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인물사(14) - 해동화엄의 초조, 의상 대사(1) - 출가>
1. 해동화엄 초조, 의상대사
이번 시간부터 의상 대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의상 대사(625~702)는 원효 대사와 더불어
신라 불교를 대표하는 승려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의상 대사는 "해동 화엄종의 초조(初祖)"라고 흔히 일컫어집니다.
이 땅에 화엄 불교을 널리 일으켰던 분입니다.
의상 대사의 일생을 보면 화엄의 불교를 대성하는데 그치지 않고,
제자 양성과 대중 교화를 활발히 함으로써
불교의 사회적 실천을 위해 힘썼던 훌륭한 스님이었슴을 알 수 있습니다.
2. 출가
의상 대사는 신라 진평왕 47년(625년)에 태어났습니다.
그의 속성은 김(金) 씨이며, 아버지의 이름은 한신(漢信)입니다.
신라 골품 사회에서 진골(眞骨) 출신에 해당하는 아주 높은 신분이었습니다.
진골은 신라 신분제 사회(골품 사회)에서 성골(聖骨)과 함께 최고 계급입니다.
진골은 아버지와 어머니 가운데 한쪽은 왕족이고,
한쪽은 귀족 출신의 골품을 말합니다.
신라는 28대 진덕 여왕 때까지는 성골 출신들만 왕위에 오를 수 있었으나,
그 이후인 29대 태종 무열왕 이후의 왕들은 진골 출신들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처럼 의상 대사는 왕족 출신의 승려였습니다.
의상 대사가 활동을 전개했던 시기는
신라가 고구려, 백제와의 전쟁을 통해 삼국을 통일하고 나서
내정 간섭과 침략의 마각을 드러나고 있던 당나라와 맞서 싸우던 시기였습니다.
의상 대사는 20세 되던 해인 644년 경주의 황복사(皇福寺)에서 출가하였습니다.
의상 대사는 출가한 후부터 원효 대사와 가깝게 지냈던 것으로 보입니다.
3. 당나라 유학
26살 때인 650년, 원효 대사와 함께 당나라 유학을 가고자
고구려의 영토인 요동 지방을 통해 당나라로 들어가고자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고구려 병사에게 잡혀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나, 원효와 의상의 당나라 유학에 대한 열망은 식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신라가 당나라와 함께 백제를 멸망시키고 바닷길이 열린
661년 2차 유학을 감행하였습니다.
당시 당나라로 가던 항구인 당항성이 있던
경기도 화성의 어느 토굴을 지나가다
원효 대사는 해골 바가지 물을 마시고
'일체유심조'의 각성을 얻어 다시 신라로 되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의상은 처음 마음 먹은대로
자신의 뜻을 관철시켜 중국 당나라를 향해 배를 타고 건너갔습니다.
의상이 중국에 처음 도착한 항구는
오늘날 산동 반도에 있는 항구인 등주였습니다.
등주는 신라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신라방이 있었으며,
당항성에서 중국에 가기 위한 최단 코스였습니다.
의상은 등주에 머물 때 병에 걸렸는데,
등주의 중국인 유지인의 딸인 선묘가 의상 대사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의상은 출가 사문으로서
부처님의 계율을 최고로 삼는다고 선묘의 연정을 거절하였고,
의상의 구도열에 감동한 선묘는 의상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공경의 마음으로 변하여 의상을 공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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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의상 대사의 훌륭함
신라는 법흥왕 때 불교가 공인된 이후
불교를 국가 지배 이념으로 삼았습니다.
많은 귀족 자제들의 출가를 장려하였으며,
이들은 당시 신라 불교의 주류로서 성장하였습니다.
진평왕 때 세속 5계로 유명한 원광 법사나
선덕 여왕 때 대국통을 지낸 자장 율사도 진골 출신으로
중국에 유학한 후 신라 불교의 주류 세력으로
현실 정치에도 깊이 관여한 것이 대표적인 예일 것입니다.
의상이 출가한 '황복사'는
'황실의 복을 기원하는 절'이라는 절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신라 왕실과 밀접한 연관이 있던 절로 보입니다.
오늘날 황복사는 진평왕릉이 보이는 논 앞에 있는 절로서
단아한 국보 삼층 석탑만 남아 있는 폐사지입니다.
당시 많은 귀족 자제들이 황룡사나 황복사에 출가한 것처럼
진골 출신인 의상 대사도 비슷한 코스를 밟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의상 대사는 이러한 출신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을 살펴보면 종교 권력을 추구하기보다는
법을 구하는 진지한 수행자의 모습과 함께
신분을 넘어서서 제자들의 양성과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 노력한 스님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의상 대사의 삶은
원효 대사와는 개성이나 스타일이 다르지만,
원효 대사와 더불어 후일 많은 민중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의상 대사는 원효 대사와 함께 두번씩이나
당나라로 유학가려는 시도를 함께 했을 정도로
가까운 도반 사이였습니다.
원효 대사가 8살 연상이지만,
원효, 의상 두 분의 존재로 인하여
신라 불교는 질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5. 원효 대사와 의상 대사의 차이
그러나, 원효 대사와 의상 대사는 여러 면에서 아주 대조적입니다.
첫째, 출신면에서 보자면 원효 대사는 신라 골품 사회에서
그리 높지 않은 6두품 출신인데 반해
의상 대사는 진골로서 귀족에 속하는 아주 높은 신분이었습니다.
둘째, 원효 대사는 당나라로 유학가는 것을 포기하고 신라로 돌아온데 반해
의상은 당나라로 가서 화엄학을 배워 신라에 화엄 불교의 꽃을 피웠습니다.
셋째, 계율 면에서 원효 대사는 요석 공주 사이에서 설총을 낳고
소성거사라고 불리울 정도로
승속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모습을 보인 반면
의상 대사는 선묘 낭자와의 일화에서 드러나듯 계율을 엄정하게 지켰고
산사에서 삼의일발(三衣一鉢)을 의지하여 청빈한 삶을 살았습니다.
넷째, 학문면에서 제자를 지도하는 면에서도 달랐습니다.
원효 대사는 일정한 스승 없이,
또한 한 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절과 세속에도 머물렀습니다.
그래서 원효 대사에게는 일정한 제자가 없었습니다.
이에 반해 의상 대사는 지엄 문하에서 화엄을 배우고 귀국한 후
화엄 10찰을 중심으로 화엄종의 큰 절을 세우고
후학 지도에 나서 10대 제자를 비롯하여 3,000명의 제자를 배출하였습니다.
다섯째, 저술면에서 원효 대사는 거의 모든 대승경론을 섭렵하고
100부 240권의 방대한 글을 남긴 반면
의상 대사가 남긴 저술은 단 2편 뿐입니다.
(화엄일승법계도와 백화도량발원문)
그리고, 그 두편도 길고 다양한 저술이 아니라,
꼭 필요한 지침과 핵심만을 분명하게 나타내었습니다.
이와 같이 의상와 원효는 동시대를 살다간 도반 사이의 불교인이지만,
개인적 개성과 불교적 구현의 측면에서는 매우 대조적인 재미있는 케이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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