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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인물사

불교인물사(40) - 수선결사와 보조국사 지눌(17) - 백련 결사와 원묘국사 요세 스님

by 아미타온 2024. 7. 17.

 

<불교인물사(40) - 수선결사와 보조국사 지눌(17) - 

백련 결사와 원묘국사 요세 스님 >

 

<요세 스님이 결사 운동을 일으킨 강진 백련사>

 

1. 요세 스님의 삶

 

지난 시간에 지눌 스님의 수선(정혜) 결사를 이어받은

혜심 스님에 대해 살펴 보았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수선 결사와 동시대에

전라도 강진 백련사에서 일어난 백련 결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백련 결사를 만든 분은 원묘 국사 요세 스님입니다.

지눌 스님과 동시대에 살았던 분입니다.

 

요세 스님은 경상도 합천 출신입니다.

 

요세 스님은 천태종 도량에 출가하여

천태 교학을 배우고 승과에 합격했습니다.

 

그는 승과에 합격한 뒤에도

천태학 연구에 몰두하였으며

대각 국사 의천 스님이 선교일치를 표방하고 개창한

천태종의 종지를 받들었습니다.

 

요세 스님은 1185년의 봄,

천태종 사찰인 개경 고봉사에서 열린 법회에 참석했습니다.

 

 요세 스님도 지눌 스님처럼 세속의 명리를 좇으면서

한점 자기 성찰이 없는 승려들의 작태를 보고 실망했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신앙 결사에 뜻을 두었습니다.

불교의 타락상을 몸소 겪으며 비판 의식을 갖고

새로운 결사 운동을 다짐하였습니다.

그것은 지눌 스님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열성적으로 동지를 찾았고

10여명의 동지를 어렵게 얻었습니다.

그는 용기가 솟아나서 동지들과 함께 이리저리 만행을 거듭하였습니다.

 

1198년 그는 동지들과 함께 청도의 장연사에 이르렀습니다.

요세와 동지들은 장연사에 머물기로 하였습니다.

 

요세 스님은 한 때 수선사로 지눌 스님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고

선을 체험하기도 하였습니다.

 

지눌 스님은 요세 스님에게

"어지러운 물결로 달이 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니

골방에서 등불을 다시 밝혀라."라는 시를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요세 스님은 혜심 스님과는 달리

수선사에서 흡족함을 느끼지 못했고 그 곳에서 발길을 돌렸습니다.

 

<만덕산 백련사>

 

2. 백련 결사

 

요세 스님 일행은 청도 장연사에서 백련 결사를 선언하였습니다.

 

결사 이름을 "백련결사"라고 이름붙인 이유는

중국의 염불 불교 결사 운동을 본받은 것이었습니다.

 

동진 시대인 384년 중국의 혜원 스님은 여산을 지나다가

그곳에 흠뿍 빠져 그 산 자락에 있는 동림사에 머물렀습니다.

 

그 곳에 주석하니 많은 사람들이 그의 문하로 모여들었습니다.

혜원 스님은 이들 123인과 함께 바른 정업과 염불 수행을 닦아

극락 정토에 나기를 서원하고 염불에 열중하였습니다.

 

염불당 앞 연못에 흰 연꽃이 피었기에

그 곳을 '백련사(白蓮社)'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이들의 신앙 결사 모임을 후세 사람들은 '백련결사'라 하였습니다.

염불을 중심으로 참 수행에 정진하여 극락 왕생하자는 운동이었습니다.

 

요세 스님은 중국의 백련 결사와 같은 신앙 결사를 만들고 싶었던 것입니다.

요세 스님은 영암의 약사암에서 공부와 염불 수행에 정진하였습니다.

 

요세 스님은 천태종의 종지를 설법하다가 <관무량수경>의

"이 마음이 부처를 만들고, 이 마음이 부처다"라는 대목에서

시원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요세 스님은 궁리를 거듭한 끝에 처음의 뜻대로

천태학과 정토의 가르침을  백련 결사의 사상적 기저로 삼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법화경을 바탕으로 한 참회법과

정토 신앙을 실천 수행의 핵심으로 설정하였습니다.

 

법화경을 열심히 읽고 자신의 업장을 참회하고,

'나무아미타불' 염불하여 서방 정토에 태어나기를 염원했습니다.

 

요세 스님은 1216년 영암 이웃 고을인 강진의 호족들의 지원을 받아

만덕산 마루에 있는 퇴락한 사찰인 만덕사를 80여칸으로 중창하고

여기에 머물며 본격적으로 '백련 결사'를 시작했습니다.

 

<강진 백련사 대웅보전 삼존불>

 

3. 백련 결사의 취지와 수행의 길

 

만덕사는 다산 정약용이 머물렀다는

다산 초당 뒷편에 있는 지금의 백련사입니다.

 

백련사는 바다가 바라다보이는 산마루에 있어

갈아 경작할 토지도 주변에 별로 없어 가난했습니다.

 

가난 속에서도 요세가 백련사에 머물 때

시주로 들어온 물건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 

자신의 소유물이라는 옷 세벌과 발우 하나뿐이었다고 합니다.

 

백련 결사는 수선 결사사보다 세상의 관심은 덜 끌었지만, 

청정한 염불 수행의 백련 결사는

주변 고을 호족들과 민중들의 열띤 호응이 뒷따랐습니다.

 

요세 스님은 날마다 천태의 지관수행법으로 참선하고,

법화경 1부를 외우면서 53불께 참회 의식을 행하고

준제진언 1천 번,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1만번 염송하였다고 합니다

.

그리고, 참회 의식을 할 때는 매우 진지하여

폭염이나 한파 속에서도 치열하게 참회의식을 해서

선종에서는 요세 스님을 "서 참회(요세의 성은 서씨였다.)"라고

말할 정도로 진지하였다고 합니다.

 

요세 스님은 50년간 개경땅을 밟지 않겠다고 할 정도로

세속 권력자들을 멀리하였습니다.

 

요세 스님이 남원 태수의 요청에 따라

한때 남원의 한 절에 머물자 강진의 백련사 신도들이

"구름 사이에서 선정 삼매에나 들어 노시려는가?"라고 하며

백련 결사의 재개를 강력히 요구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백련사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문호를 활짝 열어 300여명이 결사에 등록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그 열광적인 신앙 운동에 휩싸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천태종의 교리가 너무 방대하여

대중들이 접근하기 힘들다고 하여

요세는 천태종의 교리를 간추려

<삼대부절요>라는 요약본을 간행하여 보급하였습니다.

 

백련사는 중앙의 지배 권력에 결탁하지 않고

오로지 지방 민중의 기반 위에서 성장하며 불교 대중화에 힘썼습니다.

 

백련사의 성장은 중앙 권력의 관심을 끌게 되어

요세 스님의 말년에는 요세 스님에게 선사의 칭호를 내리고

새해마다 선물을 보내 주었고, '원묘 국사'로 추증하였습니다.

 

<강진 백련사 대웅보전 현판>

 

4. 백련 결사에 대한 평가

 

지금도 전남 강진 백련사에는 백련 결사의 향기가 남아 있습니다.

백련 결사는 지눌 스님의 수선 결사와 더불어

고려의 두 개의 유명한 결사(수행 모임) 운동이었습니다.  

 

수선 결사가 출가 승려 위주의 참선 수행 운동이라면

벡련 결사는 천태 사상을 기저로 하여 참회와 정토 왕생을 모토로

일반 백성과 함께 한 훨씬 신앙적이고 대중적인 불교 수행 운동이었습니다.

 
개혁 노선의 차이이며 불교 철학의 차이인데,
당시 시대 분위기로 보자면

요세 스님이 훨씬 파격적이며 개혁적인 성향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소수 출가 엘리트들만이 아닌

일반 민중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이들을 포용한 

요세 스님의 백련 결사가 현대에 계승할 부분이 많다고까지 이야기합니다.

 

천태종에서는 '천태 지관'이라는 독특한 지관(선정) 수행법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천태 지관 수행법을 통해 선정을 닦는 수행 방식이 아니라,

철저한 참회와 극락에 태어나고자 하는 염불을 통한 수행 공동체를 만든 배경에는

일반 민중들을 이끌기 위한 요세의 큰 자비심과 고뇌에서 연유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세는 원효 스님을 많이 존경했다고 합니다.

 

요세 스님은 원효 스님이 극락 왕생을 권유하는 노래인

<징성가(澄性歌, 성품을 맑게 하는 노래라는 의미)>를 독송하며

그 뜻을 음미하며 마지막 열반에 들었다고 합니다.

 

대중 교화를 위해 거사의 삶을 살았던  원효를 깊이 존경하며

원효 대사의 민중과 함께 하는 삶을 추구했다고 생각합니다.

 

동시대를 살았지만 서로의 노선과 철학의 차이로 다른 길을 걸었지만,

수행으로 불교가 바로 서야 한다는 인식은

지눌 스님이나 요세 스님은 두 분 모두 같았다고 생각합니다.

 

두 분의 정신을 이어받아 현 시대에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게 수행을 중심에 두는 불교의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