효의 삶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그의 삶과 철학의 근원은 화엄의 "원융무애"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을 대긍정하고 이 현실속에서 걸림없이 살아가는 지혜.

그리고 인연의 다양한 관계성 속에서 그에 걸맞는 삶을 사는 것.

 

제석천의 그물코에는 수많은 구슬들이 달려 있어

서로가 서로를 비추며 빛을 발한다고 하는데,

원효는 70세의 생을 살면서 다양한 중생들을 구슬에 비추며

그들을 유익되게 하는 보살행을 실천하는 원융무애한 보살이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