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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인물사

불교 인물사(16) - 해동화엄의 초조, 의상 대사(4) - 사랑

by 아미타온 2024. 4. 19.

<불교 인물사(16) - 해동화엄의 초조, 의상 대사(4) - 사랑>

 

<일본 고산사의 화엄종 조사회전-의상 조사편에 그려진 그림 - 의상에게 사랑를 고백하는 선묘의 모습 위 그림에 글을 쓴 일본 승려 묘에의 글에는 "어, 어라? 아아.. 경솔하여라. 저게 무슨 짓인가?"라고 씌여져 있다.>

 

1. 선묘의 사랑

 

 

의상 대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선묘(善妙)와의 사랑입니다.

 

661년 의상 대사가 당나라 유학을 위해 뱃길을 떠났을 때

도착한 항구는 중국 산동 반도 북쪽의 등주라는 항구였습니다.

 

의상 대사는 당나라에 도착한 후 가벼운 병에 걸려 

등주에서 신심이 깊은 유지인(劉智仁)이라는

한 독실한 불교 신도의 집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유지인에게는 선묘라는 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의상 대사를 보고 반해서

의상 대사와 결혼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선묘가 의상 대사를 모시겠다고 아버지께 그 뜻을 말씀드렸습니다.

 

유씨는 난처했지만 의상 대사에게 그 사실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구도열에 불타던 의상 대사는 

자신은 출가한 승려로서 불법을 구하기 위해

당나라까지 왔다는 사실을 말하고 다음과 같이 거절했습니다.

 

"저는 부처님의 계율을 지키고

신명(身命)은 그 다음으로 했습니다."

 

그리고, 선묘 낭자에게 마음을 돌릴 것을 권유했습니다.

 

그러자, 의상 대사의 도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에 감복한 선묘는

도심(道心)을 일으켜 그 앞에서 다음과 같이 서원을 발하였다고 합니다.

 

"저는 내세에 태어나면

세세생생 법사님께 귀의하여 대승을 배우고 익히겠습니다.

그리고, 이생에서 저는 법사님의 공부 성취를 기원하고

생활에 도움되는 것을 공급하겠습니다."

 

의상 대사가 유지인의 집에서 머물 때

선묘는 정성으로 의상을 대사를 모셨습니다.

 

의상 대사는 병이 나은 후 공부를 위해

당시 당나라의 수도였던 장안으로 떠나서

화엄의 대가인 지엄 화상에게 화엄학을 공부했습니다.

 

< 일본 고산사의 화엄종조사 회전 - 의상 조사편에 그려진 그림 - 바다로 투신하는 선묘의 모습 >

 

2. 호법용으로 변한 선묘 보살

 

10년 공부를 마치고 670년 의상 대사가

라로 귀국하기 위해 다시 등주에 있는 선묘의 집에 들렀습니다.

 

의상 대사는 처음 당나라에 왔을 때 뒷바라지에 감사의 뜻을 표하고

상선을 타고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마침 선묘는 출타중이라서 뒤늦게 의상의 출발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직접 짠 의상에게 보시할 의복과

여러 가지 집기를 들고 해안가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신라로 향하는 의상이 탄 배는

이미 항구를 떠나 멀리 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기도를 올리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저의 본래의 뜻은 법사님을 공양하는데 있습니다.

원컨대 이 의복을 담은 함이 저 배에 날아 들어가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파도 위로 함을 던졌습니다. 

때마침 새찬 바람이 불더니 함은 새털 같이 날아가 배 위에 떨어졌습니다.

 

선묘는 다시 맹세하며 말하였습니다.

 

"저는 내세를 기다리지 않겠습니다.

바로 지금 현재의 몸으로 법사님의 대원을 돕는 몸이 되게 하소서.

이 몸이 큰 용으로 변하여 저 배를 지키는 날개가 되어 

법사님을 무사히 신라로 돌아가 법을 전할 수 있게 하리라."

 

하고는 몸을 던져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당시 바닷길은 파도와 태풍, 해적으로 인해 아주 위험한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원력은 통하는 바가 있어 마침내 그녀의 몸은 용이 되어

약동하고 혹은 굽이치면서 배를 안전하게 이끌어 의상이 탄 배를 무사히 귀국시켰습니다.

 

선묘의 도움으로 무사히 본국으로 돌아온

의상 대사는 화엄10찰을 짓고 화엄 불교를 깊이 선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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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상 대사에 대한 애욕이 호법의 원력으로 변해 용이 된 선묘가 의상 대사를 무사히 모셔주는 그림 >

 

3. 일본 화엄종조 묘혜 스님과 선묘

 

의상 대사와 선묘의 이야기는 중국 <송고승전>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의상과 선묘 이야기가 대중에게 크게 어필된 데에는

일본의 고도 교토 서북쪽에 있는 고산사(고쟌지,高山寺)라는 절과

화엄종 스님인 '묘에(明惠)'라는 승려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일본의 화엄종찰이자 세계문화유산인 고산사의 묘에 스님은

해동 화엄의 초조인 원효 대사와 의상 대사를 깊이 공경하여

두 분의 전기와 함께 그림을 남겼습니다.

 

고산사에는 원효와 의상의 일화가 담겨있는

‘화엄종 조사회전(華嚴宗祖師繪傳)’이라는 두루마기 그림첩과

의상 대사를 사랑했던 선묘가 보살상으로써 신앙의 대상으로 모셔져 있습니다.

 

일본 국보로 지정된 ‘화엄종 조사회전’에는

원효의 해골바가지 이야기, 의상의 유학길,

선묘와의 만남 등이 아주 세밀하게 묘사돼 있습니다.

 

삼국유사나 해동고승전에서는 언급되지 않은 이 이야기들이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은 이 그림 덕분입니다.

 

그리고, 이곳에는 선묘의 모습을 조각으로 형상화한 조상이 소장돼 있는데,

이 또한 일본의 국보입니다.

 

원효와 의상의 화엄 사상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슴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특히, 고산사를 중창한 묘에(明惠, 1173〜1232) 스님

신라 화엄 사상에 깊이 심취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묘에 스님은 호넨, 신란 등에 의해 정토 신앙이 들불처럼 일어나던 시절,

석가모니불 신앙을 강조한 구불교 개혁파로 꼽힙니다.

 

묘에는 호넨의 『선택본원염불집(選擇本願念佛集)』이 간행되자

그 가르침이 석가모니 본래의 가르침을 저버렸다고 크게 분노하여

『최사륜(摧邪輪)』(삿됨을 꺾는 수레바퀴라는 뜻)을 지어 비판했습니다.

 

화엄의 가르침을 숭상했던 묘에의 입장에서는

보리심은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이며

보리심이 있고서야 비로소 불도 수행을 할 수 있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호넨은 보리심이 없어도

아미타불을 믿고 염불만 하면 구제될 수 있다고 했으니,

묘에의 눈에 비친 호넨의 주장은 삿된 선동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묘에는 불도를 수행하는 자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충실해야 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화엄 사상에 깊이 심취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원효와 의상의 화엄을 깊이 연구했다고 합니다.

 

묘에는 의상과 원효의 삶을 존경하여

두 분의 일대기를 길다란 그림첩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화첩의 글은 묘에가 직접 썼고,

그림은 묘에의 벗인 혜일방 성인(惠日房 成忍) 스님이 그렸는데,

이 두루마기 그림첩이 바로 "화엄종 조사회전"입니다.

 

그리고, 의상 대사를 사랑한 선묘가

일본으로 건너가서는 보살로서 추앙받게 되었습니다.  

 

< 일본 선묘니사에 모셔진 선묘 보살상 >

 

4. 번뇌즉보리

 

이는 묘에 스님이 처한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있었습니다.

 

묘에 스님이 고산사를 중창할 당시 일본에서는

‘조큐의 난’ 이라는 전란이 발생했습니다.

 

'조큐의 난' 이란 1221년 일본 천황의 아버지인 고토바 상황이

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하기 위해 난을 일으켰으나,

오히려 당시 막부 최고 권력자인 호조 요시토기(北條義時)를

중심으로 한 막부군에게 진압된 사건을 말합니다.

 

이때 고토바 상황에게 동조한 이들이 막부의 처벌을 피해

교토 인근의 산으로 도망쳤고 묘에의 절로 찾아들었습니다.

 

가마쿠라 막부의 처벌 위협에도 아랑곳없이 

묘에 스님은 이들을 자신의 절에 숨겨주었습니다.

 

묘에 스님은 이로 인해 결국 막부에 끌려갔지만,

그 자리에서도 도망자들을 감싸주는 묘에의 자비심에

막부의 권력자 호조 야스토기는 큰 감복을 받아

묘에 스님을 무죄로 풀어주었습니다.

 

그런데, 묘에 스님에게 온 도망자 중에는

조큐의 난으로 남편을 잃은 미망인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들 중에는 묘에 스님을 연모하는 여인들이 많았습니다.

 

보다 못한 묘에는 네덜란드 화가 고흐처럼 

자신의 귀를 잘라 그녀들의 애욕심을 물리치려고 했다고 전해집니다.

 

귀를 자른 다음날 아픔을 참으며 묘에 스님이

<화엄경>을 설하자 문수 보살이 나타나 묘에 스님을 칭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묘에 스님은 선묘의 조각상을 만들어

그녀들에게 선묘를 보살로써 추앙하도록 하였습니다.

 

의상을 사모하는 마음을 호법의 원력으로 승화시킨 선묘처럼

그녀들도 수행 정진하여 보살의 도를 이루라는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선묘 보살을 여인들이 본받아야할 표상으로 내세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갈 곳 없는 여인들을 위해 고산사 인근에

"선묘니사"라는 절을 세우고 이곳에 선묘의 조각상을 안치하였습니다.

 

묘에 스님은 선묘의 삶 속에서 '번뇌즉 보리'를 보았습니다.

애욕심의 번뇌를 승화시켜 의상 대사를 수호한

선묘 보살의 인내와 희생, 그리고 호법의 원력을 보았습니다.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애욕을

포기할 줄 아는 희생이 바로 그녀의 사랑을 완성시켰다는 이야기입니다.

 

묘에는 의상 대사의 마지막 그림에는 다음과 같이 글을 썼다고 합니다.

 

“재가의 애심(愛心)은 용맹한 신심(信心)을 일으켰다.

그녀는 공경에 의하여 사랑을 이루었다"

 

몸을 투신하여 용이 된 선묘의 전설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며 감동을 주는 이유는

선묘의 사랑은 갈망과 집착을 뛰어넘어 용기와 원력으로

승화시킨 '번뇌즉보리'의 보살적 사랑이 무엇인지 가르쳐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선묘(善妙)'라는 이름처럼

착하고 묘한 사랑, 영원한 사랑, 완전한 사랑으로 불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