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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인물사

불교 인물사(23) - 해동화엄의 초조, 의상 대사(11) - 법성게(6)

by 아미타온 2024. 5. 14.

<불교 인물사(23) - 해동화엄의 초조, 의상 대사(11) - 법성게(6)>

 

<화려한 벚꽃으로 장엄된 용인 호암 미술관>

 

 

이다라니무진보(以陀羅尼無盡寶)     신묘한 다라니는 다함없는 보배이니

장엄법계실보전(莊嚴法界實寶殿)     온 법계 장엄하면 참다운 보배 궁전일세  

궁좌실제중도상(窮坐實際中道床)     마침내 실다운 중도 자리 앉게 되면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     옛부터 변함없는 그 이름이 부처로다. 

 

 

1. 이다라니무진보  장엄법계실보전

 

"신묘한 다라니는 다함없는 보배이니

온 법계 장엄하면 참다운 보배 궁전일세"

 

법성게의 마지막 게송이 시작됩니다.

 

 ‘다라니’는 ‘진실한 말’ 이란 뜻입니다.

 

흔히, '진언(眞言)'이라고 합니다.

 

반야심경을 독송할 때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등과 같이

그 뜻이 심오해서 인도 범어 그대로 독송하는 것을 진언(다라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와 같은 다라니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참된 진리의 말씀' 또는 '참된 진리의 깨달음'이라는 뜻입니다.

 

즉, 지금까지 의상 대사가 설한 '법의 성품에 대한 진리의 말씀'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존재(법)는 스스로의 성품 없이 인연되어 나타나는 '관계된 전체'라는연기법의 진실임을 깨달아서 그 깨달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은 연기법의 법의 성품을 깨달음은

신묘한 다라니와 같아서 쓰도 쓰도 끝없는 무궁무진한 보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무궁무진한 보배로서

진리의 세계인 법계(法界)를 장엄하면

극락처럼 화려한 보배로 장엄된 보배 궁전과 같다는 의미입니다.

 

 

2. 궁좌실제중도상  구래부동명위불

 

"마침내 실다운 중도 자리에 앚게 되면

옛부터 변합없어 그 이름이 부처로다."라는 뜻입니다.

 

마침내 우리가 법의 성품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중도(中道)의 실상을 증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중도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양극단에서 벗어나는 진리의 가르침입니다.

 

'나'와 '남'에 각각 집착하는 견해,

'하나'와 '여럿'에 집착하는 견해,

'쾌락'과 '고행'에 집착하는 견해 등등

하나의 고정된 극단에 집착하는 것이

바로 깨닫지 못한 중생의 인식과 삶의 모습입니다.

 

그렇지만, 의상 대사가 법성게에서 설한대로

존재(법)를 고립된 것으로 보고

다른 존재와의 관계성을 배제한 채 이해하는

망상을 버리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모든 존재는 관계와 인연을 통해 변화하며

상호 연관되어 있다는 연긱법의 존재의 본질(법성)을

지혜롭게 이해하고 자각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면 양 극단에 치우친 그릇된 인식에서 벗어나

연기법에 입각한 중도의 바른 인식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새삼스럽게 깨달아

새롭게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본래부터 부처였다는 것을 자각하게 됩니다.

 

즉, 내가 본래 연기법의 중도의 자리에 앉아 있는

부처였구나 라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법의 성품에 대한 대승적 인식의 전환을 통해

중생들을 제도하는 지혜와 자비방편의 실천을 거리낌없이 해 나갈 때

바로 중도의 자리에 앉게 되는 것이며

이미 부처와 다름없다는 것이 화엄경의 요체라는 것을 설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의상 대사는 '법성게'를 통해 화엄의 세계를

간결하면서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법성게의 가르침을 자주 수지독송하며

'법의 성품'을 연기법에 입각하여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내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