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인물사(59) - 인도 신불교의 아버지 암베드카르(5) - 교육>
1. 교육의 중요성
암베드카르는 불가촉천민으로는
당시에 누구도 접하지 못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1920년 봄베이 지역 160여만명의 하층민 가운데
대학 문턱을 넘어본 사람은 암베드카르를 비롯하여 7명에 불과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암베드카르는 미국, 영국 외국 유학까지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교육받은 지식을 온전히 불가촉천민의 해방을 위해 쏟아부었습니다.
그는 불가촉천민 해방 운동을 위한선동가로서, 조직가로서,
변호사로서, 국회의원으로서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학자로서, 교육자로서, 행정가로서,
종교인으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만능이었고 유능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유능함을 온전히 불가촉천민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그는 66살의 나이에 죽었습니다.
밤늦게까지 글을 쓰며 작업하다가 자료 더미를 끌어안고
과로로 죽었다고 합니다.
이번 시간에는 암베드카르의 교육가로서의 면모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암베드카르는 교육이야말로 인생의 성공의 열쇠라고 깊이 믿었습니다.
교육은 인간의 기본적 특성인
사고력과 감성과 의지력을 길러준다고 확신했습니다.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은 불완전한 상태로 머물수 밖에 없고
성공적인 삶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암베드카르는 교육을 매우 중시했습니다.
교육이야말로 발전과 번영의 길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는 부모들이 자신의 자식을 교육시킴으로서
그들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부모가 단순히 자녀를 낳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의 운명(카르마)를 바꾸어 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특히, 아들딸 차별 없이 자녀 교육에 힘써 나갈 때
우리에게는 밝고 희망찬 미래가 약속될 것입니다."
불가촉천민의 교육을 위하여
암베드카르가 취한 첫번째 조치는
뜻있는 사람들의 기부금 및
각종 공공기관의 보조금으로 기숙 학교를 설립하는 일이었습니다
.
그리하여 마하라시트라 주와 카르나타라 주에 세워진 기숙 학교들은
불가촉천민 학생들에게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면서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교육을 실시하였습니다.
그는 종종 이 학교를 방문하여
학생들에게 자신의 꿈과 이상을 피력하곤 하였습니다.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불가촉천민 학생들이
상위 계층의 교육 수준에 떨어지지 않을만큼
학생들에게 고등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각자의 능력을 개발해나갈 수 있는 대학을 설립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자금 부족으로 인해
1946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 꿈을 현실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1946년 암베드카르는 뜻있는 사람의 기부금 및
그가 주도한 "민중교육협회"에 대한 인도 정부의 후원으로
최초의 불가촉 천민 학생을 위한 대학을 설립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가능했던 것은
그가 인도 총독 직속 행정위원회의
노동 문제 담당관(1942~1946)으로서 당시의 총독과 관료들에게
인도 최초의 억압받는 계층을 위한 대학 설립을 설득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2. 불가촉천민을 위한 대학의 설립
암베드카르는 교육의 목적을 학생 각자로 하여금
스스로 공부해가면서 자조(自助)의 길을 찾게 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자기 스스로를 돕는 것이야말로 가장 잘 돕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자극하고, 교육하고, 성장시키십시오.
여러분 자신의 능력에 대해 자신을 가지십시오.
오로지 열심히, 그리고 꾸준히 노력하는 사람만이
자신감과 능력을 갖추고 남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반드시 홀로서기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여러분의 권리를 위해 최선을 다해 투쟁하십시요.
국민이 숫적으로 우세하다고 하여 훌륭한 국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훌륭한 국민이 되기 위해서는 항상 경계를 게을리하지 말고
열심히 교육을 받고 힘을 길러야 하며 자긍심이 차고 넘쳐야 합니다.
국가 발전이든, 개인의 자기 계발이든 어떤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목표를 향해 꾸준히 노력하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우리는 목표를 향해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한데 합쳐야 합니다."
그는 이러한 교육의 목적을 위해서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이상만큼 훌륭한 것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봄베이에 최초로 하층민들을 위해 세워진 대학에
"싯다르타 예술 및 과학 대학"이라고 이름붙였습니다.
이러한 첫번째 대학 설립의 성공은
암베드카르로 하여금 교육 분야에서의 자신감과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그는 1950년 6월에 아잔타, 엘로라 석굴로 가는 관문 도시인
아우랑가바드에 대학을 설립했습니다.
그는 기원전 2세기 펀잡 지방의 왕 밀린다와
승려 나가세나의 <밀린다왕문경>에서 이름을 따서
"밀린다 대학교"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밀린다 대학을 설립하면서 암베드카르는
다음과 같이 고등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저는 힌두 사회의 최하층민 출신이기 때문에
교육의 필요성을 그 누구보다도 절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최하층민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결코 의식주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성장 과정에서 물들어온
노예로서의 열등감을 어떻게 해서든 떨쳐버리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조국에 대한 사명감을 회복하는 일이 가장 시급한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고등 교육입니다.
저는 오직 고등 교육만이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처방이라고 생각합니다."
암베드카르는 생전에 봄베이에 2개 대학을 더 설립하였습니다.
1953년에 설립된 '싯다르타 상경대'와
1956년 설립된 '싯다르타 법대'입니다.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매우 사랑했습니다.
그는 두 대학을 자주 방문하여 불가촉 천민은 공부할 능력이 없다는
힌두교의 그릇된 마누 신화를 철저히 깨뜨려 버리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교육으로 변화된 자신을 예로 들며
그 마누 신화가 완전히 허구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이렇게 암베드카르가 죽는 해인 1956년에 그가 설립한 4개 대학은
5,000여명의 학생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주도한 민중교육협회 산하 11개 대학에는
오늘날 20,000여명이 등록되어 있으며,
이 가운데 3분의 1이 불교를 믿는 최하층 계층 출신의 학생들입니다.
모두 암베드카르의 뜨거운 교육열이 초석이 되어 이룩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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