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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구경

법구경(85) 나무 판자로 자기 몸을 가린 바히야 이야기

by 아미타온 2024. 8. 19.

<법구경(85) 나무 판자로 자기 몸을 가린 바히야 이야기>

 

<영주 부석사 올라가는 길>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시던 어느 때,

바히야 다루찌리야와 관련하여 게송 101번을 설법하셨다.

 

어느 때 장사꾼들이 배를 타고

바다를 항해하다가 도중에 배가 침몰하여

한 사람을 제외하고 배에 탔던 모든 사람이 다 죽은 일이 있었다.  

 

이때 유일한 생존자는 물 위에 떠 있는

두꺼운 나무판자를 붙들고 정처 없이 표류하다가

'숩짜라까'라고 불리는 작은 항구에 닿게 되었다.

 

항구에 도착한 그는 옷이 없었으므로 붙들고

온 나무판자로 자기 몸을 가리고

그릇 하나를 든 채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장소에 앉아 있었다.

 

그러자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에게 쌀이나 죽 따위를 주는 것이었다.

 

그중 어떤 사람들은

그가 혹시 아라한이 아닐까 생각하며

자기네들끼리 그를 칭찬하는 말을 나누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에게 옷을 가져다 주었는데,

그는 자기가 옷을 입으면

사람들이 자기에게 돈이나 음식 따위를

바치지 않으리라 생각하여 옷 입는 것을 거절했다.

 

이런 일이 계속되는 동안에

그는 마침내 자기가 아라한이라고 착각하게까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과는 달랐다.

그는 나무 판자 하나로 옷을 대신하여

몸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바히야 다루찌리야'라고 불리었다.

이럴 즈음 대범천는 과거 전생에 자기 친구였던

바히야가 타락되어가는 것을 보고 매우 안타깝게 여기며,

자기에게 그를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영주 부석사>

 

그래서 그는 밤중에 바히야를 찾아가 이렇게 충고했다.

“바히야여!

너는 아라한이 아니지 않은가?

너는 아라한으로서의 아무런 자격도 갖추지 못했지 않느냐?”

그러자 바히야는 마흐브라흐마를 올려다보면서 자백했다.

“그래, 나는 나 자신이 아라한이 아님을 인정한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아주 잘못 행동해 왔다는 것도 인정해.

그렇지만 지금 이 세상 어디에 아라한의 경지에

오른 그런 위대한 사람이 있을 수 있겠니?”


그 말을 받아 마하브라흐마는

사왓티에 부처님이 계시는데,

그분은 진정한 아라한이시며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신 분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제서야 바히야는 자기의 엄청난 죄를 깨닫고 절망감을 느끼게 되어

부처님을 만나 뵙기 위해 정신없이 사왓티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때 마하브라흐마는 신통력으로서 바히야를 도와

120요자나나 되는 먼 거리를 단 하룻밤만에 갈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하여 바히야는 아침 일찍이 사왓티 성에 도착했고,

부처님께서 비구들과 함께 탁발하시는 것을 발견하게 되어

공손한 자세로 부처님의 뒤를 따랐다.

 

그러면서 바히야는 부처님께 진리를 설해 주십사고 청했는데.

부처님께서는 지금은 탁발 공양을 하는 시간이지

법을 설하는 시간이 아니라고 대답하셨다.

 

그러자 바히야는 부처님에게 더욱 가까이 가서 이렇게 말씀드렸다.

 

“부처님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제 생명에 위험이 닥쳐오는 것을 모르십니까?

제발 제게 지금 법문을 베풀어 주십시오!”

 

이때 부처님께서는 바히야가

120요자나나 되는 먼 길을 단숨에 왔다는 것과,

지금 여래를 만나 지나치게 흥분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었다.

 

그랬으므로 부처님께서는

그에게 즉시 법문을 베풀어 주시지 않고

그의 마음이 고요하게 진정되기를 기다리시었다.

진리는 그런 상태에서 바르게 흘러들어가야 하는 법이기 때문이었다.

 

<부석사 안양문>

 

그런데도 바히야는 계속해서 끈덕지게 설법을 애원하였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하는 수 없이 서신 채로 설법을 하시게 되었다.

“바히야여! 내가 어떤 것을 볼 때

너는 네 마음을 보고 있는 그 자체에

집중하고 그것을 분명히 인식하여라.

네가 어떤 소리를 들을 때에도

듣는 그 자체에 마음을 집중시키고 분명히 그것을 인식하여라.

 

네가 어떤 냄새를 맡을 때에,

혹은 어떤 음식을 맛볼 때,

무엇을 만질때,

또 네가 어떠한 것을 생각할 때에도

너는 항상 그 대상에 마음을 집중시키고 그것을 분명히 인식하여라.

 

그러나 그렇게 하면서도,

그것들이 다 마음의 대상일 뿐임을 알아

거기에 어떤 분별을 일으키지 말고

집착이나 싫어함도 일으키지 말아야 하느니라.”

위와 같은 부처님의 법문을 듣자마자

바히야는 즉시 아라한 과를 성취하였고,

그는 부처님께 비구가 되게 해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비구가 되고 싶으면

가사와 발우를 비롯한 물품들을 준비해오라고 이르시었다.

 

그래서 그는 물품을 준비하기 위해 떠났는데,

그와 전생부터 원한 관계를 맺고 있던

소로 변신한 귀신에 밟혀 그만 죽고 말았다.

 

부처님과 비구들은 탁발을 끝내고 나오시어

기원정사로 향하시다가

도중에 바히야가 쓰레기 더미 위에 죽어 있는 것을 보셨다.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그를 아라한에 합당하게 화장케 하며

그 유골을 탑에 안치케 하라고 말씀하시었다.

 

<부석>



부처님께서는 기원정사로 돌아오신 다음

비구들에게 바히야는 열반을 성취했다고 말씀해주셨다.

 

또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그는 짧은 시간 내에

내적 현상을 보아 도(道:Magga)에 이른 사람이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부처님의 말씀을 들은 여러 비구들은 당황하여

그가 언제 아라한을 이루었는지 여쭈었다.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그가 길 위에서 여래가 설하는 법문을 듣고

바로 아라한 과를 성취했다고 하시었다.

 

그러자 비구들은 어떻게 단 몇 마디의 법문만을 듣고

아라한 과를 성취할 수 있었는지 의아하게 생각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었다.

“아라한을 이루는 것은

법문을 듣는 횟수와는 관계가 없느니라.

아주 짧은 단 한 차례의 법문일지라고

그것이 유익했다면 그 사실이 중요하니라.”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다음 게송을 읊으시었다.

니르바나(열반)를 깨닫는 것과 관련 없는
일천 편의 의미 없는 게송을 듣기보다는
단 한 편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마음을 고요히 해주는 게송을 듣는 편이 훨씬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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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무량수전>

 

1. 좋은 친구

 

"붕우유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친구는 세월이 지나고 어려움에 처해도

변치 않는 신의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신의와 믿음의 덕성도 중요하지만,

자신이 나쁜 길로 빠져들 때 자신을 경책해주고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을 정도까지

신의가 있는 벗을 가지고 있다면 정말 복받은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신의가 있는 벗을 '도반'이라고 합니다.

 

수행의 과위에 오르지 못했으면서

자신이 그러한 수행의 과위에 올랐다고 속이는 것,

 

특히, 아라한이 아니면서 아라한이라고 속이는 행위는

거짓말 중에서도 가장 큰 거짓말로

지옥에 떨어질 정도의 무서운 과보가 따른다고 합니다.

 

전생의 친구가 그러한 잘못을 범하고 있을 때 눈감지 않고

친구의 잘못을 지적해주고

친구가 부처님을 만나 광명을 찾게 해주는  대범천이야말로

바히야에게는 "붕우유신"에 걸맞는 참으로 고마운 도반입니다.

 

부처님이 출현하셨다는 대범천의 소식을 듣고

먼 길을 쉬지 않고 걸어와 기원정사가 있는 사왓티까지 달려온 바히야입니다.

 

그는 비록 현생에는 뱃사람으로 태어났지만,

전생부터 도를 갈구하는 수행자의 길을 걷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생명에 죽음의 위험이

곧 닥쳐오고 있슴을 알고 있었습니다.

 

긴 여행의 피로와 함께 긴박감과 흥분 속에서

바히야는 부처님을 찾아뵙고 진리의 법문을 청했습니다.

 

<부석사 범종각>

 

2. 바른 설법

 

그러나, 진리는 아무데서 아무렇게나 설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법을 들으려는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일 몸과 마음 상태에서 설해지는 것입니다.

 

예전의 법구경 이야기에도

병에 걸려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비구를

부처님께서 친히 몸을 씻기고 옷을 입혀 자리에 눕혀

몸과 마음을 상쾌하고 편안하게 한 상태에서 법문을 설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마치 기도를 올리기 전에

몸과 마음과 주변을 청결히 하여 재계를 하는 기도인처럼

법문을 듣기 전에는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쾌적한 몸 컨디션과 고요한 마음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진리는 길거리에서 선 채로 설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진리는 앉은 상태에서 품위있게 설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부처님은 법을 설할 장소, 상황,

법을 들을 사람의 몸과 마음 상태를 고려하여

항상 품위와 위의를 갖추어 법을 설하신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바이야에게 설법하기 전에

몇 차례 이 점을 이야기했지만 바이야는 다급했고 절실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불법의 진리를 듣기를 간절히 원하는 바이야에게 

길거리에서 선 채로 설법하시며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법을 갈구하는 이에 대한 부처님의 자비심입니다.

 

부처님의 자비 법문은 위빠사나 수행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부석사에서 바라본 소백산맥>

 

3. 바른 인식

 

부처님은 일체는 12처, 18계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은 인식 활동이라는 의미입니다.

 

보고 듣고 냄새맡고 등등 인식기관과 인식대상이 만나

이루어지는 인식 활동이 우리 삶의 근간이라는 것입니다.

 

수행의 근본은 자신의 이러한 인식 활동을 통찰하고 반성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인식으로 들어오는 것을 잘 살펴서

팀욕과 분노와 어리석음(탐진치)을 증장시키는 방향으로 가는지

그렇지 않고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탐진치)를 제거하는 방향으로 가는지가 중요합니다.

 

바히야에게 하신 부처님의 설법의 핵심은

우리의 삶이란 우리의 눈,귀,코,혀,몸,생각으로 하는 인식 활동이니

그 인식활동이 탐진치의 방향으로 향하지 않도록 절제하고 관리해나가라는 것입니다.

 

이 단 한번의 설법을 이해하는 것을 통해 바히야는 바로 아라한 과에 올랐다고 합니다.

 

수행의 결과는 수행한 시간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바히야의 깨달음을 통해 다시 한번 더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신이 직면의 상태에서 얼마나 명철하게 이해하고

납득하느냐는 자각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직면의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잘 유지하고 관리하는 것.

 

보리심의 불꽃을 항상 피우고 있는 것이

수행의 결과를 얻는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라한과에 올랐지만 바라야는

전생의 원한 관계에 있던 소에 받쳐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불행한 죽음에 대해

법구경에서는 별다른 언급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라한과를 이룬 그에게

더 이상 생사는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번 생으로 더 이상 윤회를 하지 않는 존재가 될 것인지,

아니면 세세생생 보살의 원을 일으켜 윤회할 것인지는

그의 선택의 문제인 것입니다.

 

부처님은 바히야를 아라한의 예에 맞게 장례를 치른 후에

바히야의 스토리를 통해 다음과 같은 불법의 진리를 설하셨습니다.

 

"일천 편의 의미없는 게송을 읊는 것보다

자신의 마음을 울리고 감동시키는 한 편의 게송이 훨씬 가치있는 것이다."

 

깊이 새겨야 할 부처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