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구경(44) 사려깊은 재가자 찻따빠니 이야기>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시던 어느 때,
재가자 찻따빠니와 코살라 국왕 파세나딧 왕의
두 왕비간에 있었던 일과 관련하여
게송 51번과 52번을 설법하시었다.
찻따빠니는 사왓티에 사는 재가자였다.
그는 사다함 과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었으며,
부처님의 말씀을 잘 지키는 한편 다른 사람들에게도 불법을 잘 전하고 있었다.
어느 날 찻따빠니는 부처님을 찾아뵙고 공손히 옆자리에 앉아
8재계일(8가지 계율을 지키는 날)에 관한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있었다.
이때 파세나딧 국왕도 8재계일을 맞아
부처님으로부터 법문을 들으려고 법당으로 들어왔다.
왕이 들어오는 것을 본 찻따빠니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저기 왕이 오신다.
나는 일어서서 왕을 맞이해야 할 것인가?
혹은 그러지 말아야 할 것인가?’
그러다가 그는 곧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지금 부처님을 모시고 앉아 있다.
부처님은 왕 중의 왕으로서 위대하신 분이다.
그런데, 내가 한 나라의 왕에 불과한 파세나딧 왕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선다면 왕을 존경하는 표시는 될지언정
부처님을 존경한다는 표시는 되지 않을 것이다.
내 행동 때문에 왕이 화를 낸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일어서지 않으리라.’
그래서 그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러나 이 광경을 본 파세나딧 왕은 마음속으로 불쾌했지만,
잠자코 부처님께 오체투지로 절을 올리고 부처님 옆에 공손하게 앉았다.
이때 부처님께서는 두 사람의 마음을 잘 관찰하고 계시었다.
부처님께서는 파세나딧 왕에게 말씀하시었다.
“대왕이여!
여기 찻따빠니 재가자는 매우 현명한 사람이오.
그는 경율론 삼장에 통달했으며,
남들에게 그것을 잘 설명할 줄도 아오.”
부처님이 이렇게 찻따빠니를 칭찬하자
왕의 마음은 조금 풀어졌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뒤에 아침 식사를 끝낸 왕은
위층 발코니에 서서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마침 일산을 쓰고 샌달을 신은 찻따빠니가
왕궁 안뜰을 통과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왕은 그를 불러 들이라고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그래서, 끌려온 찻따빠니는 일산과 신발을 한쪽에 벗어두고
왕에게 다가와 공손히 예를 갖추어 절을 올렸다.
왕이 물었다.
“찻따빠니여!
그대는 왜 신발과 일산을 구석에 두고 오는가?”
“대왕이시여!
대왕께서 저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그대는 이제야 내가 이 나라의 왕이라는 것을 안 것이로군
그래?”
“대왕이시여!
저는 대왕께서 이 나라의 왕이라는 것을 전부터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대는 왜 일전에 나를 보고도 일어서지 않았는가?”
“대왕이시여, 왕 중의 왕 앞에 있을 때에는
작은 왕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습니다.
저는 부처님을 존경하는 뜻에서
일어서지 않은 것일 뿐 대왕을 멸시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자 파세나딧 왕은 금방 마음이 풀려서 말했다.
“아주 좋은 일이오.
이제 지나간 일은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겠소.
그런데, 부처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대는 경율론 삼장에 통달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어떻소?
나의 왕비들을 위해서 설법을 해줄 수 있겠소?
“대왕이시여, 저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오?”
“대왕이시여, 제가 알기로 왕실이란 매우 견책이 심한 곳입니다.
왕실에서는 잘했거나 잘못했거나를 가리지 않고 책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뭘 그렇게 사양하는 거요?
나는 당신이 나를 보고 일어서지 않았기 때문에 심한 모욕감을 느꼈었소.
그런데, 또다시 나에게 모욕감을 주는 말은 하지 마시오.”
“대왕이시여, 저는 아직 덕행이 높지 못합니다.
그런 제가 높은 스님들이 하셔야 할 설법을
대신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며, 비난받기 쉬운 일입니다.
그러니 높은 스님들을 왕실로 초청하시어 설법하게 하십시오.”
그래서 왕은 할 수 없이 부처님께 다음과 같은 뜻을 사뢰었다.
“부처님이시여!
저의 두 왕비인 말리카와 와사바캇띠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기를 열망하고 있습니다.
정기적으로 불법을 설해 주시기 바랍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시었다.
“여래가 정기적으로 어떤 한 장소에 간다는 것은 옳지 못하오.”
“그러시다면 비구 스님들이라도 보내 주십시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비서 실장인 아난다 존자로 하여금
정기적으로 왕궁을 방문하여 왕비들을 가르치게 해주셨다.
그런데 이들 중에서 말리카 왕비는
열심히 불법을 배우고 또 실천했지만,
와사바깟띠야 왕비는 열심히 배우지도 않았고 실천에서도 뒤떨어졌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 아난다 존자에게 물으시었다.
“아난다여, 네 여자 신자들은 불법에 통달해 가고 있느냐?
어떠냐?”
“예, 부처님.”
“그래 어느 왕비가 열심히 배우느냐?”
“부처님이시여, 말리카 왕비가 열심히 배웁니다.
그녀는 매우 신심이 깊고 배운 것을
부지런히 외우며 잘 이해하고 실천에도 능숙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종족인 와사바깟띠야 왕비
(석가족을 멸망시킨 위두사까의 어머니)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었다.
“아난다여, 어느 누구든지 간에 불법을 신심 있게 듣지도 않고
독송하지도 않으며 배운 것을 잘 설명하지도 못하고 실천 수행도 없다면
그것은 비유컨대 모양은 아름다우나 향기가 없는 꽃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런 모든 덕목이 잘 갖추어지면
그에게서 풍부한 열매가 열려 되돌아오는 법이니라.”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다음 게송 두 편을 읊으시었다.
아름다우나 향기 없는 꽃이
그것을 가진 사람에게 이익을 주지 못하듯
부처님에 의해 잘 설해진 담마도
실천 수행하지 않으면 아무 이익이 없다.
아름답고 향기도 높은 꽃이
그것을 가진 사람에게 이익과 향기를 주듯
부처님에 의해 잘 설해진 담마를
실천 수행하면 많은 이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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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의와 사려깊음
"왕 중의 왕이신 부처님 앞에서는
비록 세속의 왕일지라도 예를 표하지 않는다."
짯따파니는 부처님에 대한 더 높은 공경심을 드러내는
예의 바르고 사려깊은 예법을 차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짯따파니의 행동에 대해 세속의 왕인 코살라 국왕은
"저 자식! 버릇없네."라는 못마땅한 마음을 가졌던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 사이의 예법을 둘러싼
미묘한 생각과 감정의 차이를 섬세하게 감지한 부처님께서는
짯따파니가 공부를 많이한 재가 수행자임을 왕에게 칭찬해주시며
짯따파니가 예의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우회적으로 왕에게 각인시켜주셨습니다.
이렇게 왕의 마음을 풀어지게 하는 사려깊은 말씀으로
두 사람간의 미묘한 갈등과 오해를 최소화시키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궁전에서 왕과 짯따파니 두 사람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때 이번에는 왕에게 공손하게 예법을 갖추는 짯따파니를 보고
과거의 일로 마음의 뒷켠에 꿍하게 걸려 있던 왕이 과거의 일을 거론했습니다.
그러자 짯타파니는 자신의 예법에 대한 생각을
솔직하게 왕과 소통함으로써
문제가 말끔히 해결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자칫하면 왕에 대한 불경죄에 걸려
엄청난 화를 당할수도 있는 사건이었는데,
두 사람 모두 부처님의 가치에 대한 인식과
부처님에 귀의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던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서로 간에 솔직한 소통을 통해 문제 해결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왕이 이러한 사려깊은 재가자가
마음에 들어서 자신의 왕비들에게 설법을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찟타파니는 왕보다는 훨씬 사려깊은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왕비들을 가르칠 능력이 없었다기보다는
재가자인 자신이 궁전에 들어와 왕비에게 가르침을 펴면
구설수에 오를 수가 있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특히, 파세나딧 왕은 국민적 신망이 두터웠던
말리카 부인의 남편와 아들을 죽였던
과거 행적으로 보아서는 의심과 질투가 많고
귀가 앏고 성급한 성격적 단점이 있는 왕으로 보입니다.
왕비들을 잘 가르쳐 좋은 소문이 돈다고 해도
왕비와 가깝게 지낸다는 식으로 오해를 받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찟타파니는 덕행이 높은 출가 승려가
왕비의 설법을 맡는 것이 좋겠다고 양보했습니다.
이는 현명하고 사려깊은 판단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난 존자가 왕비에게 설법하는 소임을 맡게 되었는데,
두 왕비 중에 말리카 왕비는 가르침을 잘 이해하고 실천에도 밝았으나
석가족 출신의 와사바깟띠야 왕비는 별 가르침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 두 사람을 보고 부처님께서 위의 게송을 읊으신 것입니다.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다르마의 맛을 아는 수행자를 의미합니다.
아름답지만 향기가 나지 않는 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었지만
불법의 진리의 맛을 모르는 무늬만 수행자를 의미합니다.
2. 진리의 맛
<삼국사기>에 보면 당태종이
선덕 여왕에게 모란을 그린 액자와 모란 종자를 보내왔다고 합니다.
액자에는 아름다운 모란 꽃이 그려져 있었지만,
벌과 나비가 그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현명한 선덕 여왕이 꽃은 아름다우나,
벌과 나비가 오지 않는 향기 없는 꽃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왕은 당 태종이 남편 없이 홀로 사는
여왕인 자신을 조롱하기 위해 보낸 그림일 것이라고 했고
그래서, 실제로 모란 종자를 심어 꽃을 피우니
꽃은 아름다우나 나비와 벌이 날라들지 않았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실제로 모란 꽃은 향기가 있다고 하고,
선덕 여왕에게는 여러 남편이 있었다고 사서에는 나와 있습니다.
당나라와 좋지 않은 관계에 있던 선덕 여왕이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서 지지층을 결집시키기 위해
이러한 스토리를 만들어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봅시다.
아름답게 피어 있지만 벌과 나비가 오지 않는
향기 없는 모란은 꽃으로서의 가치와 유익이 없습니다.
소복소복 내리는 눈을 보거나,
한밤에 촉촉히 내리는 비를 보면
그 평온하고 아름다운 풍경의 맛을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수행의 길에 접어들었으면 진리와 수행의 맛을 느껴야 합니다.
불법의 진리의 길과 수행의 길이
자신을 이고득락하게 하고
삶의 질을 높여주는데서 오는 그 맛을 느끼는 것이 중요합니다.
불법과 수행의 길이 주는 유익한 맛을 맛보지 못했다면
불법을 배우고 수행을 하더라도 억지힘만 쓰고
밀린 숙제와 같은 힘겨움만을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힘듬이 심하면 무늬만 수행자가 되어
다르마와 수행의 길과는 반대의 길,
탐진치의 길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려 시대 때 승복만 입은 채
세속적 이익만 구한채 허송세월 시간을 탕진했던 승려들처럼...
그들이 왜 그렇게 살았을까요?
불법과 수행이 주는 맛은 모르고,
세속적 즐거움의 맛만 알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난 존자로부터 같은 가르침을 받았어도
말리카 왕비와 와사바깟띠야 왕비의 차이는 어디서 발생할까요?
아름답고 향기가 나는 유익한 꽃과 아름답지만,
향기가 나지 않는 꽃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불법의 진리의 맛을 느끼고,
자신이 맛본 불법의 진리의 맛으로 인해
이고득락하게 하고 삶의 질이 높아지는 체험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과정이 있어야 향기를 피우고
벌과 나비가 날아들며 자신과 남에게 진정한 유익을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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