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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인물사

불교인물사(39) - 수선결사와 보조국사 지눌(16) - 수선 결사를 계승한 혜심 스님

by 아미타온 2024. 7. 15.

<불교인물사(39) - 수선결사와 보조국사 지눌(16) - 

수선 결사를 계승한 혜심 스님 >

 

< 송광사 16국사전에 모셔진 진각국사 혜심 영정>

 

지눌 스님의 수선결사는 지눌의 사후에도 이어졌습니다.

지눌 스님 사후 수선결사를 계승한 제2대 조사는 혜심 스님입니다.

 

혜심 스님은 화두를 탐구하는 화두선을

중심으로 하는 수선(修禪)에 매진하였습니다.

 

화두선을 중심으로 선불교는

오늘날 우리 한국 불교 주류인 조계종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지눌 스님의 수선결사를 계승한

혜심 스님을 통해 지눌의 결사 운동이 어떻게 계승되고,

화두선을 중심으로 하는 선불교의 전통이

혜심 스님 대에 어떻게 성립되었는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한편, 지눌 스님의 수선결사와

거의 동시대에 백련 결사 운동이 있었습니다.

 

출가 승려 중심의 수행 운동인 수선결사에 비해

참회와 극락 왕생을 모토로 일반 백성들과 함께 한

염불 신행 결사 모임이 바로 백련 결사였습니다.

 

지눌 스님과는 다른 불교 개혁 노선을 갖고 있던

천태종의 요세 스님이 중심이 된 신행 결사 운동입니다.

 

지눌 스님의 수선 결사와는 다른 차별성을 가진

백련 결사의 성격에 대해서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혜심 스님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혜심 스님이 수행했던 산청 단속사지>

 

(1) 지눌 스님과의 만남

 

지눌 스님은 53세의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눌 스님의 뒤를 이어 수선결사를 이끈 분이 혜심 스님입니다.

 

혜심은 전라도 화순 출신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호족 출신으로 향공과(지방 사람들이 보는 과거)를 거친 진사였습니다.

 

혜심 스님은 청년기에 벼슬을 꿈꾸며

과거 준비를 위해 사마시에 합격하고,

수도 개경에 있던 태학에서 유학 공부에 열중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현실의 명예와 이익을 버리고

불교에 귀의하여 도를 닦을 생각을 내었습니다.

 

그는 당시 무신 정변으로 혼란했던 개경에는

다시는 발을 들이지 않기로 맹세하고 

1202년 지눌이 머물던 길상사(현 순천 송광사)로 찾아갔습니다.

 

혜심 스님은 길상사 입구에 이르자

차 끓이는 냄새를 맡고 딴 세상에 온듯 감격하였다고 합니다.

 

혜심 스님은 지눌 스님을 만나자 "노스님을 만난 것 같다"는 시를 지었습니다.

그 시를 지눌 스님에게 바치자 지눌 스님은 자신이 쓰던 부채를 혜심에게 주었습니다.

두 사람이 사제지간이 된 것입니다.

 

혜심 스님은 부채를 받아들고 감격에 겨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습니다.

 

"부채가 옛 적에는 스승의 손 안에 있더니

지금은 제자의 손바닥에 왔구나.

뜨겁고 바쁜 마음 미친듯이 달리면

이 부채로 맑은 바람을 일으켜도 좋으리."

 

이 일화를 두고 사람들은 지눌 스님이

자신이 만든 결사를 혜심에게 당부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혜심은 스승의 가르침으로 자신의 마음의 뜨겁고 바쁜 마음을

맑은 바람으로 잠재우겠다는 시를 썼지만,

바로 결사 운동에 새로운 바람을 예고하는 외침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루는 지눌이 짚신을 가리키며 혜심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신발은 여기 있는데, 사람은 어디 있는가?"

 

혜심이 대답했습니다.

 

"왜 그 때 보시지 않았습니까?"

 

신발과 주인을 찾는 물음 속에는

진심(眞心)을 찾는 은유가 담겨 있습니다.

 

그 때 보지 않았느냐는 답변 속에는

진심이 항상 두루하고 있다는 재치가 돋보입니다.

 

그 후로 지눌 스님은 혜심을 큰 그릇으로 여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느날 지눌 스님이 "개에게도 불성이 없다"는 화두를 들어

대중에게 이르니 오직 혜심 스님만이 만족하게 대답하였습니다.

 

이에 지눌은 혜심을 불러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그대를 얻었으니 한이 없네.

그대는 불법을 소임으로 삼아

처음 뜻한바 서원을 결코 바꾸지 말라."

 

혜심 스님은 유학과 불교 경전을 두루 거친

학자의 면모를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수선사에 온 이후로는

선(禪)의 가르침에 깊이 빠져 들었습니다.

 

1208년 지눌은 혜심 스님에게

수선사의 법석을 이어줄 것을 권하였으나

혜심은 끝내 사양하였습니다.

 

스승인 지눌 스님이 입적한 후에도

지리산 단속사에 칩거할 뿐 세상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산청 단속사지 석탑>

 

(2) 수선 결사를 계승한 혜심 스님

 

그러나, 왕의 칙명과 문도들의 간곡한 청 때문에

1210년 수선사의 제2대 법주가 되었습니다.

 

그 때 혜심의 나이 33세였습니다.

 

혜심 스님은 스승 지눌과 사상적 궤적을 달리하는 이론을 세웠는데,

바로 '무심(無心) 이론'입니다.

 

혜심 스님은 다음 명제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고 합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모두 똑같이 눈이 있고 귀가 있고 코가 있는데,

왜 어떤 사람은 부자로 살고 귀한 자리를 얻으며

어떤 사람은 가난하고 천하며,

어떤 사람은 잘 생기고 어떤 사람은 못 생겼는가?'

 

이 명제를 궁구하고 혜심 스님은 다음과 같이 설파하였습니다.

 

"사람의 본디 성품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아

흰 종이처럼 아무것도 쓰여지지 않는 백판이다.

사람의 성품은 자라는 환경이나 배우는 정도에 따라 형성된다.

이에 따라 선하게도 되고 악하게도 되며,

우매하기도 하고 지혜롭기도 한다."

 

공자는 <논어>에서

"먼저 흰 바탕이 있어야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

 

혜심의 무심 사상은 스승인 지눌의 "진심(眞心)"에

공자의 유가적 사상이 결합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혜심 스님은 사람은 흰 종이같은 성품이지만,

배우는 정도와 환경에 따라 성품리 결정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스승인 지눌 스님처럼 인간의 평등을 강조하면서도

공부하는 자세와 배움의 중요성을 보다 강조하였습니다.

 

그는 <죽존자전(竹尊者傳)>을 지어

절개를 굳건하게 지키는 수행자를 대나무에 비유했고,

<빙도자전(氷道者傳)>을 지어 구도자를 냉철한 얼음에도 비유했습니다.

 

투철한 신념과 냉철한 이성을

'대나무'와 '얼음'에 비유하여 수행자의 공부 자세를 강조하였습니다.

 

<산청 단속사지>

 

3. 선문염송과 화두선

 

또한, 혜심은 <선문염송>이라는 중요한 저술을 지었습니다.

<선문염송>은 선문답의 모음집입니다.

 

중요한 선의 일화 1,125개를 제시하며

화두의 사례, 깨달음의 인연,

그리고 나름의 해석을 깃들여 화두선의 대의를 요약한 책입니다.

 

이 책은 오늘날에도 불교 강원에서 공부하는 주 교재로

후대 화두선을 참구하는 한국 선불교의 성립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선문염송>을 지어 화두를 참구하는 화두선을 주수행으로 삼아

수선 결사의 제자들의 수행을 지도하였습니다.

 

혜심 스님은 지식인, 독서층의 폭넓은 지지를 받아

그의 문하에는 유학자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로 들끓었습니다.

 

오늘의 송광사인 수선사는 지눌 스님이 살아있을 때보다 더 번창했습니다.

지방 향리층과 많은 지식인층까지 흡수하여 지지기반을 넓혔던 것입니다.

 

그래서 수선사의 규모는 더 커졌습니다.

 게다가 최씨 무신 정권의 최고 지도자인  최우도

아버지 최충헌의 뒤를 이어 선종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최우는 아버지보다 약한 정치 기반을 만회하려는 의도로

수선사에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최우는 자신의 두 아들을 수선사에 출가시켜

혜심 스님에게 맡길 정도였습니다.

 

수선사는 이러한 국가 권력의 지원에 힘입어

전국 불교 교단을 총괄하는 수준까지 발전하였습니다.

 

혜심은 말년에 지리산 단속사, 월남사 등으로 옮겨다녔으나,

끝까지 정혜(수선) 결사의 중심 지도자로 추앙 받았습니다.

 

수선사는 1208년 고려 의종의 지시에 따라 송광사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송광사는 지눌 스님, 혜심 스님의 뒤를 이어

무려 16국사를 배출하였는데 이것은 유래가 없던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불보 사찰 통도사, 법보 사찰 해인사와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승보 사찰로 꼽힙니다.

 

혜심 스님이 살았던 시대는 최충헌 이후

4대를 걸친 최씨 무신 정권의 시대였습니다.

 

최씨 무신 정권 후반기에 약 30여년에 걸쳐

6차례에 걸친 몽고의 침입으로 고려의 국토는 초토화되었습니다.

 

정치적 혼란과 전란의 시기에 사회 경제적으로 궁핍이 극에 달했고,

사회 질서와 윤리 도덕이 무너진 매우 암울한 혼란기였습니다.

 

이러한 시대 상황 속에서 지눌 스님의 결사 운동을

계승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눌 스님의 수선 결사를 혜심 스님이 계승하고

수행적 체계를 재정립함으로써 수선 결사가 계속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호부에 견자 없다고, 훌륭한 스승에 뛰어난 제자였던 것입니다.

 

지눌 스님의 수선 결사는 현실 참여에 소극적이었고,

출가 승려 중심의 수행 운동이었다는 비판도 받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정치, 사회적 혼란기,

특히 전란 속에서도 불교 본연의 자세인 수행에 뜻을 두고

대를 이어가며 결사 운동을 계승되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예전에 조계종 종조(宗祖)를 보조국사 지눌 스님으로 보아야 하는지,

고려말에 중국에서 유학하여 임제선을 전파한 태고 보우 대사로

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뜨거웠습니다. 

 

아무튼 오늘날 조계종의 화두선 전통을 살펴볼 때

지눌 스님을 계승한 혜심 스님의 영향력은 참으로 크다고 생각합니다.

 

혜심 스님의 선불교는 스승 지눌과 비교했을 때

화두선의 경향이 농후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눌 스님은 정혜 쌍수를 주장했지만,

화두선 일변도는 아니었습니다.

 

돈오 점수를 말씀한 것처럼 선정과 지혜를 닦는

포괄적인 신행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혜심 스님은 화두선에 의한 수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눌 대에 비해 선종 우월적인 측면에서

마음을 깨치는 수행법을 찾았는데,

화두선이 중심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조계종은 선불교를 표방하고 있고,

특히 화두선 중심의 선불교를 표방하고 있습니다.

 

그 전통의 출발에는 <선문염송>을 지은 혜심 스님이 있습니다.

한국 불교에서 가장 유명한 화두가 '무(無)"자 화두라고 합니다.

'무'자 화두를 특히 강조한 것도 혜심이었다고 합니다.

 

현재의 한국 불교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분이 혜심 스님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