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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인물사

불교 인물사(12) - 신라 불교의 새벽별, 원효 대사(12) - 일심

by 아미타온 2024. 3. 30.

<불교 인물사(12) - 신라 불교의 새벽별, 원효 대사(12) - 일심>

 

<경주 박물관 불두상>

 

1. 해골물 깨달음의 게송

 

이번 시간에는 원효 대사의 2번째 키워드인

"일심(一心)"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앞에서 일심은 원효 대사의 화쟁이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목적지라고 말했습니다.


먼저 원효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해골물의 게송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삼계는 오직 마음이요 (삼계유심 三界唯心)
만법은 오직 인식일 뿐이다.(만법유식 萬法唯識)
마음이 일어나면 갖가지 법이 일어나고 (심생고종종법생 心生故種種法生) 
마음이 사라지면 감로수와 해골물이 둘이 아님을. (심멸감분불이 心滅故龕墳不二)
모든 법은 마음에 있는데 달리 어디서 구하겠는가. (심외무법 心外無法, 호용구법 胡用別求)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다. (아불입당 我不入唐)
 
원효 대사의 해골물 깨달음은

한국 불교사에서 중요한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원효 대사의 깨달음의 게송을

원효 대사의 독자적인 창작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대승 경전들에 나오는

몇몇 중요 키워드들의 인용이거나, 이를 약간 패러디한 구절입니다.
 
 삼계유심(三界唯心)’은 <화엄경>의 한 구절입니다.
 '만법유식(萬法唯識)’은 <유식 불교>에서 많이 쓰는 구절입니다.


 '심생고종종법생(心生故種種法生) 심멸감분불이(心滅故龕墳不二)'은
<대승기신론>의 “심생고종종법생(心生則種種法生) 심멸즉종종법멸(心滅則種種法滅)”을

약간 패러디한 것입니다.
 
마지막 구절인 모든 법은 마음에 있다.

달리 어디서 구할 것인가. 나는 당나라로 가지 않겠다" 

강렬한 외침이 바로 원효 대사가 자각한 강렬한 깨달음의 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앞의 구절들은 사실 원효의 이 강렬한 깨달음을

합리적으로 설명해주기 위한 여러 경전의 구절인 것입니다.


이 게송은 원효가 마음의 중요성을 자각함으로써

이전과는 다른 깨달음을 이루었다는 것인데,
그 바탕은 <화엄> <유식> <대승기신론>에서 영감과 힌트를 얻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따라서, 원효 대사의 깨달음을 잘 이해하려면

<화엄>과 <유식>과 <대승기신론>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남산 삼릉곡 관세음보살님>

 

2. 대승기신론과 일심(一心)
 

원효의 수많은 논서 중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로

269번 나오는 단어가 "일심"이라고 합니다.


원효 대사의 "일심(一心)"은

인도의 마명 존자가 지었다는

<대승기신론>에 나오는 단어입니다. 


원효 대사가 <대승기신론>에 주석을 붙인

<대승기신론소>를 원효의 저작 중 최고봉으로 친다고 합니다.


실제로 원효의 사상과 실천에서 중요한 큰 영향을 받은 책이

<대승기신론>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원효 대사는 <대승기신론소>에서
"대승기신론은 여러 경전의 핵심을 하나로 꿰뚫은 유일한 것"

이라고 하면서 <대승기신론>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렇다면 원효 대사는

<대승기신론>의 어떠한 측면을 크게 주목하였던 것일까요?

 
<화엄경> 등 대승 경전에서는 이타행이나 보살행을 가장 중요하다고 설합니다.
반면 <대승기신론>은 중생의 마음(중생심)에 촛점을 두고 대승의 뜻을 살피고 있습니다.


<대승기신론>의 대의를 드러낸 <입의분(入義分)>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법(法)이라고 하는 것은 중생의 마음(중생심)을 말한다.
이 마음은 일체의 세간법과 출세간법을 다 포섭한다.
이 마음에 의하여 대승(마하연,마하야나)의 뜻을 분명하게 나타낸다.
어째서인가?
이 마음(중생심)의 진여상(眞如相)이

대승의 체(體)를 나타내기 때문이며,
이 마음(중생심)의 생멸 인연상(因然生滅相)이

대승 그 자체의 상(相)과 용(用)을 잘 보이기 때문이다.

의(義)라고 하는 것은 3가지 종류가 있으니 무엇이 3가지인가? 


첫째는 체대(體大)이니, 일체법의 진여를 말한다.

평등하여 증감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상대(相大)이며, 여래장을 말한다.

무량한 성품의 공덕을 구족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용대(用大)이니,

일체의 세간과 출세간의 착한 인연을 잘 내기 때문이다.
일체의 모든 부처가 본래 의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일체의 모든 보살이 모두 이 법에 의거하여 여래의 경지에 이르기 때문이다."

<대승기신론>에서 원효의 가장 주목한 용어는 "중생심"입니다.


원효 대사는 불심, 여래장심, 청정심 등과 같은 용어가

<대승기신론> 처음에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중생심은 중생이 갖고 있는 마음이지 부처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중생의 마음은 세속에 물들어 있고 번뇌로 더럽혀져 있습니다.


그런데, <대승기신론>은 이 중생의 마음이야말로

대승 그 자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원효 대사는 여기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고,

여기서 깊은 영감을 얻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대승기신론>에서 원효 대사가 문제삼은 것은 고뇌하는 중생이었으며,
그 중생을 어리석음에서 눈뜨게해 깨달음으로 향하는 것에 비상한 정열을 쏟았습니다.


원효 대사는 우리들 중생의 마음이야말로

대승의 가르침을 만들어내는 에너지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신라의 미소>

 

3. 중생심

 

<대승기신론>은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세(世)"란 시간이고, "간(間)"은 공간이므로
세간법이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현상계(생멸의 세계)를 말하고,
출세간법이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불멸의 세계(진여의 세계)를 말한다.
이 중생심 안에는 세간법(생멸의 세계)과 출세간법(진여의 세계)가 다 들어 있다."

우리의 이 마음(중생심) 속에 우주의 모든 것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세간법을 윤회하는 어리석음의 세계,

출세간법을 깨달음의 각성의 세계라고 한다면
어리석음도 깨달음도, 웃음도 울음도, 일체의 모든 것이

우리의 이 한 마음 안에 다 포섭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생심을 하찮은 것으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삼라만상은 물론 부처님의 정토도,

중생들의 고통 윤회하는 세계도,
모두 우리 마음의 현상이고 마음의 투영이므로 

우리 마음을 떠나서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대승기신론>은 더 나아가 중생심에는

진여의 본체(體)생멸의 작용(相用)이 함께 있다고 합니다.


진여의 본체란 마치 바다가 고요함으로 차 있는 것을 말하고,
생멸의 작용은 마치 바다가 심한 파도로 요동치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중생의 한 마음이 두 개로 나뉘어지는데

곧 진여문과 생멸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중생의 마음에는 순수한 각성의 마음의 본체와 함께

움직이는 생멸의  마음작용의 양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의 마음은 훌륭하고 큰 지혜와 광명(진여)이 빛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생심이야말로 참으로 위대한 것입니다.


중생심이 더럽고 사악한 것이라면

결코 대승의 법체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대승기신론>에서는 중생심이 얼마나 훌륭한 것인가를 밝혔는데,

그것을 의(義)라고 했습니다.
 
체대(體大)는 본체가 크고 넓음을 나타내는 것, 

상대(相大)는 내용이 풍부한 것,

용대(用大)는 그 작용이 뛰어난 것을 말합니다.


이 세가지 측면에서 중생심은 너무나 훌륭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이처럼 휼륭한 본체와 내용과 작용이 있으므로
대승의 가르침을 설하려면 중생심의 비밀을 밝히면 되는 것입니다.


이 중생심이야말로 미혹의 세계도 되고 부처의 세계도 됩니다.


부처도 보살도 이 중생심을 응시하고

그 마음을 정화시켜 깨달음을 얻었던 것입니다.


이 중생심을 버리고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없다는 것입니다.
 
<대승기신론>은 "중생심"이라는 한 마디로 모든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음 그 자체가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나쁜 마음, 몰인정한 마음, 도무지 어찌 할 수 없는 마음이라고 좌절하지 말고
중생이 가지고 있는 그 마음에 무한한 공덕이 있슴을 알고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이차돈의 순교>

 

4. 일심으로 돌아가라


해골물의 깨달음과 <대승기신론>의 중생심의 가르침이
원효의 "일심(一心)"이라는 새로운 사상을 낳는 근원이 되었던 것입니다.


중생들의 마음 속에 큰 좋은 바탕(진여)이 있고,

이를 통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것.


그 마음을 원효는 "일심"으로 표현했고,

'일심'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원효는 "일심"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습니다.


"이같은 하나인 마음의 도리는

말을 여의고 생각을 초월했기 때문에
무엇을 지목할지 몰라서 억지로 이름하여

하나의 마음(一心)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원효의 또 다른 유명한 논서인

<금강삼매경론>의 첫 페이지는 다음과 같이 "일심"을 말합니다.


"무릇 한 마음(一心)의 근원은
있음(有)과 없음(無)을 떠나서 홀로 조촐하고,
삼공(三空)의 바다는 참(眞)과 속(俗)을 아우르면서 맑으니,
맑아서 둘을 아울러도 하나가 아니며,
홀로 조촐하여 모퉁이(邊)를 떠났으나 가운데(中)가 아니다.
가운데(中)가 아니면서 모퉁이(邊)를 떠나기 때문에
법을 지나지 않으나 곧 없음(無)에 머무르지 않으며,
상(相)이 없지 않으나 곧 있음(有)에 머무르지도 않는다.
하나가 아니면서 둘을 아우르기 때문에
참이 아닌 일[事]도 비로소 속되지 않고,
속되지 않은 이(理)도 비로소 참(眞)이 되지 않는다."

원효 대사는 우리의 마음에 이러한 공덕이 있슴을 알게 되면,
우리의 눈,귀,코,혀,몸,뜻의 6가지 감각기관이 일심(一心)을 버리고
밖으로 치닫으며 욕망과 갈애로 집착하는 미망의 삶에서 벗어나 
불법승 삼보에 대해 귀의하고 참된 신앙심이 나타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목숨을 들어 부산한 먼지를 피우는

번뇌의 마음을 한 곳으로 집중시켜
본래의 원천, 즉 하나의 마음(일심)으로 

되돌아가는 까닭에 귀명(歸命)이라고 한다.
돌아가는 바 그 하나의 마음이 바로 불법승 삼보인 것이다."

이렇게 원효 대사는 하나의 마음인 일심이

곧 불법승 삼보이기 때문에 목숨걸고 일심으로 돌아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심으로 돌아가 귀의가 이루어지면
<대승기신론>에 나오는 5가지 바라밀행인 

보시,지계,인욕,정진,지관을 수행하며
이 수행은 불도를 완성하고 중생을 요익하게 하는

방편이 되므로 원효는 여기에 입각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원효가 중생들의 곁으로 나아간 바탕에는
중생의 마음 바탕에는 일심(진여)이라는 무한한 공덕이 있다는 믿음과 함께
그 중생들에게 일심의 무한한 공덕을 꽃피우고 살라는 가르침을 펴기 위해서였습니다.

원효 대사 자신이 그 사명이 불타 올랐기 때문에 기꺼이 중생들 곁으로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