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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구경

법구경(42) 인색한 부자 꼬시야 이야기

by 아미타온 2024. 4. 6.

<법구경(42) 인색한 부자 꼬시야 이야기>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시던 어느 때,

마하 목갈라나 존자 및 인색한 부자 꼬시야와 관련하여 게송 49번을 설법하셨다.

 

< 차빠티(요리사 앞의 하얗고 둥근 밀떡)와 인도 요리사&nbsp;>

 


 
라자가하에서 멀지 않은 "작게리"라는 도시에

"꼬시야"라는 인색한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기름 한 방울이라도 남에게 주지 않았고,

자기가 기름을 쓸 일이 있을 때에는 풀잎 끝에  

조금 적셔서 쓸 정도의 지독한 구두쇠였다.

 

그는 그렇게 재산을 아끼고 아낀 끝에 제법 큰 재산을 모으긴 했으나,

그 재산이 자기에게나 자녀들에게나 아무런 이익과 행복을 준 것이 없었다.

 

그런 꼬시야였기 때문에 그가 수행자들에게

 무엇을 공양하여 복을 짓는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부처님께서는

자비 광명을 놓으시어 세계를 관찰해 보시고

45요자나* 거리에 있는 "작게리"라는 도시에 사는

인색한 부자와  아내에게 법의 인연이 있음을 아시었다.

  

< * 요자나 : 부처님 당시 인도에서 쓰이던 거리 측정 단위.

                  유순(由旬)으로 불리며, 1요자나는 약 19~20km>

      

그날 꼬시야는 왕의 부름을 받아 왕궁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는데 시장기가 느껴졌다.

 

이때 길가에서 어떤 사람이 "차빠띠(둥굴게 구운 얇은 떡)"에 

카레를 얹어서 맛있게 먹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꼬시야는 그것을 보자 자기도 얼른 가서 차빠띠를 만들어 

저 사람처럼 맛있게 먹고 싶은 생각이 매우 강렬했다.

 

그러나 이내 그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마음을 정했다.

 

‘집에 가서 식구들이 보는 데서 차빠띠를 만들어 먹겠다고 하면 

온 집안 식구들이 다 먹고 싶어 야단일 것이다.

그러다 보면 많은 쌀과 다른 재료들이 들 게 아닌가.

그러니 나 혼자서만 만들어 먹는 것이 좋으리라.’ 

 

그렇게 마음먹은 다음 그는 배고품을 참고 계속 걸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시장기는 더욱 심해져서 얼굴색까지 노랗게 변했고,

몸에서는 점점 기운이 빠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는 억지로 고통을 참으며 간신히 집에 도착했다.

그렇지만 이미 몸이 너무 지쳐서 그대로 침실에 들어가 누워야만 했다.

그는 너무나 배가 고팠지만 그런 내색을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다.

 

<영주 부석사 입구>

 

그가 침상에 누워 있는데 그의 아내가 들어와서 몸을 주물러 주면서 물었다.

 

“여보, 어찌된 일이에요?”

 

“아무 일도 아니오.”

 

“그러면 혹시 아들이나 딸이 속을 썩힙디까?

 

그도 아니라면 부리는 종들이 말을 안 듣는가요?”

 

“그런 것도 아니오.”

 

“여보,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러고 누워 있단 말예요?”

 

아내가 이렇게 채근을 하는데도

그는 집안의 물자가 소비되는 것이 아까워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아내는 속이 타서 애원했다

 

“여보, 무슨 일이에요?

무엇을 원하는지 말씀 해보세요.”

 

그때에 이르러서 이 인색한 부자는 겨우 대답했다.

 

“여보, 나는 차빠띠를 먹고 싶다오.”

 

“참 당신도! 그러시다면 왜 진작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우리가 뭐 가난한 사람도 아닌데 말예요.

기다리세요.

제가 바로 차빠띠를 만들어 드릴게요.

작게리의 온 시내 사람들이 다 와서 먹고도 남을 만큼 충분히 만들게요.”

 

아내의 말에 그는 깜짝 놀라서 말했다.

 

“여보, 당신은 왜 남까지 걱정하는 거요?

작게리 사람들은 자기가 제 음식을 사 먹을 수 있을 정도로 각기 돈을 벌잖소?”

 

“좋아요.

그렇다면 작게리 시민들 모두는 그만두고 이 거리 사람이 다 먹을 만큼만 만들게요.”

 

“이 마누라는 손이 너무 커서 탈이라니까!”

 

“좋아요.

정 그러시다면 우리 가족들이 다 먹을 만큼 만드는 거야 괜찮겠지요.”

 

“당신은 왜 식구들 걱정까지 하는 거요.

도대체?”

 

“그것도 그렇군요.

그러면 우리 두 사람이 먹을 만큼만 만들까요?”

 

“당신은 왜 끼는 거요?

배고픈 건 난데!”

 

“알았어요.

당신 것만 만들도록 하지요.”

 

여기에 꼬시야는 덧붙였다.

 

“여보, 이 집안에서 차빠띠를 굽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보게 되오.

그러니 부스러기 쌀 조금하고 기름 버터 과당,

그리고 우유와 꿀을 조금 가지고 맨 위층에 올라가서 나 혼자 만들어 먹겠소.”

 

<부석사 당간지주>

 

그래서 그는 아내는 심부름꾼을 시켜 그것들을

옥상에 올려다 놓고 남편에게 준비가 다 됐다고 알렸다.

 

그러자 꼬시야는 각 층마다 문단속을 시키고 나더니

제일 위층인 7층으로 올라갔고,

그의 아내는 철판 아래에 불을 지피고 차빠띠를 굽기 시작했다.

 

한편 이날 아침 부처님께서는

마하 목갈라나 존자(목련존자)를 부르시어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목갈라나여,

저 작게리라는 도시에 아주 인색한 부자가 살고 있느니라.

그는 잘 구운 차빠띠를 먹기를 원하면서 누가 볼까 두려워하여

자기 집 7층에 올라가 자기 아내와 단둘이서 차빠띠를 만들고 있느니라.

그대는 그에게 가서 베푸는 일이 얼마나 훌륭한 것인지를 가르치고,

그와 그의 아내, 그리고 가가 준비한 모든 음식을 이곳으로 옮겨 오너라.

여래는 오백 비구들과 함께 이곳에 앉아 그 차빠띠로 공양할 것이니라.”

 

이에 마하 목갈라나 존자는 곧 신통력으로써 순식간에 작게리로 가서

꼬시야의 집 7층 창가에 선 채로 꼬시야와 그의 아내를 바라보았다.

꼬시야는 테라가 나타나자 매우 당황했다.

 

‘이 같은 일이 있을까 두려워 7층까지 올라온 것인데

 저 비구는 이곳까지 따라와서 창가에 서 있구나.’

 

화가 잔뜩 난 그는 몰멘 목소리로 테라에게 퍼부었다.

 

“비구여, 그렇게 허공에 매달려서 내게 뭘 얻어 가려는 거요?

흥! 당신이 설사 허공으로 난 길을 왔다갔다할 수 있다고 해도

 내게서 아무것도 얻어 가지는 못할 거요!”

 

그러자 목갈라나 존자는 그의 말대로 허공에 길을 내고는

왔다갔다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꼬시야는 다시 말했다.

 

“흥! 거기서 왔다갔다해서 뭘 어쩌겠다는 거요?

당신이 설살 허공에 결가부좌를 하고 앉는다고 해도 별 소용이 없을 거요.”

 

그러자 마하 목갈라나 존자는 그의 말대로

허공에 결가부좌를 하고 앉는 것이 아닌가!

꼬시야는 다시 말했다.

 

“그렇게 해도 소용없어요.

아무튼 존자님, 창가에 와서 서 있는 것이 좋겠소.

그렇지만 무얼 얻어 가겠다는 생각은 아예 말아요.”

 

그러자 목갈라나 존자는 연기를 내뿜어

집 전체에 연기가 가득해질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꼬시야는 연기 때문에 눈이 따가워져서 마치 바늘에 눈을 찔린 것 같았다.

 

그는 갑자기 집 전체에 불이 붙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목갈라나 테라에게 제발 그만두어 달라고 빌고 싶었지만,

정작 그의 입에서 나온다는 소리는 다음과 같았다.

 

“흥! 존자님이 설사 이 집을 몽땅 태운다고 해도 나는 지지 않겠소!”

 

그러면서도 정작 겁은 나는 것이어서 얼른 아내에게 말했다.

 

“저 비구는 집념이 강해서 무엇이든 얻지 않고는 떠나지 않을 것 같구려.

그러니 차빠띠를 아주 작게 구어서 작은 것을 하나 주어 보내도록 하지.”

 

이렇게 말한 다음 그는 아내를 시켜 반죽을 조금 떼어 내어 철판 위에 놓았는데,

이상하게도 큰 차빠띠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자 꼬시야는 신경질을 내며 아내는 손이 커서 탈이라고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이번에는 자기가 직접 반죽을 조금 떼어 철판에 올려놓았지만,

역시 큰 차빠띠로 변해 버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하는 수 없이 바구니에서 제일 작은 차빠띠 하나를 골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것이 다른 것들과 엉겨 붙어서 떼어 내지지가 않았다.

 

두 사람이 힘들 합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꼬시야는 이제 차빠띠를 먹고 싶은 마음조차 사라져 버린 상태였다.

그는 아예 포기한 마음이 되어 아내에게 내뱉었다.

 

"여보, 그걸 바구니째 몽땅 저 비구에게 줘 버리구려."

 

<부석사>

 

이렇게 해서 그는 마음에도 없는 공양을 올리게 되었는데,

마하 목갈라나 존자는 부처님이 이르신 대로

그들의 공양 공덕을 칭찬해 준 다음 불법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꼬시야는 목갈라나 존자의 설법을 듣자

신비롭게도 마음의 눈이 활짝 열렸다.

 

그는 크게 기뻐서 태도까지 변하여 존자에게 말했다.

 

“존자님, 여기 이 의자에 앉으셔서 차빠띠를 들도록 하시지요.”

 

그러자 마하 목갈라나 존자가 대답했다.

 

“꼬시야 장자여,

지금 정각자 부처님께서는 수도원에서 이 차빠띠를 기다리고 계시오.

그러니 차빠띠를 만들려고 준비해 둔 모든 재료를 가지고 

당신이 나와 함께 수도원으로 가는 게 어떻겠소?”

 

“여기서 수도원까지는 거리가 얼마나 됩니까?”

 

“45요자나라오.”

 

“존자님, 그렇게 먼 곳까지 어떻게 음식을 나를 수 있겠습니까?”

 

“걱정 마시오.

당신이 괜찮다면 내가 신통력으로 쉽게 갈 수 있게 해드리겠소.

당신들이 이 7층으로부터 아래층까지 내려가는 정도의 시간이면

당신들은 수도원에 도착하게 될 것이오.

이 집도 함께 말이오.”

 

“고맙습니다.”

 

그러자, 마하목갈라나 존자는 순식간에

꼬시야의 집 계단을 연장시켜서 끝 부분을 수도원 입구와  잇닿도록 해놓았다.

 

그리고는 그들 부부를 데리고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부석사 안양문>

 

그렇게 제따와나 수도원에 온 꼬시야 부부는 음식을 준비했고, 

곧 부처님께 공양 준비가 다 되었음을 사뢰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식당으로 오시어 마련된 자리에 앉으셨다.

꼬시야 부부는 부처님의 발우에 음식을 담아 드리고 

다른 오백 명의 비구들에게도 음식을 담아 드렸다.

 

그리고 공양이 끝나자 자기들도 배부르게 식사를 했는데,

이상하게도 음식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채 처음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수도원의 모든 사람들과

주변의 거지들에게까지 음식을 나누어 줄 수 있었다.

 

그러고도 음식이 남자 비구들이 이런 사실을 부처님께 보고했는데,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주 좋은 일이구나.

그러면 남은 음식은 수도원 문 밖에다 버리도록 하여라.”

 

이로부터 그 장소는 「차빠띠의 굴」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런 다음 꼬시야 부부는 부처님 옆에 매우 공손한 태도로 서 있었다.

부처님께서는 이들 부부의 공양 공덕을 칭찬해 주시는 한편 설법도 해주시었다.

 

그러자 꼬시야 부부는 곧 법의 눈을 갖추게 되었다.

그들은 곧 부처님과 스님들을 공양한 다음 작별 인사를 하고

 수도원 문밖에서 계단을 따라 자기 집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해서 집으로 돌아온 그들은 이후부터

자신들의 많은 재산을 진리에 합당하게 쓰기 시작했다.

그들의 재산은 불법을 펴는데 아주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꼬시야 부부의 일이 있은 다음날 저녁에

비구들은 큰 강당에 모여 이렇게 감탄하고 있었다.

 

“비구 형제들이여,

마하 목갈라나 존자의 신통력을 보시오.

테라는 꼬시야 부부의 부유함이나 자존심에

조금도 손상을 입히지 않고 그들을 잘 교화하였소.”

 

이때 부처님께서 들어오시어 물으시었다.

 

“비구들이여, 지금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가?”

 

비구들이 사실대로 말씀드리자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었다.

 

“비구들이여, 그러하니라.

재가 신자를 교화하려면 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않으며,

신심을 건드리지 않고, 그들의 재산에 손해도 끼치지 않으며,

마음에 피곤함이나 압박감을 느끼지도 않게 하여야 하느니라.

그렇게 여래의 덕과 지혜를 깨닫게 하되,

그것이 마치 벌이 꽃에서 꿀을 따지만

꽃의 향기나 모양을 해치지 않는 것과 같아야 하느니라.

여래의 아들 목갈라나는 바로 그 같은 능력을 가졌느니라.”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다음 게송을 읊으시었다.

 

색깔과 향기를 지닌 꽃은

꿀벌이 건드리지 않고

오직 꿀만을 따서 나르듯,

성자는 마을에서 유행(遊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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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목어/ 법고>

 

1. 인색함

 

인색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꼬시야'라는 재가자와

신통 제일인 목련 존자의 신통력이 어울어져

아주 재미있는 한편의 판타지 소설 같은 이야기입니다.

 

인도에서는 우리가 먹는 밥처럼

주식으로 먹는 밀로 만든 둥근 밀떡이 "차빠티"입니다.

 

인도인들이 차빠티에 카레를 넣어 먹는 것은

마치 우리가 밥에다 김치를 얹어 먹는 것과 같은 풍경입니다.

 

길을 가다 차빠티에 카레를 넣어 먹는 것을 보고

배가 고팠는데도 돈이 아까와 사 먹지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다른 사람이 먹을까봐

옥상에 올라가 몰래 짜파티를 구워 먹는 장면은 코메디에 가깝습니다.

 

인색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재물에 대한 탐욕이 인색함이라는 가면을 쓰게 되면

인간이 얼마나 옹색해지는지가 너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70~8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의 삶은 풍족하지 못했습니다.

어머니, 어버지 세대로부터 검소하고 절약하고 아껴야 한다고 교육받았습니다.

 

국가에서도 근검 절약을 강조했고,

보리밥(혼분식) 먹기 운동, 폐신문지 수거 운동 등을 했습니다.

 

부모님의 영향, 국가적 교육의 영향으로

무조건 아끼고 낭비하지 않는 절약과 검소함은

경제 생활에서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로 인식되었습니다.

 

이처럼 절약과 검소함을 교육받았지,

인간의 도리나 필요, 자신의 욕구에 맞추어 잘 쓰고 베푸는 교육은 받지 못했습니다.

절약과 검소함이 지나치면 자칫 인색함으로 변질됩니다.

 

유가나 도가에서도 검소함의 미덕을 많이 이야기합니다.

군자는 가난해도 소욕지족하고 검약해야 한다고 합니다.

 

원래 검소함은 가난한 상황에서도 욕망에 물들지 않고

재물과 이익에 담담한 마음 상태를 의미합니다.

검소함이 덕목이 되는 것은 욕망과 이익의 상황에서 초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욕망에서 초연함이라는 검소함의 원래 의미를 모르고

무조건적 절약, 아낌만을 강조하다 보면 인색함으로 흐릅니다.

 

자신의 필요한 욕구마저 억압하고 음흉하게 만들고

인간다운 품위를 떨어뜨리게 만듭니다.

 

그리고, 베푸는 인간의 도리를 모르게 되고,

베푸는 보시의 기쁨을 앗아가버려 삭막한 인간이 됩니다.

 

<부석사 무량수전>

 

2. 베품

 

프랑스 속담에 "구두쇠와 돼지는 죽어야 맛이 난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인색한 구두쇠는 살아 있을 때 사람 냄새가 나지 않고

죽은 후에야 사람의 냄새가 난다는 말입니다.

 

먹고 싶은 것 하나 제대로 못 먹고

옥상에 올라가 몰래 먹으려는 꼬시까에게서 사람의 냄새가 나는가요?

 

그런데, 이러한 꼬시까도 목련 존자의 방편과 설법으로 달라졌습니다.

인색함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재물에 대한 마인드(견해)의 문제입니다.

 

재물을 어떻게 도리에 맞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신의 각성이 오는 순간 인간은 달라지게 됩니다.

이후로 꼬시까는 사람 냄새가 나는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경에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 어렵다."는  말이 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부자의 탐욕은 인색함으로 많이 흘렀던 모양입니다.

 

재물에 대한 탐욕에서 벗어나고 

재물을 쓰는 도리를 잘 알아서

인색함에서 벗어나서 꼬시까처럼 사람 냄새나는 사람이 되어야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세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을 보면

돈을 빌려 갚지 못하자 사람의 살을 베려했던 고리대금업자가 나옵니다.

 

인색함의 악덕을 깨닫고 도리에 맞게 재물을 쓸 수 있고

아낌없이 베풀수 있는 마음을 열어줄 수 있는 보시행이 얼마나 중요한지,

특히 재가자에게는 보시행이 얼마나 중요한 덕목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부석사 일주문>

3. 사려깊음

 

그리고, 인색한 꼬시야를 제도하는 목련 존자의 모습도 인상적입니다.

 

보통 인색한 구두쇠는 <놀부전>처럼 무서운 벌을 내리거나,

재물을 잃고  패가망신하는 새드앤딩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목련존자는 꼬시야의 재물을 없애 망해버리게 하지도 않고,

그의 자존심을 짓뭉개버리지도 않고,

인색함의 악덕과 보시의 유익함을 좋은 방편으로 스스로 깨닫게 하여 제도합니다.

 

불교가 얼마나 사려깊고 자비로움에서 기반한

지혜의 종교인지를 통찰해주는 대목입니다.

 

꿀벌이 꽃을 건드리지 않고 꿀만 따간다는 비유처럼

누군가를 제도하고 가르칠 때

사려깊고 자비로운 가르침이 어떤 것인지를 궁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