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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역사

불교의 역사(58) - 유식 불교(6) - 전의와 전식득지

by 아미타온 2024. 9. 25.

<불교의 역사(58) - 유식 불교(6) - 전의와 전식득지 >

 

<서울 조계사 야경>

 

1. 선정삼매를 통한 전의

 

지난 시간에 자신의 허망한 분별에 의하여

실상을 보지 못하는 '변계소집성'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유식 불교에서는 실상을 바르게 보는 선정 삼매의 수행을 통해서

허망한 변계소집성에서 벗어난 바른 지혜를 증득함을 이야기합니다.

 

유식 불교에서 인간의 의식을 나눈 8식을 '전의(질적인 변화)' 시켜

'전식득지(轉識得智, 의식을 지혜로 전의시킴)' 를 이루어야 한다고 합니다.

 

선불교가 분별지가 아닌 무분별지 상태가 되어야만

견성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관점과 같습니다.

 

사람이 좋은 방향으로 바뀌는 것은

의식의 '질적인 전환'이 일어났을 때 말고는 없습니다.

 

유식 불교에서는 이것을 '전의' 라는 개념과,

'전식득지' 라는 용어로 설명합니다.

 

'전의'는 의식이 그냥 바뀌는게 아니라

이전과 질적으로 바뀌었다는 뜻이고,

전식득지는 그렇게 바뀌어진 의식은 지혜의 영역이라는 뜻입니다.

 

 

2. 사량분별과 무분별지

 

 

우리가 선(禪) 불교에서 자주 들어온 개념 중

'사량분별' 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 사량분별에서 '사량'은 7식인 말라식이 주로 하는 의식 작용이고,

분별은 6식인 의식이 주로 하는 의식작용입니다.

 

즉, 7식은 계속 8식에 저장되어 있는 생각들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하고,

6식인 의식은 이렇게 올려진 생각 생각들을 이렇게 저렇게 분석해서 분별하는

역할을 맡는다는 것입니다.

 

이러면 어떻게 될까요?

 

8식인 아뢰야식에 저장된 조각 조각의 생각들은 거의 무한에 가깝습니다.

왜냐면 수많은 삶 동안의 생각들이 전부 저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희노애락 등의 감정으로 생각 조각들을 크게 분류할 수는 있지만,

6식으로 끌어올려져 분별된 생각은 외부 세계와 부딪쳐 다시 약간의 변형이 된 후

다시 8식으로 저장되기 때문에 저장된 생각 조각들은 전부 미세한 차이가 있게 됩니다.

 

'나'라는 자아 의식과 자기 정체성이 있다고 믿는 7식은

끊임없이 8식에 저장된 생각조각들을 끌어올려 6식으로 밀어 부치고,

그러면 6식은 그것들을 감각 기관인 5근의 의식(5식)과 결합해서

판단을 내리는 분별 작업을 무한히 반복하기만 할 뿐,

'깨달음의 지혜'로 질적인 변화를 이룰만한 틈이나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즉, 7식과 6식의 의식작용이자 역할인 '사량분별'을 멈추게 하지 않으면

절대로 '전의'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선불교에서 왜 죽기살기로 '무분별'을 강조할까요?

바로 이 때문입니다.

 

삼법인을 납득하고 사성제를 깊이 믿고 팔정도를 열심히 행한다해도,

그 열심히 행하는 모든 행위에 '사량분별'이 들어있는 한,

해탈이나 열반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유식 불교의 수행자들은 선정 삼매 수행을 통해 분별지에서 무분별지로,

사량분별에서 사량분별이 끊어진 의식상태로의 경험을 얻고자 했습니다.

 

반면 선불교의 수행자들은 비슷하긴 하지만,

화두나 모든 의식활동을 쉬는 '묵조(默照)' 라는 방법으로

사량분별을 끊고자 했습니다.

 

예전에 성철 스님은 '일여(一如)'라는 개념으로

선불교의 삼매를 자신의 언어로 표현했습니다.

 

'어묵동정일여' 또는 '행주좌와 어묵동정의 일여'라는 표현인데,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움직이거나 가만히 있거나,

움직이고 머무르고 앉고 눕고의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자신의 화두나 수행에 완전히 '집중'하고 있는 상태를 '일여'라고 해설했습니다.

 

그같은 일여의 경지에 도달해야만 사량분별에서 벗어난 '전의'가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3. 성소작지, 묘관찰지, 평등성지, 대원경지

 

이와 같은 일여의 경지에 도달하면

제7식인 말라식의 '나다'라는 자아 의식에서

비롯된 착각이 깨어지면 탐진치 삼독은 자연스럽게 사라집니다.

 

이러한 변화를 일으키면 미혹한 식(識)이 지혜로 변화하게 된다.

 

그리고, 탐진치 삼독에 얽매이던 6식(의식)이 변화하여 묘관찰지(妙觀察智)가 됩니다.

 

즉, 대상을 인식하는 6식인 의식 작용이

대상을 묘하게 관하고 통찰하는 지혜로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다'라는 착각을 일으키는 7식이 변하여

자타가 둘이 아니게 되는 평등성지(平等性智)가 됩니다.

 

그래서 마침내 제8 아뢰야식이 대원경지(大圓鏡智)로 변하여

마치 텅비고 둥근 거울처럼 사물의 실상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5식인 안이비설신식이 성소작지(成所作智)로 전환되어

동체대비를 통해 중생들을 완성으로 인도하는

지혜의 삶을 살 수 있는 지혜로 전환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식(識)이 지혜(智)로 전환(전의)하는 것을 '전식득지(轉識得智)'라고 합니다.

 

이것이 유식불교가 전하고자 하는 전식득지의 사상과 수행론입니다.

 

유식 불교는 '나다'라는 착각을 일으키는 자아의식에서

집착한 변계소집의 착각에서 벗어나

아뢰야식까지 지혜로 완전한 전환을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