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구경(88) 사리불 존자의 외삼촌 이야기>
부처님께서 죽림정사에 계시던 어느 때,
사리불 존자의 외삼촌과 관련하여 게송 106번을 설법하셨다.
부처님께서 죽림정사에 계시던 어느 때
사리불 존자의 외삼촌에게
당신은 어떤 공덕행을 하고 있느냐고 물으신 적이 있었다.
그러자 그는 자기가 매달 일천 냥에 해당하는 물품을
니간타스 고행자들(자이나교 수행자들)에게 헌납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사리불 존자가 이렇게 말했다.
“외삼촌의 스승은 외삼촌에게 잘못된 가르침을 주어
외삼촌으로 하여금 그릇된 희망을 가지게 합니다.
니간타스들은 자기 자신도 어떻게
브라흐마 천상(梵天)에 태어날지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들은 천상에 태어나게 해줄 수 있겠습니까?”
사리불 존자는 이렇게 외숙부의 잘못된 믿음을 지적한 뒤에
부처님께 외삼촌이 브라흐마 천상에 확실하게 태어날 수 있는
불법의 진리를 가르쳐 주십사고 청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재가자여!
마음 집중법을 바르게 수행하는 비구에게 한 주걱의 밥을 공양하는 것이
일천 냥을 그대의 스승인 니간타스에게 올리는 것보다 나으니라.”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다음 게송을 읊으셨다.
매달마다 백 년에 걸쳐
평범한 사람에게 일천 냥을 주는 것보다
신에게 백 년 동안 제사지내는 것보다
일념으로 마음 집중을 수행하는 비구를 찾아가
잠깐 동안 존경의 예를 표하는 것이 훨씬 낫다.
부처님의 이 설법 끝에 사리불 존자의 외삼촌은
곧 수다원 과를 성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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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앙굴리마라 이야기
99명을 죽인 살인자 앙굴리마라 이야기가 있습니다.
앙굴리마라는 스승의 사모가 자신을 유혹하였지만,
제자로서의 신의를 지키고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앙굴리마라에게 앙심을 품은 사모가
스승에게 앙굴리마라를 음해했습니다.
분노한 스승은 악랄하게도 자신의 제자인
앙굴리마라를 파멸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거리에 나가서 100명을 죽이고,
그 손가락을 잘라 목에 걸면
해탈한다는 가르침을 주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앙굴리마라가 부처님을 만났습니다.
부처님을 만나고
살인이 얼마나 큰 죄업인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참회했습니다.
자비와 불해의 원칙에 따라 삶을 살겠다고 맹세했고
해탈을 향한 바른 수행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새롭게 태어난 앙굴리마라를
"비폭력의 성자 아힘사카" 라고 불렀습니다.
99명을 죽인 앙굴리마라가 탁발을 나섰을 때
많은 사람이 그에게 돌을 던지고 욕했지만,
앙굴리마라는 이들에 대한 자비심과
평정된 마음으로 원한을 품지 않았습니다.
몸은 비록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자비롭고 평정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2. 좋은 스승과 나쁜 스승
이 이야기가 주는 가르침은 무엇일까요?
나쁜 스승과 함께할 때의 앙굴리마라와
부처님과 함께 할때의 앙굴리마라가 다른 사람이었나요?
나쁜 스승과 함께할 때에도 앙굴리마라는
스승에게 순종하고 충직하고 신의있는 제자였습니다.
스승에게 순종하고 충직하고 신의있다는 것은
그 마음밭이 때가 묻지 않고 좋은 훌륭한 덕성입니다.
그런데, 그 순종과 충직과 신의라는 좋은 덕성을 가진 마음밭이
나쁜 스승이라는 씨앗을 만났을 때는 어떻게 자라나는가요?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살인자로서의 나무로 살아나고
해탈과는 180도 다른 방향으로 자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그 순종과 충직과 신의라는 좋은 덕성을 가진 마음밭이
부처님과 같은 훌륭한 스승이라는 씨앗을 심었을 때는
어떻게 자라나고 발현되어지는가요?
자비와 불해의 성자로서의 나무로 자라나고
바른 해탈을 향해 나아가는 나무로 자라나가는 것입니다.
좋은 밭이라고 하더라도
어떠한 씨를 심는가에 따라 각기 다른 나무가 자랄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밭이라도 씨앗이 좋지 않으면
좋지 않은 나무가 자랄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스승에 대한 순종과 충직과 신의라는
좋은 마음밭을 가진 앙굴리마라였지만,
나쁜 스승이라는 씨앗이 뿌려졌을 때는
허당나는 인생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인과의 법칙입니다.
마찬가지로 친구를 가려서 좋은 친구를 사귀고
나쁜 친구를 사귀지 말라고 합니다.
책을 가려서 좋은 양서를 읽으라고 하고
나쁜 악서을 읽지 말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나쁜 친구와 나쁜 악서는
해악을 주는 방향으로 자신을 이끕니다.
착한 친구와 좋은 양서는
자신에게 유익을 주는 방향으로 이끕니다.
3. 좋은 공양과 보시
공양과 보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에게 보시하고
공양하는 마음을 내는 것은 좋은 덕성입니다.
그러나, 자비로운 마음으로
아낌없이 댓가없이 보시하고 공양한다고 하더라도
앙굴리마라의 스승과 같은 존재에게 보시하고 공양한다면
그 보시와 공양이 어떻게 사용될까요?
앙굴리마라와 같은
불행한 제자를 기르는데 사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낌없이 댓가없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보시하고 공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누구에게 보시하고 공양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지혜와 안목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입니다.
인도 성지 순례를 갔을 때 나무 신에게 실을 두르고
예배하고 공양하는 여인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믿음이 있고 공양을 하는 의도는 좋은 것이지만,
나무 신에게 공양을 올리며
복락을 비는 그들의 행위에 대해 부처님은 어떻게 바라보셨을까요?
비록 가시적인 해악을 끼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나무 신에게 예배해서 얻는 복락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행위는 오히려 자신의 어리석음과 무명을
증장시키는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보셨습니다.
부처님은
일천냥의 큰 돈을 잘못된 가르침을 펴는 니간다스에게 공양하는 것보다
마음 집중법을 바르게 수행하는 수행자에게 한 주걱의 밥을
공양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하셨습니다.
좋은 밭에 부실한 씨앗을 뿌리면 좋지 않은 나무가 자라듯이
비록 좋은 마음먹기와 의도에서 공양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 대상의 선택과 행하는 방법이
지혜롭고 사려깊고 여법하지 않다면 환영받기가 힘든 것입니다.
즉, 인과를 바르게 볼 줄 아는 지혜가 없다면
공양의 공덕이 빛을 발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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