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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인물사

불교 인물사(58) - 인도 신불교의 아버지 암베드카르(4) - 달리트

by 아미타온 2024. 10. 16.

<불교 인물사(58) - 인도 신불교의 아버지 암베드카르(4) - 달리트>

 

<우물의 물을 얻어먹는 불가촉천민의 모습>

 

1. 달리트

 

암베드카르는 영국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이후(1923년)

불가촉천민이 받는 불평등에 맞서

불가촉천민의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권리 쟁취를 위해 싸웠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차우다르 저수지 공공 시설 이용 투쟁"과

"불가촉 천민의 카라람 사원 출입 쟁취 운동"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 투쟁을 통해 추구하고자 했던 목적은

단순히 공공시설을 이용한다든지,

불가촉천민이 힌두 사원을 출입하여

힌두교의 구성원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동료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견해를 밝혔습니다.

 

"내가 사원 입장 운동에 가담한 것은

억압받는 계급이 우상숭배자가 되기를 바랬기 때문이 아니다.

또, 사원 출입으로 인해 그들이 힌두사회의 평등한 구성원이 된다거나

그 사회의 핵심 부분이 된다고 보았기 때문도 아니었다.

................

내가 그 운동에 가담한 것은

그것이 억압받는 계급에게 활력을 불어주고,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처지를 의식하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암베드카르는 불가촉 천민이 이 운동을 통해

자신의 불평등한 처지를 인식하고 깨어나

자신들의 해방을 위한 노력과 투쟁을 하기를 바라는 의도에서

이 두 운동을 주도한 것이었습니다.

 

암베드카르는 불가촉 천민을 '달리트(Dalit)'라고 불렀습니다.

 

'불가촉 천민'이라는 용어는

인간적 경멸과 추악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달리트는 "몰락한 사람들(the broken man)" 또는

"억압 받는 사람들(depressed people)"이라는 의미입니다.

 

"달리트"라는 용어에는 자신들의

사회적, 정치적 정체성에 대한 인식과 아울러

불평등에 대한 해방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불가촉천민으로 많은 수모를 겪었던 암베드카르는

1923년 암베드카르는 봄베이 고등법원에서 법정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는데,

그는 불가촉 천민과는 상종조차 하지 않으려는 동료 변호사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심지어는 사환 아이들조차도 차 한 잔 권하려고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처럼 일상적인 삶 속에서 당하는

불가촉천민에 대한 모욕적인 차별적인 대우는

달리트의 해방을 위해 끝까지 투쟁하겠다는 결심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결국 암베드카르는 카스트 제도의 불의와 악에 대항하여

끝까지 싸우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가지고 자신들을 "달리트"라고 부르며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불합리한 억압에 맞서 투쟁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암베드카르는

사회의 억압과 착취 구조를 파괴함으로써 

'세상의 재구축'을 시도한 혁명가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암베드카르의 초상을 걸고 시위하는 달리트>

 

2. 불가촉천민(달리트)의 정치적 세력화와 간디와의 갈등

 

이후 암베드카르가 추구한 것은 불가촉 천민의 독자적인 정치 세력화였다.

 

그는 불가촉 천민의 불합리한 불평등을 고발하며

이들이 정치적으로 각성되어 독자적인 정치 세력화를 통해

자신들의 권익을 쟁취해 나가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의회 정치에서 달리트(불가촉천민)의 분리 선거구를 통해

자신들의 대표를 선출하여 의회정치에 진출하기를 원했습니다.

 

1927년 암베드카르에게서 억눌린 민중들을 위해 싸우려는 불타는 투지를 발견한

봄베이 총독(영국인)은 그를 봄베이 입법 심의 위원회 위원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리고, 1930년에 영국 정부는 미래의 인도의 헌법 제정 문제와 관련하여

런던에서 '인도 원탁 회의'를 소집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보이던 암베드카르를

피압박 계층을 위한 대표로 초빙했습니다.

 

1930 11 20, 암베드카르는 이 회의에서 행한 연설에서

단도직입적으로 피압박계층에 대한 무관심을 거론하면서

영국 정부 당국자를 비롯하여 모든 관련자들을 비난했습니다.

 

이어서 그는 인도 최하층민들(불가촉천민)에게도

독자적인 분리 선거구제가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당시에 무슬림, 시크교가 우세한 지역에는

독자적인 분리 선거구제가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암베드카르의 주장에 대해 영국 정부는

1932년 중재령을 통해 독자적인 분리 선거권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 당시 인도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던

간디의 국민의회파가 반발했습니다.

 

간디는 불가촉 천민에 의한 독자적인 선거구제가 확립되면

촌락 단위로 불가촉천민이 별도의 공동체를 구성하게 됨으로서

이슬람이나 시크교도의 분리 선거구 요구처럼 

정치적 분리주의로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간디는 암베드카르의 주장을 불가촉천민이

힌두교라는 큰 울타리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라고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간디와 암베드카르는 부딪혔습니다.

암베드카르와 간디는 원탁 회의 후에 만나 불꽃튀는 설전을 벌였습니다.

 

암베드카르는 간디와의 회담에서 불가촉천민의 분리선거구제를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강하게 간디를 밀어붙였습니다.

 

 "간디 선생님! 

저에게는 조국이 없습니다.

개나 돼지보다도 못한 취급을 당하면서 마실 물도 얻어 먹을 수 없는 이 땅을

어떻게 저의 조국이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러한 나라의 종교를 어떻게 저의 종교가 될 수 있겠습니까?

눈꼽만한 자부심이라도 갖고 있는 불가촉천민이라면

결코 이땅을 자랑스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땅이 우리에게 가하는 불의와 고통은 너무나 엄청납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이 나라에 대해 불충한 생각을 품다라도

그 책임은 전적으로 이 나라에 있는 것이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저를 분리주의자, 반역자라고 취급하더라도 저는 개의치 않습니다.

 

우리의 행동에 대한 책임이 저를 반역자로 취급하는

바로 그 사람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말씀하시듯이 제가 과거에

이나라에 도움이 되는 어떤 애국적인 행동을 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직은 때가 묻지 않은 저의 양심에서 나온 것이지 

결코 이 나라에 대한 애국심에서 우러 나온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수많은 세월을 이 땅 위에서 억눌리고 짓밟히며 살아온

민중들의 인권 투쟁을 위한 저의 투쟁이

이 나라에 다소간에 누를 끼치더라도 그것이 죄는 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저는 이 나라에 어떠한 누도 끼치지 않기 위해

저의 양심이 지시하는 바에 따라 인권 투쟁을 벌여왔습니다.

 

회교도와 시크교도가 불가촉 천민보다

정치적, 경제적 우위에 있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잘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1차 원탁회담에서는

회교도는 물로 피압박 계층에게조차 정치적인 권리를 보장하면서 

적절한 대표파견과 정치적 안전 장치를 원칙적으로 허용하였습니다.

 

저는 이와 같은 원탁 회의의 결정이

피압박 계층에게 대단히 유익한 결과를 초래하리라고 봅니다."

 

인도의 분열을 우려한 간디는

불가촉천민이 독자적인 정치 집단이 되는 것을 꺼렸습니다.

 

이미 무슬림이 독자적인 정치 세력이 된 마당에

불가촉천민의 독립성을 인정한다면

곧 기독교와 시크교, 수천개의 카스트 집단이 같은 요구를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인도 사회는 분열하여 영국에 대항할 힘이 분산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간디는 불가촉천민을 힌두교라는 틀 속에서 포섭하기를 원했습니다.

 

<간디와 암베드카르>

 

3. 간디의 단식과 지정 할당제

 

 두 사람의 주장이 절충을 찾지 못하자 간디는 단식에 돌입했습니다.

 

명목상으로는 "불가촉천민은 힌두 사회의 구성원이며

그들을 힌두교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자"는 것이었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촉천민에 대한 분리 선거구제에 대한 철회를 주장하며

암베드카르의 분리 선거구제에 대한 압박을 가하기 위해 단식에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간디는 단식에 들어가기 전에 불가촉천민에게

"하리잔(Harijan,신의 자식)"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리고, 힌두교 사회에서 이들에 가해지는

불평등을 없애자고 주장하며 하나가 되자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불가촉 제도가 살면 힌두교가 죽는다.’고 말하며

이들의 힌두 사원 참배를 허용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노벨상을 수상한 타고르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간디의 단식을 지지하며 하리잔을 차별하지 말자고 설득했습니다.

 

그리고, 간디가 단식을 하자 많은 힌두 사원들이

불가촉천민의 참배를 허용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특히, 남부 탄조르의 브라데쉬와라 힌두 사원이

사상 처음으로 불가촉천민의 참배를 허용했습니다.

 

아울러, 우물과 저수지, 기타 공공장소도

그들의 이용을 허용하겠다는 선언이 이어졌습니다.

 

암베드카르는 여기에 대해

마하트마(간디)는 왔다 가지만, 

불가촉천민은 영원이 불가촉천민”이라고 말했습니다.

 

힌두사원 출입과 같은 힌두적 틀 속에

불가촉 천민을 수용하는 이러한 일련의 사태보다는

불가촉 천민의 정치적 독자세력화를 통한 해방이 필요하다고 역설했습니다.

 

그러나, 목숨을 걸고 반대하는

마하트마 간디의 단식투쟁에 자신의 의견을 일단 철회했습니다.

 

암베드카르는 인도라는 상상의 공동체에 대한 충성과

그 국가 안에서의 불가촉천민의 낮은 위상에 대해 갈등하였으나,

간디의 단식으 로 인한 전 사회적인 압박이 심해지자

불가촉천민의 분리적인 독립 선거구제를 포기했습니다.

 

그러자, 영국 정부도 원탁회의의 결정에 따른

분리선거구에 대한 법안을 취소했습니다.

 

대신 암베드카르는 간디의 국민회의파와의 협상을 하였습니다.

 

불가촉천민의 분리선거구제를 포기하는 대신 

통합 선거구에서 법정유보 의석제로 대체하는 협상을 벌였습니다.

 

즉, 분리선거구제를 포기하는 대신 

이에 대한 보상으로 불가촉천민에 대한 의석수의 할당을

기존의 78석에서 148석으로 거의 2배 가까이 상향 조절되어

인구 비례에 아주 근접하게 되도록 조정하였던 것입니다.

 

1932년 9 25, '푸나 협정'에 의해

국민의회파와 암베드카르의 협상이 체결되었으며 간디는 단식을 풀었습니다.

 

1935년 전국적인 불가촉천민 연맹을 결성되었으며,

암베드카르는 독립된 정당인 독립노동당을 만들었습니다.

 

1935, 인도 식민 정부는 불가촉 천민에게

중앙 의회와 주 의회에 일정 비율의 자리를 보장했고,

이듬해에는 특별한 '지정 카스트(scheduled caste)'로 지정했습니다.

 

지정 카스트는 의원직공무원직, 입학시험 등에서

일정 비율을 배정하는 법정 할당제의 혜택을 받는 카스트입니다.

 

1937년 봄베이 주 지방 선거에서 국민회의에 맞선 독립노동당은

불가촉천민에게 할당된 18석 가운데 16석을 차지했습니다.

 

한편, 암베드카르는 불가촉천민이

국민회의와 무슬림연맹에 이어 제3의 세력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영국은 장차 시행할 연방제에서 

이러한 불가촉 천민들의 독립된 위상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