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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인물사

불교인물사(28) - 수선결사와 보조국사 지눌(4) - 청년 지눌의 고뇌와 주장

by 아미타온 2024. 5. 30.

<불교인물사(28) - 수선결사와 보조국사 지눌(4) - 청년 지눌의 고뇌와 주장>

 

<용인 호암 미술관>

 

이번 시간부터는 지눌 스님의 삶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은 고려 불교의 혼탁한 상황과

선종과 교종의 다툼 속에서

청년 지눌 스님의 고뇌와 주장에 대해 살펴 보겠습니다.

 

 

1. 지눌 스님의 탄생과 출가

 

지눌 스님은 고려 18대 왕인 의종 12년(1158년)

황해도 서흥에서 태어났습니다.

 

고려 시대 불교는 국가의 이념적 기반이자 국교였습니다.

 

왕은 정치적 결정이나 종교 의례에 관해서 승려의 자문을 구했고,

교단과 승려는 권력의 보호를 받으며 정치적, 경제적으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온 불교 교단은

대규모 토지를 소유하고 각종 이권에 개입함으로써 부를 축적했습니다.

 

불교 교단의 경제적 풍요는

재물과 권력에 대한 탐욕과 투쟁의 빌미를 제공했고,

이러한 세속화가 진전되면서 고려 불교는 급속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지눌 스님의 아버지 정광우는 지금의 국립대 교수직에

해당하는 국학 학정이었고 건실한 불교 신자였다고 합니다.

 

지눌 스님은 태어날 때부터 병이 있어 몸이 배우 허약했다고 합니다.

 

아버지 정광우는 아들 지눌이 어릴 때부터

병약한 것을 크게 근심하여 부처님 앞에서 빌면서 

지식의 병을 낫게 해 주면 부처님 전에 바치겠다고 서약했다고 합니다.

 

이 기도가 효험이 있었는지

지눌 스님의 병이 낫게 되었고

부처님께 서약한대로 지눌 스님을 출가시켰습니다.

 

이 때 지눌 스님의 나이가 여덟살이라고도 하고

열 여섯살이라고도 합니다.

 

출가한 나이는 여덟살이지만, 

정식으로 구족계를 받은 나이가 열 여섯 살일수도 있습니다.

 

지눌 스님은 어린 나이에 선승 종휘에게 출가했다는 기록만 전해질 뿐,

공부한 내력은 기록으로 전해지지 않습니다.

 

<고려 불화 - 수월관음도>

 

2. 승과에 합격한 지눌 스님의 주장

 

지눌 스님의 기록이 전해지는 것은

지눌 스님은 25살이 되던 해인 1182년(명종12) 무신정권 하에서 

관례에 따라 국가 승려 시험인 승과를 치루었고 시험에 합격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승과의 합격은 승려로서 출세의 관문이기도 했습니다.

 

승과에 합격하고 경력이 쌓이면 큰 절의 주지를 맡게 되고,

더욱 경륜이 쌓이고 이름이 나면 왕사나 국사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한편, 무신정변 이후 무신 정권은 문신 귀족 세력의 숙청과 함께

그들의 주요한 세력 기반이었던 화엄종, 법상종 등의 교종 세력을 탄압했습니다.

그리고, 교종과 대립하던 선종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편이었습니다.

 

정중부는 개경 남쪽에 있는 선종 사찰인 보제사를 중창했는데,

마침 이 보제사에서 승과 합격 축하 모임과 함께

담선 법회(선문답에 대해 논하는 자리)가 열렸습니다.

 

그 때의 보제사 법회에는 종파를 초월한 젊은 승려들이 많이 참여했습니다.

 

얼마 전에 치른 승과 시험에 합격하여

탄탄한 출세를 보장받은 젊은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대중방에 모여 들었습니다.

 

이 때 지눌 스님은 다른 또래의 승려 10여명을 모아놓고

토론을 벌리다가 열띤 어조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법회가 끝난 뒤 마땅히 명리(名利)를 버리고

산 속에 운둔해 뜻을 같이할 결사를 만들자.

늘 선정을 익히고 지혜를 닦는 일을 급선무로 삼아

예불과 경전 공부를 하면서 

직접 노동을 하여 각자 맡은 바를 이룩해 나가자." 

 

남의 복이나 빌어주는 행동을 하지 말고

승려 본연의 수행의 길을 가자는 것이요,

권력자에게 빌붙어 후원을 받는 것보다는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자는 취지였습니다.

 

지눌 스님의 이 말에 다른 견해를 말하는 승려도 있었고,

동조하는 승려도 있었습니다. 

 

<금동 십일면 천수관음보살상 (고려 시대) >

 

3. 혼탁한 세상을 보고 칩거한 지눌 스님

 

지눌 스님은 귀족 불교에 대한 선승들의 반감을 익히 알고 있었으며,

모든 승려들이 무신 정권의 발호를 개탄하는 분위기도 꿰뚫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와 같은 현실 조건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여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수행의 불교를 하자는 주장을 편 것이었습니다.

 

이 취지에 동감하는 승려들은 결사(수행 모임)의 이름을

"정혜사(定慧社)"라고 불렀습니다.

 

그 첫 출발의 의미는 있었으나,

구체적인 실행은 없었습니다.

 

한편, 지눌 스님이 개성 근처에 머물고 있를 적에

무신 정중부가 경대승의 손에 죽었습니다.

 

경대승은 정중부보다는 비교적 문신과 승려들을 존중하였으나,

무신들의 발호가 그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많은 선종 승려들은 경전을 무시하고

참선으로 어느날 문득 도를 깨달을수 있다는 자만에 빠져 있었습니다.

 

반면 교종 승려들은 지혜를 닦는 경전 탐구보다는

기복 불교로 치닫아 재를 올리고 천도하는 일을

축재의 수단으로 삼으면서 참 불법의 구현을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더우기 일부 승려들은 사주 관상을 봐주고 점을 쳐주는 무속과

민간 신앙에 지나치게 영합하여 명맥을 유지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교종과 선종 승려들은 서로 대립과 갈등이 심각했고,

서로가 서로를 무시했습니다.

 

지눌보다 100년 전에 왕자의 몸으로 출가한 대각국사 의천은

이러한 교종의 입장에서 선종을 회통하기 위해 천태종을 세웠으나,

서로간의 대립의 골은 아직 깊었습니다.

 

그리고, 기존의 왕실과 문신 귀족들과 연계된 기득권 승려들이

무신정권 하에서 승려들을 동원하여 무신 정권을 공격하다가

떼죽음을 당하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청년 지눌은 불교계의 비리와

승려들의 비틀거림을 냉철하게 지켜보았고

무신 정권이 모든 일을 폭력으로 밀어붙이는 짓 따위의

부조리로 뭉쳐진 세상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무신 정권 하에 전국 각지에서 빈민, 천민들이

일으킨 난으로 세상이 아주 어지러웠습니다.

 

지눌은 자신이 제안한 정혜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혼란한 개경을 벗어나 바리떼를 짊어지고

전라도 나주 창평면에 있는 청원사에 들어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