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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인물사

불교 인물사(8) - 신라 불교의 새벽별, 원효 대사(8) - 사복과 원효

by 아미타온 2024. 3. 17.

<불교 인물사(8) - 신라 불교의 새벽별, 원효 대사(8) - 사복과 원효>

 

<'신라의 미소'라 불리는 기와 조각 (경주 박물관)>

 

 

민중 속으로 뛰어든 원효 대사의 삶에 대한

역사적인 자료는 많지 않습니다.

 

<삼국유사>와 몇가지 야사를 통한 원효 대사의 삶은

신화적으로 각색되어 전설적 형태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신화적으로 각색된 원효 대사의 삶을 유추해보면 

원효 대사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인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세 가지 전설을 통해 원효 대사의 삶과

당시 신라 불교계의 동향을 한번 유추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원효 대사와 사복 성자의 전설에 통해

신라 불교적 민중적 흐름과 보살승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석굴암 관음, 문수, 보현, 범천, 제석천 5보살상 (경주 박물관)>

 

1. 사복과 원효의 전설

 

사복(蛇福) 은 원효와 친구지간이었습니.

어느날 사복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러자, 사복은 원효를 찾아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전생에 도반으로 지냈을 때

서역에 가서 불경을 가져오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 때 우리들과 함께

경을 싣고 왔던 암소가 기억이 나는가?

그 때 그 암소에게 큰 신세를 졌기 때문에 

나는 이 생에 그 암소의 자식으로 태어나 빚을 갚았네.

그런데, 그 암소가 오늘 죽었다네. 

그러니 함께 장례를 지내는 것이 어떻겠나?”

 

원효는 사복의 어머니의 주검 앞에서

합장을 하고 다음과 같이 축원을 했습니다.

 

“태어나지 말아라.

그 죽음이 괴로움이니.

죽지를 말아라.

그 태어남이 괴로움이니.”

 

이 말을 듣고 사복은 다음과 같이 대꾸를 했습니다.

 

“아따. 이 사람아.

말도 되게 많네.

'살고 죽는 것(생사)이 다 괴로움이다.' 

이렇게 단 한마디면 족할 것을…”

 

원효는 사복으로부터 한 방을 얻어맞은 꼴이 되었습니다.

 

<석가모니 탄생불 (경주 박물관)>

 

 

그리고, 사복과 원효가 둘이서

복 어머니의 상여를 매고 산으로 갔습니다.

 

산기슭에서 원효가 사복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지혜의 호랑이(사복의 어머니)를

지혜의 숲 속에 묻는 것이 좋지 않겠나?”

 

그러자, 사복도 맞장구 치며

다음과 같이 시를 읊었습니다.

 

“옛날 석가모니 부처님도

사라쌍수 사이에서 열반에 드셨지.

지금도 그와 같은 사람이 있어

연화장 세계(화엄의 불국토)에 편히 들어가려고 하네.”

 

그러고는 그 숲에서 갑자기 풀을 뽑았습니다.

 

그러자 그 밑에서 밝고 청정한

연화장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시체를 업고

사복이 그 안으로 들어가자 땅이 다시 합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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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상 (경주 박물관)>

 

2. 성인(聖人)

 

<삼국유사>에는 원효 대사가 살았던 시대에

민중과 함께 호흡하며 살았던 새로운 유형의 승려들이 등장합니다.

 

원효 대사가 살았던 시기는

법흥왕의 불교 공인(534년) 이후 약 100여년이 경과한 후였습니다.

 

그런데, 고구려나 백제는 신라보다 약 200년 전에 불교가 공인되었습니다.

 

따라서, 신라에도 법흥왕의 불교 공인 이전에

불교는 벌써 민간에 들어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불교 공인 후 초반에는

자장 율사, 원광 법사처럼

중국 유학승이나 귀족 출신의 승려들이

신라의 왕과 귀족들의 후원 속에 불교를 크게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원효 대사가 살았던 시대부터

세속의 민중들과 함께 살면서 계율에 크얽매이지 않고

민중들의 고통을 어루만져주면서

민중들로부터 성인(聖人, 보살)으로 추앙 받은 승려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위 이야기에서 나오는 사복, 혜공, 대안 등의 승려가 바로 그들입니다.

 

<경주 남산 삼릉곡 삼존불 (경주 박물관)>

 

3. 혜공 스님

 

혜공은 노비 출신의 승려였습니다.

그는 기이한 행동을 하며 민중들에게 불교를 전했다고 합니다.

 

매양 크게 술에 취한 채 삼태기를 지고서

노래하고 춤추며 거리를 돌아다녔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속에서는 혜공을 삼태기 스님이라고 불렀으며,

민중들과 애환을 함께 했다고 합니다. 

 

중국에서 밀교를 공부하고 돌아온 명랑 법사가

금강사를 세우고 낙성식을 열었다고 합니다.

 

고승들이 다 모였는데

오직 혜공 스님만이 오지 않자

명랑 법사가 향을 피우며 혜공 스님이 오기를 경건히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혜공 스님은 하도 간절히 부르기에 나타났소.라고 하며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원효 대사가 각종 경전의 주석서를 저술할 때

혜공 스님을 찾아가 의심나는 점을 물었을 정도로

법에 대한 안목이 뛰어난 승려였다고 합니다.

 

<보살상 (경주 박물관)>

 

4. 대안 스님

 

대안은 중국 송나라 때의 고승열전인 

<송고승전>에도 등장하는 신라 스님입니다.

 

괴이한 옷차림을 하고

항상 저자 거리에서 밥그릇을 두드리며

“대안(大安),대안(大安)”하고 다녔다고 하여 

대안(크게 평안하소서 라는 뜻)이라고 불리는 승려였습니다.

 

그는 고통받는 민중들이

부처님과 불법에 귀의하여

평안과 안락에 들기를 늘 기원하는 스님이었습니다.

 

훗날 <금강삼매경>이라는 어려운 불교 경전이

중국에서 새롭게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때 왕실에서는 대안 스님에게

경전의 정리와 강의를 요청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대안은 마구 뒤섞인 상태로 들어온

금강삼매경을 순서에 맞게 8품으로 정리하여

원효 대사에게 건네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원효 대사가 <금강삼매경>의  주석서인 

<금강삼매경론>을 지었다고 합니다.

 

<법화경의 이불병좌상과 다보탑 (경주 박물관)>

 

5. 사복 성자

 

한편, 위의 이야기에 나오는 사복은

과부의 사생아였다고 하고 장애인이었다고 합니다.

 

12살이 될 때까지 말도 하지를 못하고

잘 일어나지도 못하고 뱀처럼 행동한다고 하여 

'뱀동이', '뱀복이'라고 불려서 그 이름을 사복이라고 했습니다.

 

사복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실천을 했는지는 드러나지 않지만,

뱀처럼 밑바닥 민중들과 함께 잠복하며 말없는 보살행을 실천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경주 최초의 사찰, 흥륜사>

6. 신라 10성(聖)과 보살승

 

신라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천경림'터에 세워진

경주 최초의 사찰이 흥륜사입니다.

 

흥륜사는 이차돈이 순교한 곳이기도 합니다.

 

흥륜사 금당에는 신라 10성(聖)이라 불리는

신라 역사상 가장 뛰어난 10분의 고승들의 조각이 모셔져 있었다고 합니다.

 

신라 10성은 아도 화상, 이차돈, 혜숙, 원효, 의상, 자장,

표훈, 안함, 혜공, 사복의 10분이었습니다.

 

<신라10성 중 한분인 이차돈의 순교>

 

 

이 중에서 원효, 혜공, 사복, 혜숙 4분이 민중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보살행을 하고 불법을 전파한 스님이었습니다.

 

아무튼 사복은 신라 10성 중의 한 분으로

당대에 큰 영향을 미친 승려였던 것입니다.

 

위의 사복 어머니 장례 이야기는

사복이 원효 대사에게 한 수 가르치고 있습니다.

 

원효 대사가 살았던 시기의 신라 불교계는

기존 귀족 불교와는 다른 새로운 민중적 불교 흐름이 존재했슴을 알 수 있습니다.

 

원효, 혜공, 대안, 사복, 혜숙처럼 민중들 속에서 동사섭하고

자비희사의 4섭법을 실천하며 보살의 삶을 살려고 했던 승려들이 존재했습니다.

 

이들은 승려로서의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비승비속(非僧非俗)의 모습으로 살아가며

민중들에게 성인으로 불리며 불교를 전파했던 것입니다. 

 

<경주 흥륜사의 이차돈 순교비>

 

 

신라는 엄격한 골품 귀족제 사회였습니다.

성골, 진골, 1~6두품처럼 출생에 의한 신분제 사회였습니다.

 

이와 같은 신라의 골품제 체제 소외되고 차별받던 사람들,

전쟁으로 고통받는 민중들과 함께 살아가며 불법을 회향했던

이와 같은 보살승의 존재가 원효가 파계후 민중들에게 다가가는 토대가 되었을 것입니다.

 

원효 대사의 보살행은 사복,대안,혜공 등의 보살승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신라의 보살승들은 하층 민중들까지 부처님의 법음을 전하기를 원했고,

원효도 이들과 유대 관계를 가지며 민중들에게 다가갔을 것입니다. 

 

민중들과 동고동락한 신라의 보살승은

당시 엄격한 신분제 사회 속에서는 혁명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귀족 승려들이 보기에는 파계승으로 비추어졌지만,

민중들은 민중들과 동고동락하는 성자(보살)로 비추어졌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원효 대사가 홀로 민중들과 함께 하는 무애의 보살도를 간 것이 아니라,

당시 신라 불교는 민중들과 함께 하는 수준 높은 보살도의 토대가 존재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