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인물사(13) - 신라 불교의 새벽별, 원효 대사(13) - 무애>
1. 원효의 무애한 행적과 모습
<송고승전>에서는 원효의 행적과 모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 발언은 미친 듯 사나웠고
예의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드러난 행동은 상식의 선에서 벗어났다.
거사와 함께 주막이나 기생집에도 들어가고
저 양나라 지공처럼 금빛 칼 달린 석장을 갖고 다녔다.
혹은 주석을 지어 화엄경을 강의하는가 하면
혹은 사당에서 거문고를 타면서 즐기거나,
여염집에서 유숙하기도 하고,
혹은 명산대천에서 좌선을 하기도 하였다.
계기를 따라 마음 가는대로 하는데
도무지 정해진 틀이 없었다."
<송고승전>에 실린 이러한 원효 대사의 삶을
표현하는 단어가 바로 '무애'입니다.
'무애'는 어떤 고정 관념 또는
일정한 규범적 행동양식에서 벗어나서
즉, 특정한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사고하고
행동하는 이미지를 일컫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송고승전>에 보면 원효는 출가 승려나 재가자라고 하는
고정화된 삶의 틀을 벗어 던진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원효 대사의 삶의 모습과 실천을
나타내는 말이 바로 '무애'입니다.
원효 대사는 깨달음을 얻은 다음
왜 이와 같은 무애행을 하게 된 것일까요?
그것은 그의 깨달음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무덤에서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은
첫 번째 전환점에서 원효가 인식한 것은
"마음이 사라지면 해골물과 감로수가 둘이 아니다"라는
마음에 대한 자각이었습니다.
이 깨달음을 얻고 원효는 중국으로 가기를 그만두고
발길을 다시 고국 신라로 되돌립니다.
두 번씩이나 시도했던 유학의 뜻을 버릴만큼
강렬하고 확연한 그의 깨달음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일심(一心)'이었습니다.
'해골물'과 '감로수'라는
서로 다른 인식으로 인해
일어나는 현상들을 절실하게 체험하면서
그는 하나인 마음의 본질과 그 작용을 새삼 통찰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을 통해 원효 대사는
중국 유학을 포기하고 다시 신라로 돌아와
자신의 각성을 더욱 풍부하고 깊게 하기 위한 교학 연구에 매달립니다.
원효 대사가 맞은 두번째 마음의 전환점은
그의 광범위한 교학연구가 다시 한 단계를 넘어서고 있을 때였습니다.
분황사에서 <화엄경소>를 찬술하던 중
'제 4권 10회향품에 이르러 절필했다'고 한 것입니다.
이는 그 동안 오직 교학연구와 저술로
독자적인 길을 개척해온 원효가
대중 교화라는 새로운 실천 과제를 깊게 인식하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이제 원효 대사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사상이나 이론이 아니었습니다.
대중과 함께 하는 진리의 현재화와
입명의 삶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로 떠오른 된 것입니다.
원효 대사의 마음에 충격으로 와 닿았을
이 새로운 전환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화엄경소>를 찬술하던 그가 10회향품에 이르러 절필해 버렸다면,
그 해답 또한 '10회향'에 있을 것입니다.
<화엄경>은 사사무애(事事無碍)의 법계연기설에 입각한
보살행이 중심을 이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화엄경의 주석서를 찬술하던 원효 대사가
붓을 던져 버릴만큼 절실하게 느낀 바가 있었다면
곧 대중을 향한 보살행 바로 그것이었을 것입니다.
보살에게 반드시 있어야할 방향 전환으로서의 회향,
그것이 바로 원효 대사가 가고자 하는 길이었습니다.
회향은 자기가 닦은 선근 공덕을 중생에게로 돌림을 말합니다.
중생들이 번뇌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얻도록 구제행이 곧 회향입니다.
그런 뜻에서 화엄경의 10가지 회향은
그 하나 하나가 중생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그렇게 살고 실천해야 할 과제였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 승(僧)과 속(俗)을 아우르는
원효의 무애행이 시작됩니다.
원효는 승의 자리에서 속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는 천촌만락을 누비며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고
민중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아픔을 어루만졌습니다.
2. 일체의 걸림 없는 사람
<삼국유사>는 이러한 원효의 삶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습니다.
"…이미 파계하여 설총을 낳은 후로는
속인의 복장으로 바꿔입고
스스로를 소성 거사(小姓居士)라 하였다.
우연히 큰 박을 들고 춤추는 광대를 만났는데
그 형상이 특이하였다.
원효가 그 형상대로 한 도구를 만들어
화엄경의 '일체무애인(一切無碍人)
일도출생사(一道出生死)'에서 유래하여
'무애(無碍)'라고 이름을 붙이고
이 도구와 함께 춤을 추면서 노래를 지어서 세상에 퍼뜨렸다.
이를 가지고 천촌만락을 돌아다니며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고 읊으며 돌아다녔으므로
가난한 거지나 더벅머리 아이들까지도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게 되고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되었으니
원효의 법화(法化)가 참으로 크도다."
'일체의 걸림 없는 사람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난다'는
'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는 화엄경 <보살명난품(菩薩明難品)>의 게송입니다.
속복을 입고 거사임을 자처하며 저자 거리로 시골로 방방곡곡을 누비는
원효의 무애한 행적은 곧 생사(집착)를 뛰어 넘은 보살의 모습입니다.
일체에 걸림이 없어 생사(집착)마저 벗어났기 때문에
그에게는 어떤 사랑과 증오나 귀천과 차별의 경계가 존재할 리 없었습니다.
그는 가는 곳이 어디든,
만나는 사람이 누구든
그 장소와 대상은 원효가 이루어야 할 정토였고
자비로 안아야 할 중생들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원효가 접하는 대상이
위로는 왕실의 인물이나 귀족에서부터
아래로는 가난하고 몽매한 사람들에 이른 것처럼,
그가 돌아다닌 천촌만락 또한 이미 망국이 된
옛 고구려와 백제의 고토였고
또한 통일을 이룩한 새로운 신라의 땅이기도 하였습니다.
일체에 걸림이 없이 승속을 함께 아우렀던
원효 대사의 이 같은 행적이야말로
이 땅의 모든 계층 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게 구제하려는
그의 보살적 염원이었고 실천이었던 것입니다.
3. 원효 대사의 무애행의 배경
그렇다면 원효 대사는 왜 그의 깨달음과 사상을
행동화하고 실천하기 위한 방법
즉, 중생을 위한 회향, 즉 보살의 실천행의 구체화를
'승속에 얽매이지 않는 무애적 모습'으로 실현하려 했을까요?
그것은 당시 신라 불교와 신라 사회의 문제점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원효가 살았던 시대의 승려들과
신라 불교는 큰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진리와 승려의 상에 대한 집착'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승려들은 머리나 옷을 좀 달리하고
"너희들은 중생이고 나는 성직자다."라는 집착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원효가 나중에 <금강삼매경론>을 설하면서
"옛날 백개의 서까래를 찾을 때는 내가 낄 수가 없었는데,
오늘 하나의 대들보를 찾을 때는 나밖에는 없구나."고 일침을 가한 것은
당시의 신라불교와 승려들이 큰 아집과 법집을 갖고 있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왕이나 귀족이 지어준 큰 절에 주석하며
왕이나 귀족들이 하사한 토지와 노비들에 의거하여 편안하게 공부하면서도
자신들이 교화해야할 중생들에 대한 가르침에는 인색하였으며
행위적 계율을 지킨다는 미명하에 중생을 무시하고 성직자의 특권에만 매달렸습니다.
따라서 원효가 파계를 하고 요석궁에서 설총을 낳은 일은
그러한 비좁은 성스러움 속에 안주하는 당시의 성직자들에게
성과 속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직접 몸으로 보여준 것이었으며,
또한 승속에 얽매이지 않는 무애행을 통해
당시 신라 불교의 반성을 촉구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두번째는 당시 신라 사회의 문제와도 깊은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신라 사회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습니다.
흔히 '골품제(骨品制)'라고 하여
성골과 진골, 6두품과 일반인, 천민으로 나뉘어진
엄격한 신분제는 인간에 대한 평가를 출신 성분에 따라 차별을 두는 사회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불가촉천민 등
부처님 당시의 인도 사회의 신분제와도 유사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출신성분과 돈, 명예, 권력 등으로
인간을 평가하고 집착하는 병에 빠져 있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러한 세속적인 권력이나 욕망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깨닫지 못한 중생들이 바른 가르침을 받으면 해탈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원효 대사는 당시의 불평등한 사회 구조 속에서 소외된 사람들에 주목했습니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인 신라의 불교의 귀족 출신의 승려들은
왕과 귀족들을 위해서만 설법했지 가르침이 필요한 민중들에게는 무관심했습니다.
이와 같은 신라 불교의 문제에 눈뜨고
민중들 속에서 호흡하며 살아갔던
대안,혜공과 같은 일부 승려들이 존재했습니다.
원효 대사는 이들의 모습을 보고
자신이 진정으로 나아가야할 곳이 어디인지 판단했습니다.
원효 대사는 신라 통일 전후의 복잡하고 어려운 시대를 살았던 인물입니다.
삼국이 서로 각축을 벌이던 시대에 태어난 그는
백제가 멸망하던 즈음 해골물의 깨달음을 얻었고 (661년),
이후 교학 연구와 저술에 통해 내면의 세계를 확장해 가던 중
고구려의 멸망(668년)을 지켜보기도 하였습니다.
전쟁의 소용돌이,
정복자와 피정복자의 갈등,
망국 유민들의 실의와 좌절 등
여러 고통받는 민중들의 삶의 모습들이
보살 만행에 대한 원효 대사의 마음을 일깨웠을 것입니다.
원효 대사가 승려의 모습이 아닌 거사의 모습으로
전국 방방 곡곡을 누비며 빈부 귀천의 계층에 구분없이
대중과 함께 하며 무애행과 자비행을 펼쳤음은 다른데 뜻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깨달은 일심(一心), 화쟁(和諍) 사상을
현실 속 신라에 실제적으로 구현하며
현실 속에서 고통받는 민중들이
부처님에 대한 믿음과 진리에 대한 가르침의 실현으로 구제하려 했던 것입니다.
원효의 위대함은
그의 '일심'과 '화쟁'의 사상을 추구한 점뿐만 아니라,
화엄적 보살행, 즉 사사무애적 보살 만행을 통한 실천을 통해
신라 사회와 신라 불교가 처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던 보살이었기 때문에 더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4. 무애와 용기
원효는 자신이 지은 <화엄경소> '서문'에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화엄'의 큰 가르침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봉황이 푸른 구름을 타고 올라
자신이 날던 산악의 낮음을 내려다보고,
물의 신인 하백이 큰 바다에 이르러
자신이 놀던 냇물의 좁음을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배우는 사람은 이 경전(화엄경)의 넓은 문(普門)의 경지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종래의 배움이 너무 초라하고 모자랐슴을 알 것이다.
그러나, 날개가 짧은 새는 작은 숲을 떠나지 못하고,
여울의 작은 고기는 좁은 냇가에 안온히 깃들어 있다.
그러므로 얕고 속된 문자의 가르침을 또한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원효는 참으로 봉황처럼
또는 물의 신 하백처럼
작은 산과 냇물에 만족하지 않고
푸른 하늘 위에 오르고, 큰 바다에 이른 분입니다.
해골물의 깨달음을 통한 각성에 만족하지 않고
많은 경전들을 주석하며 향상을 추구한 공부인의 자세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각성과 인식을 대중들에게 회향하고 실천하기 위해
기득권인 승려의 모습을 내던지고 중생들 속으로 들어간 보살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원효 대사가 겪었던 모욕과 고난이 많았을 겁니다.
이런 면에서 원효 대사는 참으로 용기 있는 분이셨습니다.
세상의 편견과 싸우고, 고난과 싸우고,
자신의 이상을 지키려고 했던 용기 있는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원효의 무애행은 용기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무애행은 단순히 걸림없이 산다는 의미가 아니라,
세상의 편견과 고난과 싸우려는 전사의 용기 있는 기백과 함께
자신의 각성의 인식을 세상을 향해 펼치려는 원력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무애는 단순한 파격이나 일탈이 아니라,
자신의 각성과 깨달음을 기반으로 세상의 편견과 고난과 이겨 싸워가며
창조적으로 살기 위한 용기있는 삶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올바를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작은 숲과 작은 냇가에 안주할 때
더 큰 삶, 더 넓은 삶, 더 창조적인 삶을 위해
분투하는 것이 바로 무애의 삶의 본질인 것입니다.
원효 대사가 이와 같은 무애한 삶의 전형을 보여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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