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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구경

법구경(84) 망나니 땀바다티까 이야기

by 아미타온 2024. 8. 16.

<법구경(84) 망나니 땀바다티까 이야기>

 

<서산 상왕산 개심사>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시던 어느 때,
망나니였던 땀바다티까와 관련하여 게송 100번을 설법하셨다.


땀바다티까는 죄수를 사형시키는 망나니로서

왕의 명령에 따라 일해 온 지 55년이었다.

 

그가 그 일에서 은퇴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그는 자기 집에 쌀죽을 끓일 준비를 해두고 강으로 목욕을 나갔다.
 
그는 목욕을 마친 뒤 오늘 아침에는
특별히 맛있는 쌀죽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가 죽을 다 끓여 막 먹으려는데,
사리불 존자가 깊은 선정에서 깨어나

아침 탁발차 그의 집 앞에 와서 서 있는 것이었다.


이때 사리불 존자를 본 땀바다티까는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일생을 통하여 죄수들의 목 자르는 일이나 해왔을 뿐이다.
나는 이 음식을 저 존자께 공양해야겠다.”

그는 사리불 존자를 자기 집으로 초청하여

매우 공손한 태도로 쌀죽을 올렸다.

 

공양을 마친 사리불 존자는 그에게 설법을 베풀었다.
그러나 땀바다티까는 설법 듣는 데 마음을 집중시킬 수가 없었다.


그는 지난날 자기가 해온 생활을 기억해 내고는

불안과 초조 때문에 마음이 괴로웠던 것이다.
 
사리불 존자는 이 같은 사실을 알고 땀바다티까에게

그 자신이 망나니를 하고 싶어서 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왕의 명령에 의해서 한 것인지 물어 보았다.

 

그러자 그는 자신으로서는 죄수를 죽일 마음이 없었으나,
왕의 명령에 따라 그들의 목을 잘랐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이에 사리불 존자는 그렇다면 당신에게 죄가 있느냐고 되물었고,
이에 이르러 그도 자기에게는 죄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마음을 안정시키고 사리불 존자에게 설법을 해주십사고 청했다.


그래서 올바른 마음으로 설법을 열심히 귀 기울여 듣고 나서
수다원 과에 아주 가까이 이르렀다.

그는 위빠싸나 수행 과정 가운데 수행자의 집중력이 아주 밀밀하여
간단없이 이어지는 순일무잡해지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이윽고 사리불 존자가 설법을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땀바다티까는 사리불 존자를 따라나와 전송을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는 집으로 돌아가던 중에 소로 변한 귀신에게 밟혀 그만 죽고 말았다.

부처님께서는 이날 비구들이 모여 있는 장소에 오셨을 때
비구들은 땀바다티까의 죽음에 대해 말씀드렸다.

 

그리고 비구들은 그가 어디에 태어났는지 여쭈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비록 그는 일생 동안 사형 집행자로 살아왔지만
그는 죽기 전에 사리불로부터 법문을 듣고 불법를 잘 이해하여
수다원의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에 도솔천에 태어났느니라.”

그러자 비구들은 그런 악행을 범한 사람이
어떻게 한 번의 법문을 듣고

그렇게 큰 보상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 의심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시 말씀하셨다.

“얼마나 많은 법문을 들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니라.
법문이나 게송을 단 한마디라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이익을 낳는 법이니라.”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다음 게송을 읊으셨다.

열반를 증득하는 것과
관련 없는

일천 마디의 의미 없는 법문보다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단 한마디의 법문이 훨씬 값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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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결과
 

절에 10년 넘게 다니고

매일 108배를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절에 10년 넘게 다니고

매일 108배를 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행위를 통해 어떠한 결과를 이루어내느냐가 중요합니다.
 
절에 다니며 부처님에 대한 공경심이 깊어지고
108배를 하는 의미를 알고 자신의 업장을 참회하여
자신의 업장을 바꾸어내었을 때 절에 다니고 108배를 하는 것이 가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절에 100년을 다니고

108배를 죽을 때까지 해도 수행에 있어서 진전은 없습니다.

 

 

2. 사성제

 

불교에서 "거룩한 4가지 진리"라고 하는 '사성제'가 있습니다.


괴로움의 현실을 자각하고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와 집착을 통찰하여
8정도라는 바른 수행을 통해서
괴로움이 소멸된 해탈과 열반을 이루는 기본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불교 교리에 대해 많이 안다고 하더라도 

많이 아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교리적 앎을 통해

사성제와 같이 괴로움을 소멸하는 구조로

자신의 생각과 실행이 뒤따르냐가 중요합니다.


즉, 계율 지킴과 선정과 지혜라고 하는

삼학의 불교 공부를 통해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제거하여

해탈을 이루는 방향으로 나아가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원효 스님의 <발심수행장>의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재주와 학문이 많더라도 계행을 지키지 않는 이는
보배가 어디에 있는지 알면서도 길을 떠나지 않는 것과 같고
고행과 어려운 수행을 많이 해도 지혜가 없는 이는
동쪽으로 가려고 하면서도 서쪽으로 길을 가는 것과 같다."

보배가 있는 곳이 어딘 줄 알면서도

길을 떠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목적지를 향해 동쪽 길을 가야 하는데,

서쪽으로 가는 사람은 헛된 수고가 될 뿐입니다.


지혜가 있다는 것,

지성적이라는 것은
보배가 있는 곳을 향해 길을 가는 사람이고

목적지인 동쪽 길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3. 변화

 

한평생을 왕의 명에 따라 사형을 집행하는

망나니의 삶을 산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리불 존자의 법문을 들었지만,

자신의 지나온 직업적 삶에 대한 가책으로 불안과 초조에 휩싸였습니다.


그러나, 사리불 존자의 인도로 인해 

자신은 살인할 의도가 없었으나 왕의 명령에 따라 목을 잘랐을 뿐
자신에게는 죄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전의 불안과 초조함은 사라지고 마음의 안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 마음의 안정 상태에서 다시 사리불 존자의 가르침을 듣고
마음의 집중을 통해 순일한 선정 상태에 이르게 되었으며

불법의 진리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비록 전생의 업에 의해 불행한 죽음을 맞이했지만,
계율과 선정과 지혜의 의미와 가치를 자각하고

다음 생에는 도솔천에 태어났습니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많은 법문을 들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법문이나 게송을 단 한마디라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참된 이익을 낳는 법이다.”

예전에 힘들고 괴로울 때면

술에 취해 잊으려 하고 헤롱대던 습관을
'불음주계'의 계율를 지켜나감을 통해 새롭게 깨어나서

불음주계의 중요함을 자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이 사람은 '불음주계'라는 계율을 통해 자신의 장애를 극복하고,

이전과는 다른 변화된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바른 수행자입니다.

 

"나는 부처님을 믿는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을 믿는 사람답게 맑고 자비롭게 살아가느냐가 중요합니다.

 

바른 자각과 실천을 통해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불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