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구경(41) 천상에 다시 태어난 빠띠뿌지까 여인 이야기>
부처님께서는 기원정사에 계시던 어느 때,
빠띠뿌지까 여인과 관련하여 게송 48번을 설법하셨다.
이 이야기는 천상에서부터 시작된다.
어느 때 33천에서 말라바리(꽃다발을 만드는 남자) 한 사람이
꽃다발과 꽃목걸이를 만들기 위해 즐거운 동산으로 갔다.
그때 거기에서는 1천 명의 선녀들이 꽃 목걸이를 만들고 있었는데,
그중 오백 명은 나무에 올라가 꽃을 땄고,
다른 오백 명은 밑에서 그녀들이 던진 꽃을 주워서 목걸이 따위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 말라바리의 아내인 선녀가 나뭇가지에 앉아 있다가
순식간에 사라져서 사왓티의 어느 집에 사람의 아기로 태어나게 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빠띠뿌지까"라고 지어 졌으며,
태어날 때부터 과거 전생을 기억하는 능력이 있어서
자신이 전생에 천상에서 꽃목걸이를 만드는 말라바리의 아내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빠띠뿌지까는 열여섯 살이 되던 해에 결혼을 했다.
결혼을 한 다음 그녀는 비구 스님들에게 아침, 저녁으로 공양을 올렸는데,
그때마다 그녀가 올린 한결같은 발원은 천상의 남편과 다시 만나고 싶다는 것뿐이었다.
비구 스님들은 그녀의 간절한 발원을 익히 아는 터여서
그녀를 남편을 존경하는 여인(빠띠뿌지까)이라고 불렀다.
빠띠뿌지까는 때때로 수도원에 나와서 강당을 청소하고
비구 대중들이 마실 물을 준비하기도 하는 등 비구들에게 바치는 정성이 대단했다.
그래서, 비구 스님들은 공양할 물건이 있으면
그녀로 하여금 공양하게 하며 여러 가지로 배려를 해주었다.
그러는 동안 빠띠뿌지까는 임신을 하여 아기를 낳았고,
그 아기가 걸을 만하게 되었을 때 또 아기를 낳은 식으로 하여 모두 네 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녀는 비구들에게 공양을 올리며 다섯 가지 계를 받아 지니고 법문을 받들어 잘 실천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갑자기 병을 앓더니 곧 죽어 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죽자마자 예전의 33천상세계에 다시 태어났다.
그녀가 천상으로 돌아오는 동안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아직도 천상의 선녀들은 여전히 꽃목걸이를 만들고 있었다.
아직도 천상의 하루는 다 지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꽃목걸이를 만드는 말라바리가 그녀를 보고 물었다.
“우리는 아침부터 지금까지 당신을 볼 수 없었는데,
도대체 그 동안 어디에 갔다 온 거요?"
"저는 잠시 천상을 떠나 있었습니다.“
“아니, 지금 뭐라고 말했소.”
“저는 잠시 천상을 떠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낭군님.”
“그랬소? 그래서 어디에 태어났었소?”
“사왓티의 한 가정에 태어났었습니다.”
“얼마 동안 거기에 머물러 있었소.”
“어머니의 태중에서 열 달,
태어나서 열여섯 살이 되어 결혼했고,
그 뒤 아들 넷을 낳을 동안이었습니다.
저는 인간으로 있는 동안 비구 스님들께 공양을 올리면서
다시 천상의 남편에게 태어나고 싶다고 발원했습니다.”
“그랬소? 그래 그곳 사람들의 수명은 대체로 얼마나 됩디까?”
“길게 잡아도 단지 백 년 정도 될 뿐입니다.”
“아, 참으로 짧은 수명이로군!”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묻겠소.
그렇게 짧은 기간을 사는 사바세계의 사람들은 어떠하였소?
그들은 태어나 살아가는 동안 잠이나 자며 주의력 없이 보내던가요?
아니면 수행자들에게 공양을 올리고, 주의력을 유지하면서 열심히 자신을 살피던가요?”
“낭군이시여, 그들은 대체로 정신없이 살고 있습니다.
마치 자기들의 수명이 한없이 길어서
죽음이란 자기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듯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아내의 말을 듣고 나서 꽃목걸이를 만드는 천인은 말했다.
“당신의 말대로 인간이 단지 백 년밖에 살지 못한다면
그들은 잠이나 자면서 정신을 딴 데 빼앗겨서는 안 될 것이오.
그래 가지고서야 어떻게 해탈을 성취할 수 있겠소?
인간의 백 년은 천상의 하룻밤 하루 낮에 지나지 않는 것,
천상인의 수명을 인간의 햇수로 계산하면 무려 삼천육백만 년이나 되오.
그렇거늘 그런 곳에 살면서 정신을 차리지 않고 방탕하다면
이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소.”
한편, 그 다음날 비구들은 마을로 탁발을 나갔는데,
마을의 회관은 아무도 청소하지 않은 채 더렵혀져 있었고,
앉을 자리와 물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비구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매일같이 탁발 준비를 하던
부지런한 빠띠뿌지까 부인은 어디 있습니까?”
마을 사람 하나가 대답했다.
“그녀는 어제 비구 스님들을 공양한 다음
한낮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아직 법안을 갖추지 못한 비구들은
그녀의 친절했던 봉사에 아쉬움을 느끼며 눈물까지 보였다.
그렇지만 아라한이 된 비구들만은 의연하게 감정을 다스리고 있었다.
비구들이 아침 공양을 마치고 수도원으로 돌아와 부처님께 사뢰었다.
“부처님이시여, 매우 활동적인 성품으로 오직 남편만을 생각하던 여인,
저희들을 위해 좋은 일이든 궂은 일이든 가리지 않았으며,
자기의 모든 공덕을 남편에게 회향하던 여인이 죽었습니다.
그녀는 어디에 태어났습니까?”
“비구들이여, 그녀는 자기의 남편에게로 돌아갔느니라.”
비구들이 의아해하여 여쭈었다.
“부처님, 그녀는 자기 남편과 함께 죽은 것이 아닙니다.”
“비구들이여, 그녀가 발원했던 남편이란 인간으로서 만난,
살아 있는 그 남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느니라.
그녀는 꽃목걸이로 천상을 장식하는 천인의 아내였으며,
그녀가 공덕을 회향했던 것은 그 남편이었느니라.
이제 그녀는 다시 옛 남편에게로 돌아간 것이니라.”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천상세계에 대해서 설명해 주셨다.
이에 비구들이 다음과 같이 부처님께 말했다.
“부처님이시여!
그 말씀이 사실입니까?
그렇다면 인생이란 참으로 짧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빠띠뿌지까의 경우로 보더라도
그녀는 아침에 공양을 올리고 저녁때는 병이 들어 곧 죽은 것입니다.”
“그러하니라. 비구들이여!
이 생명이란 그렇게 짧고 무상한 것이니라.
사람들이 채 감각적인 쾌락에 만족하기도 전에 죽음은 그들을 덮치느니라.”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다음 게송을 읊으셨다.
아름다운 꽃을 찾아 헤매듯
마음이 감각적 쾌락에 빠져 있는 자를
죽음은 먼저 앗아 가버린다.
그가 쾌락에 채 만족하기도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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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상계와 인간계
천상계는 착한 선업을 쌓은 중생들이 가는 세계입니다.
천상계는 착한 존재들이 만나 부부의 인연을 맺고 살다보니
부부 갈등은 거의 없고 서로 아껴주고 이해하며 아주 금실이 좋은 것 같습니다.
천상에 있을 때의 남편을 지극히 사랑하여
인간계에 태어났어도 천상계의 남편만을 그리워했던 여인...
그녀는 인간계에 태어나 수행자를 위해 공양하고 많은 선업을 쌓았으면서도
그 공덕을 천상계의 남편을 위해 회향했습니다.
그리고, 죽어서도 천상계에서 다시 태어나 남편과 재회하기를 기원했습니다.
그녀의 깊은 사랑이 마음을 참 따뜻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녀는 그 발원대로 천상으로 가서 다시 남편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인간계에 태어나 결혼하고 아이 낳고 살았던
긴 삶이 천상의 시간으로는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삶이 참 긴 것 같지만,
천상계의 시간의 관점에서 보자면 참으로 무상하고 짧다는 것입니다.
마치 인간인 우리가 하루를 살다 가는 하루살이를 보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녀가 남편에게 하는 이야기처럼
인간들 대부분이 이렇게 짧은 인생을 살면서도
자신이 죽을 줄을 모르고 삶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선업을 닦지도 않으며 마음 챙김없이 헛되게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2. 죽음과 무상
"죽음과 무상(無常)을 아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인식이다."라는 경전 말씀이 있습니다.
많은 수행자들이 수행을 하게 된 동기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통해서였습니다.
부처님께서 죽은 사람의 뼈나 해골을 보고
수행하는 백골관을 수행의 한 방편으로 쓰신 것도
이와 같이 죽음과 무상함을 눈으로 직접 보고 깨달아
새로운 수행의 마인드로 전환하라는 의도였다고 생각합니다.
<보리도차제>라는 경전에 죽음을 생각하면
얻게 되는 이익에 대해 설하고 있습니다.
첫째, 죽음을 생각해야만 이 생에서 바르게 수행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면 이생의 일에 집착하게 되어 수행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생각하면 다음 생에 좋은 곳에 태어나기 위해서라도
계율을 지키고, 보시하고, 인욕할 뿐만 아니라 수행의 길을 배우게 되며,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탐·진·치의 삼독을 없애고 덕행을 쌓는 데도 큰 힘이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죽음을 생각하면 사소한 일에서도 큰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죽음을 생각하면 자신이 하찮게 여기는 존재, 가치들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짧은 인생에서 무엇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지
삶의 가치를 보는 새로운 시각이 트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죽음을 생각하고 수행한 사람은
죽음이 찾아왔을 때 허둥지둥하지 않고
마치 나그네가 고향에 들른 것처럼 편안하게 죽음을 맞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즉, 죽음을 생각하면 회의와 염세에 빠져 인생이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삶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수행의 길로 접어들어 참된 이익과 유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3. 죽음에 대한 바른 인식
<보리도차제>에서는 이러한 죽음을 생각하는 이익과 유익에 대해 설함과 함께,
죽음에 대한 바른 생각, 인식에 대해 다음과 같은 9가지를 제시합니다.
즉,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은 9가지를 바르게 인식하고 잘 명상하라고 하셨습니다.
첫째는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누구나 다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수명을 연장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삶은 하루하루가 죽음이라는
종착역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살아있는 동안 수행할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70살을 산다고 했을 때
자고, 먹고, 놀고, 의미없이 보내는 많은 시간들을 빼면
실제로 수행할 수 있는 시간은 별로 많지 않다는 것을 자각하라는 것입니다.
넷째는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즉, 사고로 갑자기 죽을 수도 있고 죽음은 언제 찾아올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죽을 수 있는 원인은 많고 살 수 있는 기회는 적다는 것입니다.
즉, 사고나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 스트레스 등등으로
우리가 죽을 수 있는 원인은 참 많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여섯째, 몸은 매우 약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 몸은 계속 늙어가고,
조그만 가시 하나가 목구멍에 걸려도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일곱째, 죽음 앞에서 재산은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죽을 때 재산을 가지고 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여덟째, 죽음 앞에서 가족이나 친구나 친지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죽을 때 친지들이 슬프해줄 수는 있지만,
자신이 실로 의지할 것은 수행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아홉째, 자신이 애지중지했던 몸도 죽음의 순간에 도움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살아 생전 그토록 아꼈던 이 몸도
죽음에 이르면 무너지고 썩어간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보리도차제>에서는 이 9가지가 죽음에 대한 바른 생각, 인식이라고 했습니다.
죽음에 대해 이렇게 바르게 명상하여 자각한다면
헛된 가치에 흔들리지 않고 수행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참된 유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진실인데, 우리는 이것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이 9가지야말로 죽음에 대한 바른 인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천상의 남편에게 돌아갔던 여인을 보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게송도 같은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우리에게 어떠한 유익과 이익이 있는지,
죽음을 어떻게 바르게 인식해야만 수행의 길을 갈 수 있는지를
깨우치게 해 주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짧은 게송으로 되어 있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죽음을 생각하면 어떠한 유익과 이익이 있는지,
죽음을 어떻게 인식하는 것이 바른 인식인지를 고뇌하고 명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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