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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금강경(29) 제9분 일상무상분(一相無相分) 3 - 수행상

by 아미타온 2024. 4. 2.

<금강경(29) 제9분 일상무상분(一相無相分) 3 - 수행상>

 

<문경 대승사 대웅전 목각탱 설법상>

 

"어떻게 생각하느냐, 수보리야.

아나함(阿那含)이 '나는 이제 아나함의 경지에 올랐다.'라고 생각하느냐"

수보리는 대답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아나함은 이 세상에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불환과(不還果)라 하지만,

사실은 돌아오지 않는 것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이름하여 아나함이라고 합니다."

 

1. 아나함

 

아나함은 범어로는 "아나가민(anagamin)"이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결코 돌아오지 않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한문으로는 '불환(不還)과'라고 부르며,

아라한 과에 오르기 바로 전 단계인 제 3위로서 매우 높은 경지입니다.

 

욕계(慾界)의 번뇌를 완전히 절단시킨 사람으로서,

사후에 색계, 무색계에 태어날지언정,

절대 두번 다시는 욕계에는 태어나지 않는 존재를 말합니다.

 

우리가 예불문을 독송할 때 "삼계도사"라는 말을 합니다.

부처님은 삼계의 중생들을 바른길로 이끄시는 스승이시라는 의미입니다.

 

이 때 삼계(三界)라고 하는 것은

중생의 세계를 3갈레로 나눈 것으로

욕계(慾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말합니다.

 

욕계(慾界)는 욕망을 삶의 동인으로 삼아 살아가는 중생들의 세계로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 천상(욕계6천)이 해당됩니다.

 

색계(色界)는 감각적 욕망은 이미 떠났지만,

아직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거부감을 일으키는 진심(분노심)은

남아있는 존재들이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이 색계에서는 선정(禪定)이 차차 깊어진다고 하며   

초선천(初禪天)·이선천(二禪天)·삼선천(三禪天)·

사선천(四禪天)·정범천(淨梵天)의 다섯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무색계(無色界)는 욕심과 진심이 모두 사라져

물질의 영향을 받지 않는 형태는 없고

정신적 작용만이 있는 존재들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아직 '나'라고 하는 자아의식이 남아 있어

미세한 어리석음만 남아 있는 중생계 중에

가장 깨끗한 세계를 말합니다.

 

무색계에는 공무변처(空無邊處)·식무변처(識無邊處)·

무소유처(無所有處)·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사공천(四空天)이 있습니다.

 

아나함은 이러한 중생계에서

색계에서는 이미 성자의 위치에 간 사람으로,

욕망을 완전히 버렸기에 욕계에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니 참으로 높은 경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거룩한 과위를 얻었지만 그들은

"나는 아나함의 과위를 얻었노라."하는 생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앞의 수다원이나 사다함의 예에서와 같이,

다시는 욕계의 세상에 다시 오지 않게 된 이는

자신이 다시 오지 않는 이라는 수행의 과위에 대한

자만심이나 알랑댐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들이 이러한 자만심이나 알랑댐이 있다고 한다면

이들을 어떻게 참된 아나함이라고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즉, 참다운 아나함은 자신이 아나함이라는 상이 없기 때문에

아나함이라고 불릴 수 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수보리야,

아라한(阿羅漢)이 '나는 이제 아라한의 경지에 올랐다.'라고 생각하느냐?"

수보리는 대답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아라한이라고 부를 수 있는 독립된 실체는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라한이 스스로 아라한의 경지에 올랐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여전히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2. 아라한

 

아라한(arahan)은 인간이 수행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를 말합니다.

 

아라한은 수행이 완성되어 더 이상 배

움이 필요없기 때문에 "무학(無學)"이라고도 합니다.

 

조선 시대 이성계와의 일화로 유명한

무학 대사의 이름도 이러한 의미가 있습니다.

 

열반에 들었기 때문에 중생계인 삼계에는

더 이상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불생(不生)"

번뇌의 도적들을 모두 물리치고

드디어 해탈의 경지에 오른 성인이므로 "살적(殺敵)"

존경받아 마땅하고 따라서 응당 공양을

받아야 할 성인이라서 "응공(應供)"이라고도 불립니다.

 

이렇게 멀고도 어려운 수행과정을 거쳐

드디어 아라한의 경지에 올랐으니만큼

"나는 아라한의 경지에 올랐다."라고 뻣대어도

무방할 것 같은데, 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이 나는 존경을

받을만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이미 존경스러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그는 이미 아상의 노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수행을 통해 아라한의 경지에 오른 분이

자신이 아라한의 상태에 올랐음을 당연히 알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마음에 탐진치가 소멸된 마음의 상태를

자각하였기에 당연히 공부를 마쳤슴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아라한조차도 자신의 명예를 남에게 자랑하거나

존경을 받기 위한 의도를 가지고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성인의 경지에 오르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가 명확해집니다.

 

우리들은 "겸손"을 이야기합니다.

흔히 겸손의 의미를 자신을 낮추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도덕율이기 때문에 무조건

자신을 낮추는 것만을 겸손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겸손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의

칭찬을 듣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 있을수도 있고,

실제 자기 마음 속에서는 자신이 잘 나고 잘 했다는 상이 있는데

겉으로만 겸손한 것 일수도 있습니다.

 

금강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참다운 겸손이란 자신의 상태를 바로 자각하되,

자신의 마음에 자신의 상태를 과대평가하는

이러한 상을 버린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참다운 겸손을 행할 수 있을 때

그 사람에게서 인격의 향기가 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