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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인물사

불교인물사(26) - 수선결사와 보조국사 지눌(2) - 고려 불교의 문제점(2)

by 아미타온 2024. 5. 23.

<불교인물사(26) -  수선결사와 보조국사 지눌(2) - 고려 불교의 문제점(2)>

 

<국립중앙박물관 괘불 - 영산회상도>

 

(2) 사원전의 비대화와 승려들의 부패

 

1) 사원전

 

농경 사회에서 땅은 모든 재산의 원천입니다.

11세기 사원 경제는 사원전을  통해 더욱 확대되어 갔습니다.

 

사원전은 임금이 내려준 땅, 신도가 시주한 땅,

절에서 개간한 땅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무렵에는 절에서 소작료를 받거나,

상업적 이익을 얻고 이자 놀이에 열중하여

절 자체에서 사들인 땅이 더욱 늘어나는 현상이 빚어졌습니다.

 

아자 놀이는 주로 "보(寶)"를 통해

쌀과 베를 빌려주고 이자 소득을 올리는 방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보"는 원래 절에서 땅이나 돈, 곡식을

밑천삼아 수요자에게 대부하여 거기서 이윤을 남겨

불교 행사나 공익 사업을 벌이는 불교신용조합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후대에 이르러

고리 대금업으로 변질되어 민폐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당시 법정 이자는 1년 단위로 쌀 15말에 5말,

베 15필에 5필로 원물의 평균 1/3로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법정 이자는 거의 무시되고

원물에 가까운 이자를 물렸으며

이를 제 때 갚지 못하면 빌려간

백성의 토지를 원물 대신 빼앗다시피 차지하였습니다.

 

어떤 승려는 질이 나쁜 베와 종이를

강제로 백성에게 떠맡기고 이자를 거두었으며,

어떤 절에서는 쌀 50만 섬을 빌려주고 이자를 독촉한 탓에

백성이 나라에 조세를 내지 못했다는 사례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자 수입으로 절은 다시 토지를 구입하고 

다시 토지 확대로 이어졌습니다.

 

 

2) 장생표

 

그리고, 절에서는 절 소유 토지에 장생표를 세워

경계를 표시하였습니다.

 

당시 통도사는 나라의 허가를 받아

12개의 장생표를 세웠습니다.

 

그 중 양산군 백록리에 1085년에 세운

높이 166미터의 장생표가 보존되어 있습니다.

 

장생표 안에는 국가나 개인 소유의 토지는 없고

소유의 토지와 산판만 있습니다.

 

금강산 장안사의 경우에는 소유 토지가

경기 지방과 전라도, 황해도에까지 걸쳐 있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 말기에  

전체 토지가 약 62만결 정도가 되었는데,

사원이 소유한 사원전이 무려 10만결로서 

전체 토지의 약 6분의 1에 해당했다고 하니 엄청난 양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원전은 면세의 특혜가 있었습니다.

사원 재산에는 세금을 물리지 않았습니다.

 

<고려 시대 철불 부처님>

 

3) 수원승도

 

또, 일반 장정에게는 보수 없이 

국가의 노역에 동원되는 부역의 의무가 있었는데,

승려는 이것이 면제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찰의 특권을 이용하여

여러 가지 부정과 탈법이 나타났습니다.

 

농민들 중 많은 수가 절에 토지의 명의를 기탁하고 

토지에 부과되는 세금과 노역의 면제라는 2가지 혜택을 누렸습니다.

 

이러한 농민들을 절에 소속된 승도라는 의미에서

"수원승도(隨院僧徒)"라고 불렀는데, 

일종의 비승비속의 위장승려인 셈이었습니다.

 

고려 말에는 이들 위장승려인 수원승도를 포함한

승려의 수가 장정 전체의 3분의 1쯤 되었다고 합니다.

 

국가토지의 1/6이 비과세 토지이고,

전체 남자의 1/3 정도가 승려로서

노역 면제가 되는 상황으로 사원전과 승려의 숫자가 늘면 늘수록

특권을 누리는 사람이 많아져 국가의 재정을 압박해 나갔습니다.

 

게다가 이러한 사원 경제는 귀족들까지 뛰어들어

주물럭대는 이권 창고였고 재산 은닉 장소였습니다.

 

수많은 수원승도와 노비들을 거느린

큰 사찰과 권승들은 부패해 갔고,

수행의 목적상 출가하는 것이 아니라

부역 면제를 위해 출가한 많은 승려들은

일반인들처럼 민간에 들어가 계율을 어기고

풍속을 문란하게 하는 자들이 많아 사회 문제화되었습니다.

 

<고려 시대 철불 부처님>

 

4) 무신 정변

 

한편, 인종의 뒤를 이은 의종(고려 18대왕)은

자신이 총애하는 일부 문신과 승려들과 더불어

방탕한 놀음과 잔치로 날을 지새며

곳곳에 사치스러운 별장과 사찰을 세워 향락 장소로 사용하였습니다.

 

아울러 각종 주술적이고 기복적인 불사를 일삼아

제사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국고를 탕진하였습니다.

 

이렇게 민생고가 가중되고

민중들의 불만이 팽배해져 곳곳에서 폭발하는 가운데,

문신들에 의해 천대받던 무신인 정중부, 이의방 일파가

1170년 무신 쿠테타(정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습니다.

 

무신들의 쿠테타는 개경의 보현원이라는 절에서 발생했는데,

그 날도 왕은 절에 놀러와 씨름 구경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 무신이 씨름에 져서 문신들에게 모욕당한 것을 계기로

무신들이 쿠테타를 일으켜 왕과 문신들을 죽이고 정권을 잡았습니다.

 

무신들은 의종을 죽이고 명종을 세워 꼭두각시로 삼고

이의방의 딸을 태자빈으로 들여보내고 발호하였습니다.

 

강력한 무신 정권에 눌려 교종을 후원하던 왕실은 위축되고

권력을 독점적으로 틀여쥐었던 문벌 귀족은 몰락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