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역사(57) - 유식 불교(5) - 변계소집성과 유식무경 >
1. 어리석음(미망)
우리의 행위는 심층의식인 아뢰야식의 종자에 훈습이 되고,
그것은 다시 우리의 행위에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이렇게 들어 오고 나가는 흐름은
끊임없이 동시에 작용하며 우리의 마음 작용을 만들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흔히 "나의 마음"이라고 하는 마음의 작용이
실제로는 이러한 흐름 속에 있으므로
그것이 곧 무상하고 무아이며 연기이고 공이라는 사실을 잘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러한 사실에 어두워서
'나다'라는 착각을 일으키며 살아갑니다.
그러한 착각을 일으키는 것은 제7 말나식 때문입니다.
제7 말나식은 나와 대상을 둘로 나누고,
안에 있는 것은 나(자아),
밖에 있는 것은 대상(객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착각으로
안에 있는 나(자아)에 집착하여
여러가지 번뇌를 일으키며 대상을 왜곡합니다.
이러한 착각을 바로 "어리석음(미망)"이라고 부릅니다.
2. 변계소집(遍計所執)
그리고, 이러한 자아에 집착하여
대상을 왜곡시킴에 의해 제6식인 의식이 물들게 됩니다.
그래서,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삼독의 괴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아에 집착하여 대상을 왜곡시킴에 의해
헛것을 보고 착각을 일으켜 거기에 집착하는 것을
유식불교에서는 "변계소집(遍計所執)"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변계(遍計)"는 '이리저리 헤아리고 억측한다[周遍計度 주변계도]'는 뜻이고,
"소집(所執)"은 '두루 헤아리고 억측함으로써 잘못 보이는 집착된 대상'을 가리킵니다.
즉, 헛된 생각에 집착하거나 왜곡된 대상에 집착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이야기한 어두운 밤에
새끼줄을 뱀으로 착각하는 비유와 동일한 의미입니다.
이처럼 새끼줄을 뱀으로 착각하고,
그 허상에 놀라기도 하고 의심하기도 하며
미워하기도 하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우리들 중생들이 사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3. 미하자 이야기
이것은 우리들의 삶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으며,
여러가지 역사적 사실이나 문학 작품 속에서도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미하자"라는 후궁 이야기가 있습니다.
~~~
옛날 "미자하"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위나라 임금의 총애를 받는 후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살던 위나라 법에 따르면
임금의 수레를 몰래 훔쳐 탄 자는
뒷발꿈치를 베는 형에 처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어느날, 미자하의 어머니가 갑자기 병에 들었습니다.
인척으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들은 미자하는
급한 마음에 임금의 명령이라 속이고
임금의 수레를 타고 나가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이것이 임금에게 알려지자 임금은 말했습니다.
“실로 효녀로구나!
어머니를 위하여 뒷발꿈치를 베이는 형벌도 두려워하지 않다니!”
그리고 어느 날, 미자하는 임금과 함께 과수원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미자하가 복숭아 하나를 먹어보니 매우 맛있었습니다.
그녀는 그것을 먹다 말고 임금에게 올리며
너무 맛있어서 먹던 것이지만 드리지 않을 수가 없다고 아뢰었습니다.
임금이 감탄하였습니다.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이러한 정도로구나!
제 입에 넣는 것을 잊고 나를 생각하다니!”
그 뒤, 세월이 흘러 미화자도 늙게 되었습니다 .
그녀의 고운 얼굴도 추해졌습니다.
따라서 임금의 사랑도 시들해지자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어느 날 늙은 미하자가 사소한 죄를 짓자 짜증이 난 임금은
화를 내어 꾸짖었습니다.
“일찌기 이 여자는 교만하게도
나의 명령이라고 속여 내 수레를 타고 나갔었다.
또, 무엄하게도 제가 먹고 남은 복숭아를 일부러 내게 먹였었다.”
이렇게 여인을 꾸짖고는 사소한 그 죄를 트집 잡아
아주 큰 벌을 내리고 그녀를 멀리 쫓아 내었습니다.
~~~
이 이야기의 임금은 유식불교적 입장에서 보면
"변계소집"하는 중생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임금은 자신의 마음의 그림자인 허상에 취해서
후궁인 미하자의 동일한 행동을 보고도
자신이 사랑에 취해있을 때는 잘 한 행동이라고 칭찬을 하고,
세월의 흐름과 함께 늙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앉자 미워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보면 우스운 일인데도,
본인은 실제로 그렇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4. 유식무경(有識無境)
이러한 변계소집은 임금뿐 아니라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도 비일비재합니다.
이와 같이 깨달은 분들의 지혜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직관하지만,
중생의 인식은 항상 주관과 객관의
대립적 인식 상황 속에서 선입견 등의 영향을 받습니다.
중생의 인식 작용이
객관으로서의 식(識, 유식에서는 이를 상분(相分)이라고 부른다)과
주관으로서의 식[識, 유식에서는 이를 견분(見分)이라고 부른다]으로 분화되어
표상 작용을 일으키고,
여기에 아뢰야식의 습기의 영향 속에서 인식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현상계의 모든 존재는 인연 화합으로 생겨난 임시적인 존재이며
상주불변하는 실체는 없습니다.
즉, 항상 예쁜 미하자나
항상 미운 미하자는 존재하지 않으며,
미하자도 세월의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것입니다.
변계소집성은 이러한 실상을 모르고
자신의 허망된 분별에 의해 실체로 착각되고 집착한 것입니다.
유식에서는 이와 같이 대상이 실재한다는 나의 생각이 허망하다고 알려줍니다.
내가 보는 대상은 실제가 아니라 내 마음의 그림자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식에서는 오직 마음만 있을뿐 객관 대상은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유식무경(有識無境)"이라고 합니다.
오직 우리의 식 작용만 있을뿐이지 대상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객관대상이 실재하지 않으므로
달리는 자동차 속으로 뛰어들어도 죽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닙다.
이것은 우리들이 실제 인식하는 객관 대상은
우리의 마음을 통해 투영(투사)된 것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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