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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구경

법구경(69) 부처님의 마부였던 찬나 비구 이야기

by 아미타온 2024. 6. 21.

<법구경(69) 부처님의 마부였던 찬나 비구 이야기>

 

<카필라 성을 넘는 싯다르타 태자와 찬나>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시던 어느 때,

찬나 비구와 관련하여 게송 78번을 설법하시었다.

 

찬나는 부처님의 싯다르타 태자 시절 

속세를 포기하고 카필라 성을 떠나

수행 생활을 시작하던 때에 태자의 말을 몰았던 마부였다.

 

그 뒤 태자가 깨달음을 성취하여 부처님이 되시고 나서

찬나는 부처님에 의해 비구가 되었다.

 

그는 비구가 된 뒤 부처님과

개인적으로 가까웠던 것을 빙자하여

매우 거만하고 건방지게 굴며 거드름을 피웠다.

 

그는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주인께서 왕성을 떠나실 때

그분과 함께 숲으로 갔었지.

바로 그때 오직 나만이 주인님의 친구였을 뿐

그분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니까.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사리불이나 목련 등이

‘우리야말로 부처님의 으뜸가는 제자다.’ 라고 뽐내며

뜰 앞을 왔다 갔다 하는 꼴이라니.”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찬나를 부르시어 훈계를 하시곤 했는데,

이때마다 그는 조용히 그 말씀을 들었다.

 

그렇지만 부처님 앞을 물러나오면

다시 두 제자를 비웃거나 조롱하는 일을 그치지 않았다.

 

이 같은 일이 반복되었으므로

부처님께서는 세 번이나 그를 부르시어 엄하게 타이르셨다.

그래도 그는 행동을 고치지 않고 잘못을 되풀이하기만 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다시 그를 부르시어

이렇게 말씀하셨다.

 

 “친구여!

그들은 지혜와 덕이 매우 높은

성자 비구들로서 너의 훌륭한 친구이니라.

너는 마땅히 그들과 사이좋은 관계를 가져야 하느니라.”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다음 게송을 읊으셨다.

 

나쁜 친구와 사귀지 말고

비열한 자와도 사귀지 말라.

좋은 친구를 사귀고

덕 높은 성자와 함께하라.

 

<용주사 천불전>

 

부처님께서는 찬나에게

이렇게 여러 차례의 훈계와 충고를 해 주었다.

 

그러나, 찬나는 부처님의 그런 경책을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해서 비구들을 험구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찬나의 이런 버릇은

당신께서 생존해 있는 동안에는 고쳐지지 않고

당신께서 열반에 드신 다음에야 고쳐지리라고 말씀하셨다.

 

그 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는 날 저녁

부처님께서는 아난 존자를 부처님의 침상 옆에 부르시어

찬나에게는 아무도 그와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

무시해 버리라는 처벌을 내리라고 이르셨다.

 

그런 다음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셨는데,

찬나는 부처님께서 자신에게 그런 처벌을 내리시고

입멸하셨다는 것을 알자 크게 뉘우치며 세 번이나 기절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자기의 허물에 대해

용서해 줄 것을 비구들에게 빌어 마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의 모든 행동과 표정은 바뀌었으며,

좌선 수행에도 열성을 보여서 마침내 아라한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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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용주사>

 

1. 교만과 거만

 

'교만'과 '거만'은 비슷한 말 같지만 차이가 있습니다.

 

잘난체 하며 뽐내고 건방진 것을 '교만'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교만이 지나쳐서 외적인 행동으로

남을 업신여긴다든지 거들먹거리는 것을 '거만'이라고 합니다.

 

겸손하고 교양있게 보이는 사람들도

마음 속은 교만한 데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미모가 뛰어나거나,

머리가 총명하거나,

학교 성적이 뛰어나거나,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했다던가

겉으로는 점잖고 품위있게 처신한다 해도

마음속에는 자신만 못한 사람들을

교묘히 또는 지능적으로 업신여기고 우습게 보는 마음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은연 중에 남의 위에 서려고 하고,

양보를 안 하려고 하거나,

그 사람들을 슬그머니 누르고 이끌고 가려는 ‘보스’ 심리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교만이 지나치면 거만한 태도로 나타나게 되고,

노골적으로 상대방을 업신여기고 모욕하고 굴욕을 주고 자하는

무례함과 상스러움과 거들먹거리는 행동을 나타내게 됩니다. 

 

그래서, 거만한 사람은 

‘눈이 높다’, ‘콧대가 세다’, ‘어깨에 힘을 준다’, 

‘팔자걸음으로 거드름을 핀다’ 등과 같은 말들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말투나, 얼굴표정, 눈매, 목소리,

걷는 방식, 웃는 모양, 손짓, 몸짓에서

거덜먹거리고 볼상사나운 꼴불견의 모습을 나타내게 됩니다.

 

<용주사 대웅보전 삼존불>

 

2. 거만했던 찬나에 대한 부처님의 자비

 

찬나는 부처님이 싯다르타 태자였을 때 

말을 모는 마부였습니다.

 

마부였으므로 높은 신분은 아니었지만,

어릴 때부터 싯다르타 태자의 말을 몰며

동고동락했던 친구였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출가하기 전에

카필라성을 빠져 나갈 때

찬나를 깨워 말을 타고 나갔을 정도로 친한 사이였습니다.

 

세상의 공경을 한 몸에 받으시는

부처님의 태자 시절 "부처님의 마부다"는 자부심이

정도를 넘어 거만해져서 사리불 존자나 목련 존자마저

업신여기고 조롱하는 정도였습니다.

 

그 세도와 거덜먹거림이 얼마나 대단했을지

그리고 교단 내에서 얼마나 밉상이었을지가 상상이 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찬나 비구를

교단에서 내치지는 않으셨습니다.

 

거만한 찬나 비구였기에

눈꼴 사납고 교단 여기저기서 문제를 일으키셨지만

부처님은 어릴 때부터 자신을 도와주고 동고동락했던

찬나 비구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거만함이라는 병에 걸린

찬나 비구가 부처님의 열반 후에

수행과를 성취할 인연이 있슴을 아셨으며,

5역죄에 해당하는 파계 행위가 아니라 거만하다는 이유만으로

교단에서 내칠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셨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 찬나 비구에게 자주 충고와 훈계를 하셨습니다.

 

지혜와 덕이 높은 성자들과 같은

좋은 친구들을 비난하고 험담할 것이 아니라

이들에게 가르침을 청하고 친하게 지내면서

자신도 함께 향상하고 발전하라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충고와 훈계를 받았지만,

찬나 비구의 거만함이라는 병은 

부처님께서 살아계실 때는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기 직전

아난 존자가 찬나 비구의 처리 문제를 이야기했을 정도로

찬나 비구는 교단에서 아주 밉상이었고 골치덩어리였던 모양입니다.

 

부처님은 찬나 비구에 대해 당신께서 열반에 드신 후

'성스러운 왕따'를 하라는 벌을 내리셨습니다.

 

아난 존자는 찬나 비구를 찾아가서 

부처님의 열반 소식과 성스러운 왕따의 벌에 대해 전했을 것입니다.

 

자신에게는 하늘이요 땅이요 자부심의 근원이었던 부처님의 열반,

그 자체도 충격이었겠지만 부처님께서 자신에게 내린 벌도 또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경전의 기록에 의하면 아난 존자를 만나

이 소식을 들은 찬나 비구는 

정신을 잃고 까무라치고 기절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찬나 비구는 비록 거만했지만, 

부처님에 대한 존경과 애정은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자신에게는 하늘이요 땅이었던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의 허전함과 공허함,

그리고 부처님이 열반 후까지 자신을 염려하고

내리셨다는 벌에 대해 깊이 자각하고

그 후로는 사람이 180도로 달라져서 수행에 정진하여

아라한과에 도달하였다고 경전에서는 전합니다.

 

탐욕이 정도를 넘어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살인을 하게 되면 문제가 커집니다.

 

교만함도 정도를 넘어 거만해져서

거덜먹거리거나 남에 대한 험담, 조롱을 하게 되면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교만함이 정도를 넘어 거만함으로

거들먹거리거나 남을 업신여기는

악한 행동이나 악한 말을 하는 것은 없는지를 살펴서

이를 없애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든...

자신과 동일시하는 어떤 위대한 존재에 대한 자부심이든...

그 자부심이 정도를 넘어 비정상적으로 굴절되어 나타나는

거만함이라는 악덕의 출발은 이기심입니다.

 

그 이기심마저 극복한다면 성자이겠지만,

처음부터 이기심을 극복하겠다고 나가는 것은 힘듭니다.

 

자신이 무엇 때문에 거만한 것인지를 통찰하고,

자신의 거만함이 어떠한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는지를 통찰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행동과 말을 없애는 노력을 통해

실질적인 성과를 내려는 노력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