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27) 제9분 일상무상분(一相無相分) 1 - 수다원>
"어떻게 생각하느냐, 수보리야, 수다원(須陀洹)이
'나는 이제 수다원의 경지에 올랐다."라고 생각하느냐?"
수보리는 대답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수다원은
깨달음의 강물 속에 들어가므로 예류과(預流果)라 하지만,
사실 들어간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색, 소리, 냄새, 맛, 촉감, 혹은 법에도 들어가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수다원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수보리야. 사다함(斯多含)이
"나는 이제 사다함의 경지에 올랐다."라고 생각하느냐?"
수보리는 대답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사다함은 열반에 이르기 위하여
한번 더 가고 오기 때문에 일래과(一來果)라 하지만,
사실은 되돌아오는 것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는 것도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이름하여 사다함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수보리야. 아나함(阿那含)이
'나는 이제 아나함의 경지에 올랐다.'라고 생각하느냐"
수보리는 대답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아나함은
이 세상에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불환과(不還果)라 하지만,
사실은 돌아오지 않는 것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이름하여 아나함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수보리야, 아라한(阿羅漢)이
'나는 이제 아라한의 경지에 올랐다.'라고 생각하느냐?"
수보리는 대답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아라한이라고 부를 수 있는 독립된 실체는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라한이 스스로 아라한의 경지에 올랐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여전히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제가 다툼이 없는 무쟁삼매(無爭三昧)를 얻었으며,
사람들 가운데 욕심을 버린 최고의 아라한이라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제가 아라한의 경지에 올랐다고 생각했다면,
세존께서는 분명 제가 아란나행(阿蘭那行)을
즐겨한다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1. '일상무상' 의 의미
제 9분은 "일상무상(一相無相)"분입니다.
하나의 상(相)이라도 상이 없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제 9분은 4개의 수행 경지에 대한 비판으로 출발합니다.
바로 "사향사과(四向四果)"라는 수행의 경지입니다.
"향(向)"은 "수행의 목표를 설정하고 발심하여 노력하는 것"을 말하며
"과(果)"는 "그 수행을 통해 도달한 경지"를 말합니다.
따라서 4향4과는 4개의 향과 4개의 과인 총 8위(8位, 8개의 지위)가 됩니다.
< 향(向) > < 과(果) >
수다원향 (예류향,預流向) -----> 수다원과 (예류과,預流果)
사다함향 (일래향,一來向) -----> 사다함과 (일래과,一來果)
아나함향 (불환향,不還向) -----> 사다함과 (불환과,不還果)
아라한향 (응공향,應供向) -----> 아라한과 (응공과,應供果)
예를 들어, 수다원의 경지를 목표로 발심하여 노력하는 수행자를 수다원향이라고 합니다.
그 노력을 통해 수다원의 경지를 획득했을 때 수다원과를 얻었다고 합니다.
제 7분에서 부처님께서는
"부처님께서 깨달음의 경지를 얻은 것도 없고
부처님께서 설한 법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길수 있습니다.
"많은 수행자들이 오랜 수행 끝에 수행의 4가지 경지를 얻은 것은
수행의 경지를 획득함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제9장은 수행자들이 자신이 성취한 수행의 경지에 대해
어떠한 상을 가지는 것에 대해 부처님께서 경계하신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소명 태자는 제9분을 "일상무상"이라 이름했습니다.
수행자가 자신이 어떤 수행의 경지에 얻었다고 하는
'아상' 또는 '공명심'이라는 일상(一相)을 버리라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생각합니다.
2. '아란야 행' 의 의미
제9장에는 "아란나행"이라는 용어가 나옵니다.
아란나행이란 고요한 곳에서 다툼이 없는 상태에 머무는 수행입니다.
수보리 존자는 분노나 증오의 마음을 버려 참다운 마음의 평화를 얻어
온갖 모욕과 비난과 더불어 싸우지 않은 수행자로 부처님의 칭찬을 받으셨습니다.
수행자가 자신이 어떤 경지를 얻었다는
아상이나 공명심에서 벗어나 오롯이 수행에 집중하는 상태가
참다운 아란나행이라고 하는 것을 또한 이 장을 통해 나타내고 있습니다.
3. 수다원
"어떻게 생각하느냐, 수보리야,
수다원(須陀洹)이 '나는 이제 수다원의 경지에 올랐다."라고 생각하느냐?"
수보리는 대답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수다원은 깨달음의 강물 속에 들어가므로 예류과(預流果)라 하지만,
사실 들어간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색, 소리, 냄새, 맛, 촉감, 혹은 법에도 들어가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수다원이라고 합니다.
부파 불교는 인간의 미혹한 근본 번뇌를
열 가지로 나누어 "십혹번뇌(十惑煩惱)"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10가지 번뇌를
각각 5가지씩 크게 2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첫번째가 미사혹(迷事惑)입니다.
존재의 실상에 대한 미혹 번뇌로
선천적인 다섯 가지를 말합니다.
그것은 탐욕(탐,貪), 성냄(진,瞋), 어리석음(치,痴),
아만(만,慢), 의심(의,疑)의 5가지 입니다.
두번째가 미리혹(迷理惑)입니다.
바른 견해의 미혹에서 오는 번뇌입니다.
1) 자기 몸에 불변의 실체가 있다는 견해(유신견,有身見),
2) 사후 세계에 대한 그릇된 견해(변견, 邊見),
3) 인과법에 대한 그릇된 견해(사견, 邪見),
4) 그릇된 소견을 옳다고 고집하는 견해(견취견, 見取見),
5) 금하고 있는 계율에 대한 그릇된 견해(계금취견, 戒禁取見) 의
후천적인 잘못된 견해에서 발생하는 5가지 번뇌와 미혹을 말합니다.
이 10가지 근본 번뇌 중 후천적인 다섯 가지의 사견(미리혹)은
연기법의 진리와 사성제 등을 잘 관찰하면 쉽게 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탐진치만의'라는 선천적인 미사혹의 다섯 가지 번뇌는
끊기 어려운 것으로 지적인 이해로 쉽게 끊을 수 없고,
수행을 통한 자각이 이루어짐으로 끊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수다원은 후천적인 5가지의 그릇된 견해인
미리혹을 끊어 버리고 진리에 대한 바른 견해를 얻게 된 수행자입니다.
'중생계의 미혹함을 끊고 드디어 성인(聖人)의
평안함의 흐름(流)에 막 들어간(入) 자'라는 의미입니다.
수행 계위의 제1위로서, '성인의 예비단계'라는 뜻을 살려
보통 "예류(豫流)"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5가지의 잘못된 견해를 끊고
성인의 흐름에 들어와서 이제 더 이상은 중생으로 떨어지지 않는 단계입니다.
수다원만 하더라도 참으로 대단한 경지가 아닐 수 없고
중생으로서는 존중히 모셔야 하는 경지입니다.
4. '수다원'을 얻었다는 상(相)
부처님은 수다원 경지를 얻은 사람이
자신이 이제 수다원과를 얻었다고 하여
자의식과 공명심을 가지고 있다면
이러한 사람이 진정한 수다원일 수 있겠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수보리 존자는 부처님의 의도를 알아채고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수다원을 수다원일 수 있는 것은
평화로운 수도 생활에 들어가 있는 겉모습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다원을 "성인의 흐름에 들어간 자"라고 말하는 것은
형체에도, 소리에도, 냄새에도, 맛에도, 만져지는 것에도, 마음의 대상에도
그 어느 곳에도 들어감이 없기 때문에 수다원이라고 이름할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그것은 수행자도 수행의 모든 단계에서 일어나는
자의식을 모두 깨어버려야 한다는 말씀인 동시에
수행자를 바라보는 사람들도 겉모습이나 상에 팔려
수행자를 잘못 보는 잘못을 범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즉, 수다원의 경지에 올랐다는 성인이
내가 이미 수다원의 경지에 올랐다는 티가 남아 있다면
이것은 색성향미촉법의 여섯가지 경계와 상에 걸려 버린 것이니
그렇다면 이미 성인이 아닌 것이라는 겁니다.
성인의 흐름에 들었다고 알랑대는
자의식과 공명심이 사라진 수행자라야
진정한 수다원이라고 불러 줄 수 있다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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