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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인물사

불교 인물사(11) - 신라 불교의 새벽별, 원효 대사(11) - 화쟁

by 아미타온 2024. 3. 26.

<불교 인물사(11) - 신라 불교의 새벽별, 원효 대사(11) - 화쟁>

 

<경주 사천왕사지>

1. 원효를 이해하는 3가지 키워드

 

원효 사상의 키워드를 말하라면

흔히 화쟁(和諍), 일심(一心), 무애(無碍) 의 3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원효 대사의 사상을 아우르는 이 3대 키워드를 중심으로

원효 대사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시간에는 먼저 "화쟁"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원효 대사의 삶과 사상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2.  왜 화쟁이 필요한가? 

 

고려 시대 때 숙종이 원효 대사에게

내린 존칭이 "화쟁 국사"였다고 합니다.

 

대각국사 의천도 원효 대사를 기념하여

"화쟁 국사비"를 세워 다양한 쟁론을 화합하며

원융한 사상 체계를 이룩한 원효의 화쟁적 측면을 칭송했습니다.

 

후대 사람들이 원효 대사에게

유독 "화쟁"이라는 키워드를 찾는 이면에는

원효가 살았던 시절에는 그만큼 화쟁이 필요했다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신라 사회에서 불교의 수용은

기본적으로 외래 사상의 수용이라는 형태를 띠었습니다.

 

원효 대사는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후

약 100여년의 시간이 지난 후에 출현했습니다.

 

당시 신라인의 입장에서는

다양한 불교 경전의 의미와

새로운 불교 사상의 수입을 둘러싸고

학파간의 대립과 갈등이 매우 컸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다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교에 속하면서도

현상적으로는 서로 다르게 주장하고 있는 차이점,

다시 말해 인도와 중국의 다양한 경전과 학파간의 차이를 넘어서

어떻게 불교의 근본 뜻으로 나아가 통일적으로 이해하는지가 당시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두번째로, 원효 대사 자신이 발 딛고 서 있는 신라 사회가 가진 제 문제를

불교를 통해서 어떻게 해결해갈 것인가 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였을 것입니다.

 

당시 불교는 오늘날처럼 다양한 종교 중의 하나라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인간과 사회를 전체적으로 아우르는 ‘사회 철학’이자 국가 지배 이데올로기였습니다.

  

원효 대사는 617년(진평왕 39)년에 태어나

686년(신문왕 6년)에 70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진평왕, 선덕여왕, 진덕여왕, 무열왕, 문무왕, 신문왕에 이르는

여섯 왕들의 시대를 살았던 셈입니다.

 

이 시기는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이 끊

임없이 각축하고 항쟁하는 대립과 갈등의 시대였고

백제 멸망(660년), 고구려 멸망(668년), 당나라 군대 축출(676년)로 요약되는

통일 전쟁의 시대였습니다.

 

이 시대에는 전쟁으로 인한 민중들의 아픔과 고통이 존재했고 

삼국 통일과 함께 분열된 민족을 하나의 동포로서 어울러야 하는 시대였습니다.

 

따라서, 불교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안을 제시해 주고

사회 통합을 위한 사회 철학이자 실천 철학으로 자리매김는지가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불교 사상을 회통하여 통일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해내는 과제와

삼국 통일이라는 사회적 제문제를 불교적으로 해결하고 실천해내려는 과제의

두가지 시대적 과제에 대해 원효 대사의 '화쟁 사상'이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불교하는 어려움도 당시 시대 상황과 비슷합니다.

우리도 다양한 불교 경전과 논서와 사상을 접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많은 구슬들을 하나의 실로 꿰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불교인 것 같기도 하고, 저것이 불교인 것 같은 혼란 속에 살아갑니다.

자신의 확립된 선명한 자신의 불교 철학이라는 실로 이것을 꿰지 못합니다.

 

'화쟁'이 필요한 것은 다양성 속에서 통일된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의 불교 철학을 중심으로 다양한 구슬을 꿸 수 있는 능력.

 

이것이 화쟁의 능력이며,

화쟁할 수 있어야 눈이 밝아지고 지혜의 눈이 트인다고 생각합니다.

 

원효 대사의 화쟁도 이러한 고민 의식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고민은 당시 불교인들의 고민이면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고민이기도 합니다.

 

원효 대사는 수많은 불교 경전을 공부하고 저작을 남긴 지성인이었습니다.

그는 탁월한 지성으로 불교의 다양한 사상을 회통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3. 어떻게 화쟁할 것인가?

 

"화쟁"은 말 그대로 쟁론을 화합시킨다는 말입니다.

 

원효의 화쟁 사상은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십문화쟁론'은 "열개의 문으로 상징되는

다양한 불법의 문을 화쟁시킨다"는 뜻의 논서입니다.

 

10개의 각기 다른 문은 무엇일까요?

 

①삼승일승화쟁문(三乘一乘和諍門),

②공유이집화쟁문(空有異執和諍門)

③불성유무화쟁문(佛性有無和諍門),

④인법이집화쟁문(人法異執和諍門),

⑤삼성이의화쟁문(三性異義和諍門),

⑥오성성불화쟁문(五性成佛義和諍門),

⑦이장이의화쟁문(二障異義和諍門),

⑧열반이의화쟁문(涅槃異義和諍門),

⑨불신이의화쟁문(佛身異義和諍門),

⑩불성이의화쟁문(佛性異義和諍門)이 10문입니다.

 

여래장 계열에서 주장하는 불성의 유무에 대한 논란,

중관에서 주장하는 공(空)과 유식에서 주장하는 있음(有)의 철학,

법화경에 나오는 성문-연각-보살승의 삼승을 어우르는 일불승의 길,

번뇌장과 소지장이라는 2장의 번뇌의 특성과 작용을 둘러싼 논쟁 등

서로 상반되고 다양한 주장을 통일적으로 해석하고자 했던 원효의 저작입니다.

 

경주 고선사 터에 남아 있는 <서당화상비>에는 

<십문화쟁론>의 줄거리와 대요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여래가 세상에 계실 때에는 원음(圓音)에 의지하였으나,

중생들은 비처럼 흩뿌리고,

부질없는 공론(空論)이 구름처럼 분분하였다.

 

혹자는 나는 옳은데, 다른 사람은 그르다고 하였으며,

어떤 사람은 자신의 설은 그럴 듯하나 타인의 설은 그렇지 못하다고 하면서

마침내 큰 강물과도 흐름들을 이루었다.

 

산을 버리고 골짜기로 돌아간 것과 같고,

유(有)를 싫어하고 공(空)을 좋아하는 것은,

마치 나무를 버리고 큰 숲으로 달려가는 것과 같다.

 

비유하자면, 청색과 쪽풀은 본체가 같고 얼음과 물은 근원이 같아서,

거울은 모든 형상을 받아들이고 물이 나누어 지는 것과 같다.

그래서 원효는 이를 융통하여 서술하고

그 이름을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이라고 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이를 칭찬해마지 않았으며

모두 좋다고 하였다.” 

 

위 비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화쟁은 "소통과 이해"입니다.

 

‘쟁’(諍)'은 서로 간의 소통이 단절된 채

자기 입장만을 고수하고 있는 주장입니다.

'화(和)'는 그에 대한 ‘소통’과 '이해'의 의미를 갖습니다.

즉, 화쟁은 서로 다른 주장들을 모아서 서로 소통시키고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공(空)과 유(有), 불성의 존재 유무 등에 대해

서로의 입장을 소통시키고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수많은 종파(학파)의 서로 다른 주장들과

그 다툼에 대해서 어떻게 화쟁할 것인가가 남습니다.

 

위의 비문에 화쟁은 ‘얼음과 물’, ‘청색과 쪽풀’처럼 서로 다른 양상의

본래 같은 ‘본체’와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경전에 적용시킨다면,

차이를 넘어서 여래의 원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화쟁이 가능한 것은 그 본체와 근원이 같기 때문입니다.

 

원효 대사의 화쟁이 의미가 있는 것은

 그의 화쟁이 단순한 소통에 머물지 않고

이와 같이 궁극적인 목적지에 이르고자 하는

적극적인 의지가 작동하고 있다는 측면입니다.

 

원효 대사는 수많은 종파의 서로 다른 주장들과

그들 사이의 다툼이 있다 할지라도,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같은 근원,

다시 말해 ‘여래의 원음’ 혹은 ‘부처의 뜻’(佛意)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공통 분모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즉, 원효 대사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근간으로 하면서,

많은 경전들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극단적인 견해를 피하고,

많은 경전들 사이의 부정과 긍정을 통한 검토를 통해서,

근원과 본체에 해당하는 부처의 원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추구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원효 대사의 저술에 ‘종요’(宗要)와 ‘요간’(料簡)이란
단어가 붙어 있는 저작이 많은 것 역시 이와 상관있습니다.

 

원효 대사는 <열반경 종요(宗要)>에서 화쟁의 방법과 논리를

다음과 같이 압축적이고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뭇 경전의 부분적인 면을 통합하여

온갖 물줄기를 한 맛의 진리의 바다로 돌아가게 하고,

불교의 지극히 공변한 뜻을 열어

모든 학파들의 서로 다른 쟁론을 화쟁시킨다.”

 

 

4. 원효의 해골물 깨달음과 일심

 

그러면 원효의 화쟁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

다시 말해 ‘목적’으로 삼았던 것은 무엇일까요?

 

원효는 일찌기 그는 무덤에서의 해골물의 깨달음을 통해

마음이 갖는 위상을 깨닫고 "모든 법은 마음에 있다.

달리 어디서 구할 것인가(心外無法, 胡用別求)"라고 갈파했습니다.

 

이것은 마음이 모든 것의 출발점이라는

"일체유심조"의 도리를 깨친 것이며,

다르게 표현하면 "번뇌즉보리"라는

대승의 공사상을 체험한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원효는 이러한 각성된 마음의 작용을

'일심(一心)'이란 단어로 주로 표현했습니다.

 

<무량수경 종요>에서 원효는

'일심'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습니다.

 

“모든 경계가 무한하지만 다 일심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부처의 지혜는 모양을 떠나 마음의 원천으로 돌아가서,

지혜와 일심은 완전히 같아서 둘이 없는 것이다.” 

 

현실에서 사람들의 ‘마음’은 제각각으로 나타납니다. 

각자 생각하는 것이 다른 것입니다.

 

수많은 학파(종파)의 서로 다른 주장들의 밑바닥에는

그처럼 서로 다른 마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제각각의 마음이 마침내 하나로 통일되는 것.

 

그것이 바로 ‘일심’(一心)의 세계입니다.

 

여기서의 일(一)은 ‘전체성’과 더불어

‘완전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서로 ‘마음이 하나가 되어’라든가

‘한 마음, 한 뜻으로’라는 식의 표현을 즐겨 씁니다.

 

화쟁을 거쳐 도달하고자 한 일심의 세계,

그것은 곧 부처의 올바른 ‘진리’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심'은 모든 중생들이 도달해야 할

궁극적인 목적지라고 원효 대사는 보았습니다.

 

화쟁의 목적 역시 거기에 이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원효 대사의 "일심"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보다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원효는 대승기신론의 '일심'의 가르침으로

모든 불교의 가르침을 회통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