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인물사(16) - 해동화엄의 초조, 의상 대사(3) - 신앙>
1. 귀국
의상 대사는 중국 당나라 유학 10년만에 귀국합니다.
<삼국유사>에서는 670년 의상 대사가 귀국한 것은
신라의 당군 축출에 분노하여
당나라가 대군을 일으키고 신라를 침략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의상 대사는 당시 당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던
김흠순(김유신 장군의 동생)의 요청에 따라
국난의 위급한 정보를 조국 신라에 알리기 위해서 귀국했다고 합니다.
의상 대사로부터 당나라의 침략 정보를 들은 신라 조정은
당나라에서 밀교 문두루 비법을 배운 명랑 법사로 하여금
경주 사천왕사에서 당나라 침략을 물리치는 기도를 하게 했습니다.
명랑 법사는 신통한 도술로
적의 침략을 물리쳤다는 설화가 전하는데,
이 설화를 통해 의상 대사의 정보에 의해
적의 침략을 대비하여 적을 효과적으로 물리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국 측 <송고승전>에 의하면
의상 대사는 화엄종을 신라에 전법하기 위해 귀국했다고 합니다.
아무튼 의상 대사는 귀국 후 새로운 불교 운동을 펼쳐
삼국 통일의 혼란기에 신라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습니다.
2. 관음 신앙
670년 귀국 후 676년 부석사 창건에 이르기까지
의상은 피나는 자기 수행과 제자 양성에 힘을 쏟았습니다.
의상은 귀국한 후 동해안 변방의 어느 토굴에서 재계 수행하여
관세음보살의 진신을 친견하고 낙산사를 창건했습니다.
의상 대사는 귀국한 후 관세음보살님처럼
이 땅의 고통받는 중생들을 위해
불법을 펼쳐나가려는 서원을 다짐하고 전법에 전념했던 것입니다.
의상 대사가 세운 서원은 <백화도량 발원문>에
다음과 같이 남아 있습니다.
"바라옵건데 저는 세세생생
관세음보살을 스승으로 삼겠습니다.
관세음보살이 아미타 부처님를 떠받들듯이
저도 관세음보살을 떠받들겠습니다.
관세음보살의 열가지 서원과 여섯 가지 지향,
그리고 천 개의 눈과 천 개의 손, 대자대비를 함께 하겠습니다.
몸을 버리거나(죽거나) 몸을 받거나(태어나거나),
이 세상에서나 딴 세상에서나
관세음보살님이 계신 곳을 그림자같이 따라다니면서
항상 가르침을 듣고 진리의 교화를 돕겠습니다.
그리하여 온 누리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관세음보살님의 천수 대비주를 읊으며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생각하게 하며
다같이 관세음보살의 원통 삼매에 들도록 하겠습니다."
3. 화엄 불교 전파
그리고, 의상 대사는 674년 경주 황복사에서
<화엄일승법계도(법성게)>를 대중들에게 가르침으로써
화엄의 불교를 이땅에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고려 시대 균여의 기록에 따르면
<화엄일승법계도(법성게)>는
의상 대사이 중국에 있을 때 자신이 깨달은 것을
<대승장(大乘章)> 10권으로 엮어 갈고 닦다가
670년 귀국에 즈음하여 부처님 전 앞에서 불살라 남은
210자의 문자로 의상의 화엄 사상을 2간결하게 응축하여 놓은 화엄학의 정수입니다.
이것을 오늘날에는 '법성게(法性偈,
법의 성품(본질)을 밝혀놓은 시 라는 뜻)'라고도 합니다.
오늘날도 우리 나라 사찰의 예불 의식 때 널리 애송되는 시로서
글을 거의 남기지 않았던 의상 대사의 화엄 사상을 살피는데 아주 중요한 글입니다.
의상 대사는 법성게를 짓게 된 동기에 대해서
"이름에만 집착하는 무리로 하여금
그 이름마저도 없는 참된 근원으로 되돌아가고자 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의상 대사는 사물의 본질 또는 존재 법칙으로 '연기법'을 밝히고
이러한 연기법의 통찰 하에 중생을 이롭게 하는 보살행의 실천을 강조하였고,
자신도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4. 제자 양성
의상은 부석사, 화엄사, 해인사 등
화엄10찰로 대표되는 여러 사찰을 세우고,
제자들을 양성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이러한 그의 노력으로 그의 문하에는
10대 대덕으로 불리는 수제자와
3,000명의 문도가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의상은 제자의 양성에 있어서도
완고한 골품제 사회 속에서 신분의 평등을 주장했습니다.
그의 문하의 10대 수제자에는
지통과 같은 천민 노비 출신,
진정과 같은 빈민 출신 제자가 배출되어 법을 이었습니다.
지통에 대해 덧붙이면(삼국 유사에 의하면)
지통은 이량공이라는 귀족 집안의 노예로서
일곱살 때 낭지 화상에게 출가했다고 합니다.
그는 까마귀의 계시를 받고
제 발로 낭지를 찾아갔다고 한 것으로 보아
아마 주인 집에서 뛰쳐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당돌한 꼬마가
낭지 화상을 찾아가는 길에 보현 보살님이 나타나
계율을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거룩한 아이가 올테니 나가서 영접하라."라는
까마귀의 말에 따라 지통을 맞으러 낭지 화상이 직접 마중을 나왔다고 합니다.
낭지는 이름없이 숨어살던 승려로서
<법화경>을 해설하였다고 하여 원효가 존경했다는 스님이었습니다.
지통은 낭지 화상에게 가르침을 배운 후
661년에 바로 의상 대사에게 화엄학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의상의 또다른 제자 진정은
군대에서 군역을 담당하면서도 홀어머니를 정성껏 모셨다고 합니다.
의상 대사는 진정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
7일 동안 선정에 들어 어머니의 명복을 빈후
소백산 추동에서 90일간 화엄경을 강의하였는데,
이 때 지통이 스승의 강의를 받아 적었다고 합니다.
이 강의록 <추동기>는
다른 제자가 쓴 <도신기>와 함께
신라 이두 문자로 쓰여져 고려초(13세기)까지 전해왔다고 합니다.
의상 대사와 의상 대사의 뒤를 이은 제자들의 교화에 의해
의상 대사의 화엄종은 신라 불교를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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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관음행자
의상 대사가 살았던 시기는
삼국통일의 전란기와 당나라 침략 전쟁의 격동기였습니다.
의상 대사는 전란 속에서 고통받는 민중들의 고통과
이 땅을 먹어 치우려는 당나라의 침략 야욕을 보았을 것입니다.
의상 대사는 중국에서 화엄학을 배웠지만,
자신의 조국인 신라를 누구보다 사랑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신라로 돌아와 자신이 배운 화엄의 가르침을
조국인 신라에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화엄학의 대가이면서도
관세음 보살에 대한 신앙을 중요시하였습니다.
그것은 중생들을 고통에서 건지시는 관세음보살처럼
전란과 부역의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신라 백성들에 대한
큰 자비심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의상 대사는 <백화도량 발원문>에서 드러나 있듯이
세세생생 관세음보살님을 영원히 섬기면서
영원한 현역 보살로서 관세음보살님의
진리의 교화를 돕겠다고 서원하고 있습니다.
화엄10찰 중의 하나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 중의 하나로 칭송받는 부석사는
화엄종의 종찰이면서도 주법당인 무량수전에는
서방 극락 정토의 아미타 부처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마치 관세음보살이 아미타 부처님의 48대원을
구현하는 현역 보살로서 살아가시듯이
자신도 중생을 고통에서 건져내는 관세음보살을 돕는
존재가 되기를 간절히 서원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의상 대사의 실천적 사상은
관음 신앙을 이땅에 대중화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오늘날까지 관세음보살님에 대한 관음 신앙이
우리 한국 불교 신앙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이면에는
의상 대사가 관음 신앙을 우리 나라 전역에 전파한 것에 큰 연관이 있습니다.
원효 대사는 화엄의 가르침을 널리 펼 때에도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평등하게 법을 설했습니다.
그래서, 천민이나 빈민 출신의 제자들도
10대 제자가 되었을 정도로 애정을 가지고 법을 가르쳤습니다.
이처럼 신분의 차별을 넘어
법을 구하는 제자들에게
따스한 자비와 사랑의 마음을 갖고 있었기에
골품제 사회였던 신라에서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할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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