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구경(71) 8일만에 아라한이 된 빤디따 사미 이야기>
부처님께서 기원정시에 계시던 어느 때,
어린 사미 빤디따와 관련하여 게송 80번을 설법하시었다.
빤디따는 사왓티에 사는 큰 재산가의 어린 아들이었다.
그는 일곱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사미(동자승)가 되었다.
그는 사미가 된 지 8일째 되던 날
사리불 존자를 따라 탁발을 나가다가
어떤 농부가 자기 논에 물을 끌어대는 것을 보고
사리불 존자에게 이렇게 여쭈었다.
“존자님!
인식 기능이 없는 물은
누구든지 원하는 곳으로 끌어댈 수가 있습니까?”
“그렇다.
그것은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끌어댈 수 있느니라.”
사리불 존자와 빤디따 사미는 탁발을 계속하여 가던 도중
이번에는 대나무로 화살을 만드는 사람이 대를 불에 가까이 대어
구부러진 화살을 바르게 펴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다음에는 목수가 톱으로 나무를 잘라서
수레바퀴와 같이 사람에게 유용한 물건을 만드는 것도 보았다.
그때 빤디따 사미는 혼자 생각했다.
‘인식 기능이 없는 물이지만
농부가 그것을 끌어대면 곡식을 자라게 하고,
구부러진 대나무 역시 인식 기능이 없지만
불에 가까이 대면 바르게 펴지고,
나무도 인식 기능이 없는 것은 마찬가진데
마침내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 된다.
그렇다면 나는 인식 기능을 가진 사람으로서,
어찌 마음 하나를 다스려
내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의 현상을
놓치지 않고 관찰하는 위빠싸나와 사마타(집중) 수행하지 못한단 말인가?’
이렇게 자책을 한 그는 그 자리에서 바로
사리불 존자의 허락을 받아 수도원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는 자기 방문을 잠그고 앉아서
자기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에 마음을 집중시키는 수행에 몰두했다.
이때 삭까 천왕과 그 밖의 천신들이
빤디따 사미의 수행을 돕기 위해서
수도원의 안과 밖을 아주 조용하도록 지켜 주었다.
이같이 하여 빤디따 사미는 점심시간 전에
이미 아나함 과를 성취하였다.
바로 이때쯤 사리불 존자는 빤디따 사미의
점심을 가지고 돌아와서 그의 방 문 밖에 서 있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신통력으로써
지금 빤디따 사미가 아나함 과를 성취하였다는 것과,
여기서 쉬지 않고 계속 정진해 나가면
곧 아라한 과까지 성취하여 수행을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을 아셨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사리불 존자가
빤디따 사미의 방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그곳에 가시어 짐짓 사리불 존자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하심으로써 시간을 지체시키셨다.
두 분 사이에 이런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빤디따 사미는 아라한 과를 성취하였다.
그래서 빤디따 사미는 실로 수행을 시작한 지
8일만에 아라한이 되었던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와 관련하여 수도원에 머무는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누구나 진지하게 담마(위빠싸나)를 수행하면
삭까 천왕을 비롯한 많은 천신들이 그를 도와주고 보호하느니라.
여래 또한 사리불과 대화를 나눔으로써
그가 빤디따의 방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여
그의 수행이 계속되도록 도와 아라한이 되게 하지 않았느냐?
빤디따는 농부가 자기 논에 물을 대는 것,
화살 다루는 사람이 구부러진 화살을 바로잡는 것,
그리고 목수가 나무로 수레바퀴 따위를 만드는 것을 무심히 보지 않고
경책으로 삼아 자기 마음을 잘 다스리는 불법의 진리를
열심히 수행하여 마침내 아라한이 되었느니라.”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다음 게송을 읊으시었다.
농부는 물길을 내어 물을 대고
화살깃 대는 사람은 굽은 화살을 바르게 펴며
목수는 나무를 다루어 수레바퀴를 만들고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마음을 다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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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독교와 불교
기독교 성경(바이블)의 첫 구절은
"태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다."입니다.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기독교의 문에 들어가는 알파요 오메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의지를 믿지 않는다면
기독교라는 문 안으로는 결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만큼 기독교인에게 있어 하나님의 말씀과 의지를 믿느냐는
최고의 의미와 가치를 지닙니다.
불교인에게 있어 "태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다."와 같은
의미와 가치를 가지는 말은 무엇일까요?
불교인의 바이블인 <법구경> 제일 첫 구절에 나오는 말씀인
"마음이 모든 것의 근본이 되고 주인이 된다."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불교에서는 마음의 힘을 매우 중시합니다.
마음의 힘이야말로 극락과 지옥,
부처와 중생을 가르는 근원적인 힘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결과를 이루는 가장 결정적인 동인으로 작동한다면
불교에서는 마음의 힘이야말로 결과를 이루는 가장 결정적인 동인입니다.
2. 마음의 힘
왜 마음의 힘이 결과를 이루는 가장 결정적인 동인일까요?
마음이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에 물들어 있다면
그 말과 행동이 악해져서 그 결과 괴로운 과보를 받을 것이고,
마음이 자비와 평안과 지혜로움 속에 있다면
그 말과 행동이 선해져서 그 결과 행복한 과보를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생각(마음)의 업, 언어 생활의 업,
행위의 업을 통해 선업과 악업으로 갈라지는데,
특히, 생각(마음)의 업이 말과 행동의 업을 유발시키고
선과 악을 가르는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우리는 보살도 되고 중생도 되고,
선인도 되고 악인도 되고,
행복하거나 불행하게 되고,
지혜롭거나 어리석어집니다.
이 여의주와 같은 마음의 힘과 능력,
마음 공부의 중요함을 얼마나 자각하고 있느냐가
불교 수행자에게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3. 마음과 수행
한 어린 사미가 있었습니다.
"인식 기능이 없는 물이지만
농부가 그것을 끌어대면 곡식을 자라게 하고,
구부러진 대나무도 역시 인식 기능이 없지만
불을 가까이 대면 바르게 펴지고,
나무도 인식 기능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목수가 다루면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인식 기능을 가진 사람으로서,
어찌 마음 하나를 못 다스려
내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의 현상을 놓치지 않고
관찰하는 위빠싸나와 사마타를 수행하지 못한단 말인가?"
이러한 자각은 마음의 힘과 능력,
마음 공부의 중요함을 자각한 사람의 입에서만
나올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물은 곡식을 자라게 하는 효용과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나무는 화살이 되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무는 유용한 수레바퀴가 되어 우리 삶을 윤택하게 할 수 있습니다.
마음도 자신이 어떻게 제어해서 쓰는가에 따라
우리를 보살의 길, 부처의 길로 인도합니다.
그런데, 마음은 이 마음에서 저 마음으로 항상 변합니다.
이렇게 변하는 마음이므로
제어하는 것이 어렵고 힘든 것이 또한 마음입니다.
농부가 물길을 만들어 물을 제어하고,
장인이 불을 이용하여 대나무를 제어하고,
목수가 나무를 다루는 기술을 통해 나무를 제어하듯,
제어하기 힘든 마음을 어떠한 기술을 통해 제어하여
이고득락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길이 바로 수행입니다.
어린 사미는 위빠사나와 사마타라는 수행의 기술을 통해
마음을 확고히 잡아서 수행의 완성을 보았습니다.
마음 하나를 잡음으로써 더 이상 불안과 회의,
욕망과 분노에 흔들리지 않는 위대한 아라한이 된 것입니다.
기도를 하는 수행자는
오롯한 믿음의 마음을 통해 이러한 길로 접어듭니다.
자신의 의지처에 대한 오롯한 믿음을 통해
변하기 쉬운 마음을 확고히 잡는데 성공합니다.
대승보살은 보시를 비롯한 6바라밀 수행을 통해
사랑하는 마음, 가엾이 여기는 마음, 기뻐하는 마음,
집착없는 마음을 계발합니다.
불안, 회의, 탐욕, 분노로 변하기 쉬운 마음을
자비희사의 4가지 무량한 마음으로 갈고 닦아
중생을 구제하고 세상에 유익을 줍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린다."
"마음이 모든 것의 근본이고 주인이 된다."
마음 공부를 하는 불교 수행자가
바이블의 첫 구절처럼 마음에 새겨야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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