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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류 기행

풍류 기행(17) - 경주 용담정과 수운 최제우 선생

by 아미타온 2024. 10. 13.

<풍류 기행(17) - 경주 용담정과 수운 최제우 선생>

 

<용담정 입구 포덕문>

 

1. 용담정과 수운 최제우 선생

 

경주 용담정.

 

9월 마지막 주말에

경주 현곡면 구미산 자락에 있는

동학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 선생의 유적을 찾아 보았습니다.

 

비가 촉촉히 내리는 날이었습니다.

 

용담정 입구에는 최제우 선생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하늘을 향해 손을 들어 가르침을 펼치는 모습과

동학의 무극대도를 상징하는 '궁을도(弓乙道)'의 상징이 있습니다.

 

<수운 최제우 선생 동상>

 

 

경주 현곡면 가정리 구미산 자락에 있는

용담정은 수운 최제우 선생(1824~1864)의 득도지입니다.

 

수운 최제우 선생의 고향 마을이고 자라난 곳이기도 합니다.

 

동학에서는 최제우 선생을 '대신사(大神師)'라고 부릅니다.

 

전봉준 장군의 동학 혁명으로 동학(천도교)를 전라도 종교로 알고 있으나,

동학의 발상지는 경주로서 동학 1,2대 교주 최제우와 최시형은 경주 사람입니다. 

 

<용담정 가는 길>

 

 

2. 수운 최제우 선생의 출생과 청년 시절

 

수운 최제우 선생은 어떤 분인가요?

 

최제우 선생은 경주 현곡면 가정리에서 

퇴계 유학을 공부한 '최 옥' 이란 분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최옥은 당시 60이 넘은 노인으로

두 번 결혼했지만 아들이 없어서 양자를 들인 상태였습니다.

 

두 부인이 죽자 재가녀 출신의 한 여인과 결혼해서 최제우를 낳았습니다.

 

당시 조선 <경국대전>에 의하면 재가녀의 자식은 문과 시험에 응시할 수 없었습니다.

어찌보면 최제우 선생의 출생 자체가 조선 시대의 신분제 모순을 안고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최옥 공은 늘그막에 얻은 아들을 지극히 사랑했다고 합니다.

서자 라는 차별도 없이 유학 공부를 시키며 아들에게 정성을 다했다고 합니다.

 

용담정은 원래 작은 암자가 있던 곳인데,

최옥 공의 아버지, 즉 최제우 선생의 할아버지가 땅을 사서

최옥 공이 학업에 정진할 수 있도록 마련해 준 공부 장소였습니다.

 

작은 계곡의 물소리가 흐르고,

산세가 맑고 좋아서 공부하기 좋은 장소처럼 느껴졌습니다.

 

아무튼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 속에 자랐지만,

최제우 선생의 20대 이전에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결혼한 식솔을 거느리고 독립해야 하는 가장이 되어야 했습니다.

 

17세에 결혼하여 가장이 된 최제우는 

한때 무과(武科)에 응시할까 하다가 그만두었고,

경상도 남부지방에서 나는 원철(原鐵) 도매상을 열었다가 쫄딱 망하기도 했습니다.

 

재산은 다 날아가고 물려받은 집마저 불에 타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20살 이후부터는 가족을 처가인 울산에 보내놓고

장사 등을 하며 전국을 방랑하며 삶의 돌파구를 찾고자 절치부심하였습니다.

 

최제우는 젊은 나이에 전국을 떠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안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여러가지 일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10여년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세상의 현실과 직접 부딪히며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최제우 선생은 세상의 어지러움과 우리나라가 국내외적으로 

여러가지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음을 정확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용담정 계곡>

 

3. 수운 최제우 선생의 고뇌와 공부

 

약 10여년간 전국을 유랑한 최제우는 30살 되던 1854년부터

처가가 있던 울산 유곡동의 여시바윗골에 정착하였습니다.

 

최제우는 자신이 방랑 중에 느낀 삶의 고뇌와

나라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공부의 폭을 넓혀갔습니다.

 

그는 전통적인 민간신앙 및 유교, 불교, 도교는 물론

서양에서 들어온 천주교에 대해서도 공부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의 공부의 내용은 넓어지고 깊어졌습니다.

 

이렇게 공부하는 과정에서 최제우는 세상의 문제의 주된 원인은

세상사람들이 "천명(天命 : 한울님의 뜻)"을 잘 살피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몸과 마음을 다해 '천명(한울님의 뜻)'을 알기를 강렬히 원했습니다.

한울님의 뜻을 제대로 알아야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을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1855년 봄에 금강산 유점사에서 온 승려로부터 <을묘천서>라는 책을 얻었습니다.

도올 선생은 그 책의 정체가 천주교 교리를 적은 <천주실의>라고도 합니다.

 

아무튼 그 책에서 영감을 받은 최제우 선생은

양산 내원암이나 울산 처가집에서 수도하며

천명(한울님의 뜻)을 알기 위해 노력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1859년 가족을 데리고 고향인 경주로 돌아온 체제우 선생은

바로 이곳 경주 구미산 용담정(龍潭亭)에서 수련을 하게 되었습니다.

 

최제우 선생은 이곳에서 도를 얻지 못하면 세상에 나오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고

어리석은 세상 사람을 건지겠다는 뜻에서 이름을 '제선'에서 '제우(濟愚)'로 고쳤습니다.

 

용담정에서 수련에 열중하던 최제우는 37세 되던 해인 1860년 4월 5일,

갑자기 몸과 마음이 떨리고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공중으로부터 천지가 진동하는 듯 한 소리를 듣는 종교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용담정>

 

4. 한울님의 계시

 

한글 가사체로 된 <용담유사>는

그가 깨달을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꿈인가 생시런가.

천지가 아득하여 정신을 차릴수가 없구나.

공중에서 외치는 소리

천지가 움직일때 집안 사람 행동을 보라.

놀라고 두려워서 하는 말이

아이고 내 팔자야 무슨 일이 이러한가.

 

하늘의 은혜가 끝이 없어서 1860년 4월 초닷새에

글로 어떻게 표현하며 말로 어떻게 드러낼수 있을까.

영원하고도 끝이 없는 큰 도(무극대도)를

꿈 결엔가 생시엔가 깨달았도다.

 

<용담정 지붕>

 

최제우 선생은 당시 그가 들은 한울님의 말씀(계시)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천은(天恩)이 망극하여
경신(庚申) 사월 초 오일에
글로 어찌 기록하며 말로 어찌 형언할까.


만고(萬古) 없는 무극대도(無極大道)
여몽(如夢) 여각(如覺) 득도(得道)로다.


기장하다 기장하다 이내 운수 기장하다.
한울님 하신 말씀 개벽후 오만(五萬)년(年)에
네가 또한 처음이로다.


나도 또한 개벽 이후
노이무공(勞而無功)하다가서
너를 만나 성공하니
나도 성공 너도 득의(得意) 너의 집안 운수로다.


최제우 선생은 이 종교 체험을 자신만이 들을 수 있는

한울님의 소리라고 생각하고 자신은 도를 분명히 깨달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최제우 선생은 자신의 몸에 하늘님을 모셨다는

"시천주(侍天主)"의 체험이라 생각했고,

모든 사람도 자신의 몸 안에 하늘님을 모시고 있으므로

모든 사람을 하늘님처럼 존귀하게 보아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울님을 자신의 마음 안에 모시면서

분란과 차별의 세상을 선천(先天)세상에서

화해와 상생의 새로운 세상인 후천 세상의 도래인 후천 개벽의 도래를 이야기했습니다.

 

<수운 최제우 선생 영정>

 

5. 동학의 가르침을 펼친 포덕(布德)의 길

 

최제우 선생은 깨달음을 이룬 후 1년 동안

자신이 깨달은 바를 스스로 체득하고 정리하여 체계화하기 시작했습니다.

 

한문으로 된 <동경대전>을 짓고,

한글 가사체로 된 <용담유사>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신도들이 도를 닦을 때 사용할

주문(呪文)을 짓고 도를 닦는 절차를 마련했습니다.

 

그 주문은 바로 다음의 13자의 주문입니다.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망사지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

 

"한울님을 모시고 한울님의 조화의 덕과 합쳐져서 마음이 선명하게 정해지고,

그 마음을 잊지 말고 보존하면 세상의 모든 이치를 깨달을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용담가>, <교훈가>, <안심가>, <포덕문> 등을 짓고,

1861년인 38세부터 본격적으로 깨달음을 세상에 알리고 뜻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동학(천도교)에서는 1861년을 '포덕 1년'이라고 합니다.

 

포교가 시작되자 많은 사람들이 동학에 입도하여

최제우 선생의 가르침을 따르며 동학의 교세는 급속도록 성장했습니다.

 

용담정 올라가는 길에는 그 당시 집을 짓고

가르침을 받던 제자들의 잡터가 남아 있다고 했습니다.

 

<수운 선생의 칭필, 거북(구)>

 

그러나, 당시 정부는 이와 같은 최제우 선생의 포교 행위를

천주교(서학)로 지목하며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부터 최제우 선생은 자신의 도는 서학(천주교)과 다르며,

'동쪽의 배움' 이라는 뜻의 동학(東學)으로 정하고,

자신의 탄압을 예견하며 최시형을 2대 교주로 삼아 후일을 기약했습니다. 

 

1863년 체포된 체제우 선생은 이듬해 대구 감영에서

백성들을 삿된 사교로서 홀리고 불러 모았다는 좌도난정(左道亂正)과

혹세무민이라는 죄목으로 효수형에 처해지는데 이 때 그의 나이가 41세였습니다.

 

아무튼 조선 말기 고난의 시절,

하늘의 소리를 듣고 새로운 종교를 창도한

최제우 선생의 득도지를 함께 찾으니 참 좋았습니다.

 

비가 촉촉히 내리는 중에

최제우 선생의 깨달음의 현장을

직접 와서 그 조촐한 깨달음의 향기를 맡아보니 참 좋았습니다.

 

지금은 동학의 교세가 쪼그라들었지만,

3.1운동 시절만 해도 약 300만의 동학 교도가 있었다고 합니다.

 

<용담정>

6. 보국안민 척양척왜

 

 

해설사 분이 동학과 최제우 선생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불교 신자라고 하시는데, 해설사를 위해 동학에 대해 공부하면서

우리나라 근대 민족 정신이 동학에서 태동했다는 확신을 얻었다고 하셨습니다.

 

보국안민 척양척왜. 

 

모순된 나라를 새롭게 바꾸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며,

우리를 강제로 침탈하는 외국의 폭거에 항거하는 동학 혁명 정신.

 

동학 혁명 당시 약 30만명의 동학 교도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을 바라보며 살아 남은 우리 민족 사람들의 가슴에

무엇이 새겨졌을까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국안민 척양척왜'를 부르짖으며

모순과 억압과 외세에 항거하며 죽어간 사람을 보면서

우리 민족의 피가 흐르는 사람들 가슴 속에도

백성들이 평안히 살게 하는 나라와

부당한 외세의 침략에 저항하는 정신이 새겨졌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용담정 구미산 내려가는 길>

 

그 말씀에 깊이 공감이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가 수많은 정치적 억압과 일제 식민주의 속에서

독립을 위해 투쟁하고 싸운 힘과 4.19처럼 불의에 저항하는 정신의

뿌리에는 '보국안민 척양척왜'의 동학 정신이 살아 숨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음 도량에 한울님을 모신 시천주의 최제우 선생의 깨달음과 함께

'보국안민 척양척왜'의 동학 정신을 마음에 잊지 않고 잘 새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제우 선생의 득도 장소에서 불자로서 부처님을 모시는 내 마음 세계와

시대를 살아가는 바른 시대 정신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를 되새기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