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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류 기행

풍류 기행(16) - 풍기 소수서원

by 아미타온 2024. 9. 1.

<풍류 기행(16) - 풍기 소수서원>

 

 

1. 평화로운 소수 서원

 

경북 영주.

 

영주는 소수서원, 금성대군 신단, 순흥리 고분벽화, 부석사와 같은

역사의 숨결이 녹아 있는 도시입니다.

 

 

 

제일 먼저 소수 서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소수서원 입구는 소나무가 펼쳐져 있습니다.

 

 

 

앞에는 여유롭고 잔잔하게 죽계천이 흐르고 있습니다.   

 

잔잔한 파동으로 흘러가는 작은 내천의 맑고 투명함과 

햇살에 비치어 반짝이는 은빛 물결의 여유로움과 반짝임이

짧은 순간이지만 긴 여운을 주는 평화로움으로 선명하게 다가왔습니다.

 

참 좋은 곳에 배움의 전당인 서원을 지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2. 백운동 서원과 '경(敬)'의 가치

 

하얀 글씨로 주세붕이 명명한 "백운동 서원"과

붉은 글씨로 퇴계 이황이 쓴 "경(敬)"이 바위에 새겨져 있습니다.

 

이 곳이 어떤 곳이며,

어떤 가치를 배우는 곳인지를

두 글씨로 압축해서 드러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 주세붕과 소수 서원

 

조선 중종 때 풍기 군수 주세붕은 주자가 "백록동 서원"을 열어

지방 사람들에게 배움의 전당을 열었던 것처럼

성리학의 가르침을 공부하고 배우는 전당을 열려고 했습니다.

 

주세붕이 서원을 열려고 하자 주변에서는 반대가 심했습니다.

 

국가에서 세운 학교인 향교가 풍기 읍내에 있어

안향을 모시며 아이들이 공부하고 있고,

게다가 흉년이 들어 힘들어 죽겠는데

몰락한 순흥 땅에 무슨 서원을 새로 만드냐는 반대였습니다.

 

그러나, 도학자인 주세붕은 세조의 찬탈에 반대하여

목숨을 잃은 의인들의 고장인 순흥 땅이 피폐화되고

순흥 향교는 폐지되어 변변한 교육 기관이 없는 것이 가슴 아팠을 것입니다.

 

 

 

이 곳 순흥 아이들이 자신의 선조들이 

목숨보다 소중하게 지켰던 가치인 의리를 교육 받고

성리학의 가르침을 배우게 하는 것이

단종 복위 사건으로 억울하게 죽은 순흥 선비들과

그 후손들을 위해 풍기 군수인 자신이 도학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사명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세붕은 주자가 중국 남강 수령으로

있을 때의 행적을 예로 들면서

아이들을 교화하고 가르치는 일이

기근을 처리하는 일보다 더 시급하고

먹고 사는 것이 힘들어도 훌륭한 성현의 행적을

본받아야 바르게 살수 있다고 지방 유지들을 설득했습니다.

 

그래서, 이 산수 좋은 곳에 백운동 서원을 세운 것입니다.

우리 나라 최초의 서원이었습니다.

 

조선 유학의 5현 중의 한 사람인 이언적과 친구였던 주세붕은

주자를 깊이 존숭했고 배움의 가치를 알았던 분이었던 것입니다.

 

백운동 서원의 처음 정원은 10명이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이 순흥 지방의 인재들이 이 곳에 입학하여 

유학의 가르침을 배우고 공부했습니다.   

 

 

4. 퇴계 이황과 소수 서원

 

주세붕이 백운동 서원을 세우고 30여년이 지나

다시 풍기 군수로 온 분이 바로 퇴계 이황이었습니다.

 

퇴계 이황은 이 백운동 서원의 가치를 알아 보고

자신을 존경했던 명종에게 건의하여 백운동 서원을

국가에서 지원하는 사액 서원으로 승격해 달라고 주청했습니다.

 

사액 서원은 국가에서 서적(책)과 현판을 내려 주고

그 토지의 세금과 노비의 부역 의무를 면제하여

경제적 기반 속에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는 나라가 지원하는 서원입니다.

 

 

 

명종은 퇴계의 주청을 허락하고, 

서원의 이름을 새롭게 "소수 서원"이라고 사액을 주었습니다.

 

"잇고 닦는다"는 뜻의 "소수(紹修)"라는 말은

"이미 무너진 학문을 다시 잇고 닦게 한다"라는 뜻입니다.

 

원래 소수서원이 있던 풍기읍은

예전에는 순흥부가 있던 곳입니다.

 

그런데, 단종 복위 사건으로 영주의 한 면으로

격하된 순흥부는 순흥 향교가 폐지되었습니다.

 

그래서, 무너진 학문과 학교를 소수 서원을 통해

다시 잇고 닦게 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성리학의 도학을 존숭했던

퇴계 이황이 아이들에게 가르치려고 했던

교육의 가치는 바로 "경(敬)"이었습니다.

 

소수 서원의 학생들 기숙사는

스승의 거처를 그림자라도 밟으면 안 되게

멀리 지어져 있었습니다.

 

 

 

"제자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말은

이제 과거의 유산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 교육의 문제는

어떻게 보면 스승에 대한 "경(敬)"의 가치가

무너진데서 온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5. 소수서원과 숙수사

 

소수서원은 순흥부가 폐지되기 전에는

'숙수사' 라는 절이 있던 곳이었습니다.

 

소백산 자락에 포근히 둘러 싸이고

죽계천이 흐르는 이 곳은

공부하기 좋은 도량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퇴계는 훌륭한 선현들의 연고가 있으면서 산수가 좋은 곳이

배움의 전당인 서원의 입지로는 최고의 입지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왜냐하면 스승에 대한 공경 속에서 

배움에 전념할 수 있는 청정한 결계의 땅이 

바로 도량이며 배움의 장이라는 가치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6. 소수 서원을 돌아보며

 

순흥은 고려 말 원나라에서

성리학을 처음 배우고 돌아온 안향의 고향입니다.

 

안향은 이 곳 순흥을 본관으로 쓰는 순흥 안씨입니다.

 

안향이 어릴 때부터 학문을 배우고 공부했던

산수 좋은 이 곳 숙수사가

고려 숭불의 시대와 조선 척불의 시대를 초월하여

공부하기 좋은 도량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퇴계에 의해 소수 서원으로 사액된 이후

정원이 30명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름 있는 사학이었기 때문에

경상도 각지에서 인재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안동 의성 김씨 종가집의 김성일을 비롯해

수많은 경상도 유림의 인재들이

산수 좋고 전통 있는 소수 서원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1888년 교육 기관으로서

소수 서원이 막을 내릴 때까지 약 4,000명의

퇴계 학맥의 소수 서원 동문들을 배출했습니다. 

 

 

 

이 좋은 도량도 6백년 전에는 살육의 비극의 현장이기도 했습니다.

 

단종 복위를 하다가 발각된

금성대군과 순흥의 선비들이 

참살을 당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 맑은 강물이 6백년 전에는 피빛이 되어 흘렀고,

아이들 겁줄 때 하는 말인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말이 이 곳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곳이 왜 사바 세계인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사바 세계의 괴로움이 없는 안락의 땅,

아미타 부처님이 계시는 극락에 반드시 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죽계천 맞은 편에서 바라본 경렴정과 은행 나무입니다.

 

은행 나무는 오래 살고, 열매를 많이 맺습니다.

 

그래서 배움과 수행이 오래 이어지고,

그 결실과 성취를 풍성하게 보기를 바라면서 

학교나 절에는 이 은행 나무를 많이 심습니다.

 

 

 

소수 서원의 연못입니다.

 

숙수사가 있을 때는 연지였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정원의 특징은 자연과의 합일을 중시합니다.

 

연못 위에 섬도 툭툭 몇 개 만들어 놓은 것이 재미있었습니다.

 

 

 

서원 내부에는 우리 나라 최초로 성리학을 들여온

고려 말의 안향 선생을 모신

'문성공전'을 비롯한 많은 전각들이 있습니다.

 

왜 서쪽에 안향 선생의 사당을 모셨는지,

왜 스승의 그림자를 밟지 않으려고 학생들 기숙사를 지었는지

그 배움과 예의의 가치를 잘 알고 닦아나가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