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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역사

불교의 역사(56) - 유식 불교(4) - 마음의 그림자

by 아미타온 2024. 9. 14.

<불교의 역사(56) - 유식 불교(4) - 마음의 그림자 >

 

<봉화 축서사 일몰>

 

 

1. 제8식 아뢰야식과 일수사견 (一水四見)

 

한편, 유식에서는 우리가 대상을 어떻게 왜곡해서

보는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피고 있습니다.

 

유식에서는 3 단계의 과정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제8식으로부터 달라집니다.

 

우리는 훈습된 경험을 바탕으로,

즉 우리의 과거의 경험이

아뢰야식에 쌓인 종자의 영향을 통해 대상을 바라봅니다.

 

똑같은 한 사람을 보고도

제각기 대상이 다르게 보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즉, 아뢰야식의 내용에 따라 대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유식에서는 여기에 대한 비유로서

"일수사견(一水四見)"의 비유를 많이 씁니다.

 

하나의 물에 대해 보는 각각의 주체에 따라

하나의 물이 4가지로 달리 보인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물을 물로 보지만,

천상의 존재인 천인들은 물을 유리 보석으로 보며,

고기들은 물을 사는 집으로 보며,

지옥 중생들은 물을 피고름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객관이라고 부르는 것이

모든 존재에게 동일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중생들의 아뢰야식(업식)의 내용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봉화 축서사에서 바라본 소백산맥>

 

2. 제7식 말라식과 사량 분별

 

둘째는 제7식으로부터 변형되고 왜곡된다고 합니다.

 

제7 말나식은 앞에서도 설명을 했듯이

끊임없이 사량 분별하는 심층 의식으로

무엇을 하더라도 자기를 위하여, 자기 입장에서,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뿌리 깊은 자아 집착심(ego)입니다.

 

유식30송에서

"제7 말라식은 항상 사량 분별하는 것이

다른 식에 비해 뛰어나므로 말나식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같은 심층의식인 제8 아뢰야식은

항상하기는 하지만 세심하게 관찰하는 식은 아닙니다.

 

그리고, 제6식인 의식은 세심하게 관찰하고 생각하는 식이지만

항상 작용하지는 않습니다.

 

즉, 우리가 잠에 들거나, 기절을 하거나,

깊은 선정에 들때에는 제6식인 의식은 끊깁니다.

 

그러나, 자아 중심으로 세심하게 관찰하고,

사량 분별하는 제7 말나식은

언제 어디서나 작용하지 않는때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시작도 모르는 과거부터

'나'의 내부에 존재하는

뿌리깊고 선천적인 자아 의식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제7 말나식은 심층 심리로서

생사윤회하는 한 언제나 세심하게

아뢰야식을 "자아"라고 간주하며 계속 집착합니다.

 

마치 초목이 자라려면 대지를 기반으로 하여 일어나듯,

제7말나식은 제8아뢰야식을 대상으로 계속 작용합니다.

 

이러한 뿌리 깊은 자아집착심으로

'나'에 집착하고 '나의 것' '나의 생각'을 집착하며,

모든 것에 대해 나와 너, 우리와 그들로 나누어 

분리와 대립의 못을 만들어가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나다'라는 자아집착심이 강하고

약한가에 따라 대상이 다르게 보입니다.

 

예를들어, 우리는 '나다'라는

자기 중심적인 생각으로 상대방을 보기 때문에

가까운 사람에게 점수를 더 주게 되고 미운 사람도 예쁘다고 합니다.

 

반대로 밉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점수를 깎고,

그 사람이 아무리 잘해도 예뻐 보이지가 않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왜곡된 말나식으로 표출된 것입니다.

 

<봉화 축서사 범종 치는 템플 스테이 객>

 

3. 전5식과 6식으로부터의 왜곡

 

그리고, 세번째로 전 5식과 6식으로부터 왜곡됩니다.

 

우리의 시각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너무 작은 것은 보지 못하고 반대로 너무 큰 것도 보지를 못합니다.

 

다만 우리의 시야의 테두리 안에 보이는 것만을 인식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자외선이나 X-선 등을 볼 수 없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다른 감각 기관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식도 생각에 따라 변형됩니다.

 

어떤 음식도 별 것이 아닌데도

비싸거나 맛있다고 하면 맛있다고 느껴집니다.

 

소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아주 못 견딜 것처럼 생각되지만,

마음을 달리 먹으면 참을 수 있습니다.

 

고속도로나 철도 옆에 사는 사람들이

차나 열차 소리를 소음으로 생각하면 도저히 참을 수 없겠지만,

그것이 파도 소리라고 생각하면 참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인식에는 한계가 있고 오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보고 듣고 내가 생각하고

내가 느낀 것이 확실하다고 집착하며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합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입니다.

 

<축서사 적멸보궁>

 

4. 마음의 그림자

 

유식 불교는 이러한 우리의 인식의 신뢰성에

깊은 의문을 제시하고 반성을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 살펴본대로 

우리는 어떤 사물을 볼 때 밖에 있는 실체를 본다고 생각하지만,

심층의식까지 통찰하여 살펴본 바에 의하면

그것은 단지 마음의 그림자를 보는 것에 불과합니다.

 

자신의 한정된 경험을 통해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경험을 통해서 보는 것도

바로 자기 마음의 그림자를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산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남산의 실체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 본 남산은 일단 우리 마음 속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남산이 우리 마음 속에 비치고

그 비친 마음의 그림자를 통해 남산을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사물의 그림자입니다.

 

이것은 마치 거울 속에 비친 꽃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거울에 한 송이 꽃이 비추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울에 보이는 꽃이 객관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식적 입장에 서면 거울은

바로 우리의 주관적인 마음입니다.

 

우리가 거울을 통해 사물을 보는 것도

거울이라는 주관적인 마음을 통해서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주관도 객관도 우리의 마음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이 객관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실은 우리의 마음이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는 것이 유식입니다.

 

우리의 앎을 잘 관조해보면 이러한 이치를 잘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