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45) 제13분 여법수지분(如法受持分) 6 - 목숨>
"수보리야, 선남자 선여인이
갠지스 강의 모래알만큼이나
여러번 자신의 목숨을 바쳐 보시했다 하더라도,
또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이해하여 의지하고 수행하며,
단지 네 구절만이라도 남을 위해 설명한다면
이로 인한 공덕으로 얻는 복이 더 클 것이니라."
1. 목숨의 소중함과 법(진리)의 소중함
제11분에서 부처님께서는
갠지스강의 모래알 수만큼 많은 칠보를 보시하는 공덕보다
금강경의 가르침을 수지독송하고
4구게만이라도 남을 위해 설해주는 공덕이 더 크다고 하셨습니다.
제13분에서는 그 비교의 대상을 물질인 칠보가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보시하는 예를 드셨습니다.
아무리 칠보가 귀하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목숨과 비교할 수 있을까요?
이 세상의 억만금을 주더라도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갠지스강의 모래알만큼이나
수없이 자신의 목숨을 바쳐 보시하는 공덕보다
금강경의 가르침을 수지독송하고 그에 의지해 수행해 나가고
그 가르침의 핵심을 남을 위해 설해주는 공덕이 더 크다고 하십니다.
부처님의 전생에 대해 적은 <본생담>을 보면
부처님께서 목숨을 버리시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보시행을 수행하기 위해서,
다른 중생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법을 구하기 위해서
부처님은 자신의 국토와 처자와 목숨까지
아낌 없이 버리면서 보시행을 하십니다.
부처님의 구도 정신과 보살심은
서슬 푸른 날처럼 날이 서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조그만 재물을 보시하는 것도 아까워합니다.
그러나, 불교는 자신의 국토와 처자와 목숨까지 아까와하지 않고
타인의 행복과 자신의 수행과 바른 법을 소중히 여기는 것을 봅니다.
2. 세속의 길과 진리의 길
부처님께서 초전법륜을 설하셨을 때
고행주의자였던 5비구가 1주일이라는 짧은 시간에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를 생각해 봅니다.
5비구가 그렇게 빨리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은 해탈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욕망, 이익, 가족, 목숨 등등
이러한 세속적인 것들을 추구하는 삶을 버리고
오로지 해탈의 길을 구하기 위해 출가하여 고행했습니다.
5비구는 해탈에 이르는 길을 몰랐기 때문에
잘못된 수행의 길에서 방황했지만,
부처님을 통해 해탈에 이르는 바른 길을 알게 되니
증득이 빨리 올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자신의 이익, 안락, 가족 등등
여러 가지 세속적인 삶을 붙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법을 이루는 길이 더디다는 생각을 합니다.
비슷한 이야기가 <성경>에도 나옵니다.
예수를 따르고 싶었던 부자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네가 가진 재산을 남김없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거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이야기를 들은 부자는 고민하다가
슬금슬금 자리를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그 모습을 보고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재산을 버리라는 말에 저렇게 괴로워하니
내가 자신을 버리라는 말을 하면 어떻게 될까?"
3. 나의 삶의 가치
부처님께서는 왜 목숨을 수없이 많이 보시하는 것보다
금강경의 가르침을 소중히 여기시는 것일까요?
왜 불보살님들은 바른 법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시는 것일까요?
왜 5비구는 자신의 세속적 욕망보다
해탈의 길을 추구하는 것일까요?
왜 예수님은 자신을 버리라고 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우리들은 어떤 가치를 추구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라는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칠보보다는 자신의 목숨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생의 소중한 목숨도 죽음에 이르면 끝입니다.
그 유한한 목숨도 내 생의 궁극적 목적과 가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진정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인가요?
초기 경전인 <파리증지부>에 다음과 같은 부처님 말씀이 남아있습니다.
"궁중의 영화도 건강한 이 육신도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이 젊음도
결국 나에 대하여 무엇을 가져올 것인가?
나는 병들고 언젠가는 늙어 죽음을 면할 수 없다.
젊음을 자랑하며 건강을 자랑하며 생존을 자랑하는 일은
적어도 생각 깊은 사람들에게는 무의미한 일이 아닐수 없다."
(파리증지부)
부처님과 같은 우리 삶의 실존에 대한 고뇌와 통찰이 있을 때에만
깨달음의 지혜를 자신의 재물이나 목숨보다 귀하게 둘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야지 배부른 돼지의 삶보다
배고프지만 고뇌하는 소크라테스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속적인 가치에 붙잡혀 살아가는 자신의 안일함을 반성하고
부처님의 진리의 가르침에 귀 기울일 때
그 가르침이 자신의 피가 되고 살이 될 수 있습니다.
<금강경>의 진리의 가르침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실로 법에 귀의하여
<금강경>의 가르침에 의지하고
이를 수지독송하며 타인을 위해 설해주는
법을 위한 삶, 법을 향한 삶의 가치의 무게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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