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인물사(25) - 수선결사와 보조국사 지눌(1) - 고려 불교의 문제점(1)>
이번 시간부터는 고려 시대 수선 결사를 이끈
보조국사 지눌 스님에 대해 살펴 보겠습니다.
우리 나라 역사상 불교가 가장 융성했던 시대는
고려 시대입니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부처님의 은덕으로
고려를 건국하였다고 하여 불교를 국교로 삼았습니다.
태조 왕건 후대의 왕들도 불교를 숭상하면서 불공을 드리고,
수많은 절을 세우면서 불교를 우대하는 정책을 펼쳐 나갔습니다.
이와 같은 고려 불교는 외관적으로는 발달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 이면에는 어둠과 부패가 함께 공존했습니다.
빛이 밝으면 어둠이 깊은 것과 같은 이치라고나 할까요.
불교의 융성의 이면에 권력과 연계되고,
세속화된 불교의 어둠과 부패가 드러났던 시대가 고려 시대입니다.
고려 시대를 빛낸 선지식인 보조 국사 지눌(1158~1210)은
고려 중기 불교의 빛과 어둠이 공존하던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지눌 스님은 기존 불교를 비판하고,
수행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불교 개혁 운동(결사)을 이끌었습니다.
지눌 스님이 왜 불교 개혁 운동을 펼쳤는지,
어떠한 불교 개혁을 이루려고 하였는지,
그의 불교 개혁 운동이 가지는 의의와 한계는 무엇이었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자눌 스님의 삶과 고려 시대 불교를 통해
오늘날 불교의 문제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계기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아울러 현대 사회에서 보살도를 추구하려는 우리들이
올바른 불교 개혁과 불교적 삶에 대해 사유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지눌 스님의 삶과 불교 개혁 운동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지눌 스님이 살았던 고려 중기 무신의 난을 전후의 불교계와
사원의 동향을 살펴보며 불교계의 문제점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몇 가지 당시 불교계의 문제점을 한번 살펴 보면서
왜 지눌 스님이 '수선 결사'라는 수행 공동체 운동을 펼쳤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은 첫번째로 '왕실, 귀족과 결탁한 기복 불교' 라는
고려 불교의 문제점을 살펴보겠습니다.
(1) 왕실, 귀족과 결탁한 기복 불교
1) 교종
고려 중기까지 불교는
교종(敎宗)과 선종(禪宗)의 여러 종파가 대립하며 발전했습니다.
교종은 화엄경, 법화경 등 소의 경전을 중심으로 공부하는 불교이고,
선종은 참선을 수행하며 마음을 닦는 불교를 말합니다.
통일 신라 하대에 들어오면서 중국에서 선불교가 전래되어
9산을 중심으로 하는 선종이 등장했고
지방 호족들은 기존의 교종보다는 이러한 선종을 지원하였습니다.
그러나, 고려 시대로 접어들며 왕권을 강화되자
다시 왕실과 중앙 귀족의 후원으로 교종의 세력이 우세했습니다.
교종 중에서도 대표적인 종파는 화엄종과 법상종이었습니다.
화엄종은 화엄경을 공부하는 종파로
신라 시대 때 의상 대사의 화엄종을 계승하였는데,
의상 대사 문하에서 많은 제자들이 나와 세력을 키웠습니다.
화엄종은 통일 신라 후기의 역대 왕실뿐 아니라,
고려 시대에 들어와서도 역대 왕들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발전하였습니다.
화엄종의 본산은 신라 때 영주 부석사에서 구례 화엄사로 옮겼다가
고려 때에는 수도 개경의 귀법사로 옮겨졌습니다.
화엄종은 신라 후기 때 남악파와 북악파로 나뉘어졌습니다.
고려 4대 왕인 광종은 향가로 <보현10원가>를 지은
균여 대사를 등용하여 남악파와 북악파를 통합하였습니다.
그리고, 화엄종에 대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화엄종에서 많은 왕사, 국사를 선발하였습니다.
한편, 고려 시대의 왕들은 왕의 서자들을 주요한 절로 출가시켰습니다.
이들을 '소군(小君)'이라 불렀습니다.
이들은 화엄종을 비롯한 주요 사찰에 주석하며
정치적으로도 연계되어 대궐 안을 넘나들며 위세를 떨쳤습니다.
법상종은 신라 시대 때 태현 등의 신라 유식 불교를 계승한 종파입니다.
그런데, 고려 중기로 접어들며 왕실의 외척으로
대표적인 문벌 귀족인 인주 이씨의 막강한 권력을 등에 업고 세력이 커졌습니다.
인주 이씨인 이자연은 딸 셋을 문종의 왕비로 들여보낸 후
권력을 독점하고 법상종을 크게 후원하였습니다.
법상종의 본찰은 왕실 소속의 개성 현화사였는데,
이자연의 아들 이덕소는 출가하여 승려가 되어 현화사의 주지를 맡았습니다.
그리고, 이자연의 손자인 이자겸도
역시 외척으로 임금을 갈아치우는 등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는데,
그의 아들 이의장은 현화사를 마음대로 주무르는 실력자였습니다.
이 가문은 법상종을 세력 기반으로 하고
현화사를 통해 재산을 도피시켰습니다.
당시 사원전은 국가에서 세금를 물지 않았으므로
문벌 귀족들은 이를 이용하여 재산 도피처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화엄종과 법상종은 왕실과 문벌 귀족들의
막강한 권력과 불사를 기반으로 삼아 위세를 떨쳤습니다.
당시 왕실과 귀족들은 국운과 세속적 복을
빌기 위한 제사와 기복 불사를 많이 하였는데,
이들 교종의 많은 사찰들은 이러한 불사를 주관하며
정치적, 경제적으로 세력을 키웠습니다.
각 종파별로는 서로 대립이 심하였고,
부패한 승려들이 나타나기도 하였습니다.
2) 선종
한편, 통일 신라 하대에 들어온 선종은 9산 선문으로 분열되어
그다지 빛을 보지 못하였고 선종 계통의 승려들이 기댈 곳은 많지 않았습니다.
가지산문의 선승인 학일은 은퇴한 뒤
운문사에 거쳐하면서 선의 선양에 주력하였고
선종의 가지산문은 경상도 지역으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또한 귀족이던 이자현은 청평산에 문수암(오늘의 청평사)을 세우고,
온갖 명리를 끊고 선종 고수에 정진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한편, 승려들 내에서도 빈익빈 부익부가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귀족과 연계되지 않거나 왕실의 원당이 아닌
작은 절에 사는 낮은 신분의 승려들은
토지를 거의 소유하지 못하여
어려운 살림을 꾸려나가면서 생계만을 유지해 나갈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베를 짜서 팔거나
농사일과 작은 규모의 장사를 벌여
생계를 꾸렸으며 때로는 탁발로 연명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낮은 신분의 승려들이나 절 주위의 농민들은
큰 절에 예속되어 노역에 종사하였습니다.
3) 항마군
그리고, 불교계에는 많은 승려들과
신도들로 이루어진 절의 군사 자위 조직이 생겨났습니다.
처음에는 도둑을 막는 수단으로 자위 조직을 유지하였던 이들은
외침이나 변란이 있을 때는 국가의 군사 인력으로 동원되기도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12세기 초에 여진족이 군사력을 길러 고려를 침입해 오자
숙종과 윤관이 여진 정벌을 계획하면서 별무반을 조직하였는데,
여기에 특수 부대로 스님들을 뽑아 항마군(降魔軍)을 만들었습니다.
항마군은 사찰에 예속되어 노역에 종사하던
수원 승도로 조직되었으니 사찰 자위 조직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항마군은 여진 방어에 기여하였으며,
뒷날 무신의 난이나 몽고의 침입 때
승려들이 전쟁에 참여하는 전통을 만들었습니다.
승려들은 보통 군역을 면제받는 특혜를 누렸으나,
일부 수원승도는 특수 부대에 종사하면서 그에 상응하는 역할을 해낸 것입니다.
그런데, 항마군은 국내 정치에도 한몫 거들었으니
문벌 귀족들이 지배하는 사찰에 국가적 통제를 가하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다시 말해 항마군은 국왕의 지휘를 받으면서
사찰을 통제하는 수단이 되어
문벌 귀족의 사찰 장악을 제약하였으며 비리 사찰의 압력 집단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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