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 인물사(68) 일본 정토진종의 창시자, 신란(2) -
가마쿠라 신불교 태동 배경(2)>
1. 헤이안 불교
지난 시간에 가마쿠라 시대 이전의
나라 시대의 일본 불교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나라에서 교토(京都)로 도읍을 옮긴
헤이안 시대(794~1192)의 일본 불교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헤이안 시대는 나라의 남도 육종의 세력은 약화되고,
당나라에 직접 유학한 스님들에 의한 실천적인 구제 불교가 발달했습니다.
일본 헤이안 시대를 대표하는 두 분의 스님이 있습니다.
한분은 일본 천태종의 개조 사이쵸(최징 最澄,794~822) 스님이고,
다른 한 분은 일본 밀교 진언종의 구카이(공해 空海,774~836)의 스님입니다.
이 두 스님은 지계(계율 지킴)와 수행을 중시하며
산에서 홀로 수행하던 산림 수행승 출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이쵸(最澄)와 구카이(空海) 두 스님은
공교롭게도 같은 해에 당나라 사신인
견당사(遣唐使) 일행과 함께 중국에 유학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의 두 사람의 역할은 현격하게도 벌어졌습니다.
각각 천태종과 진언종이라고 하는 일본 불교의 두 축을 세우게 되었다.
2. 사이초 스님의 천태종
저 사이쵸(최징) 스님은 9개월간 중국 유학 중에
중국 천태종의 본산인 중국 천태산을 방문하며
'원선계밀(圓禪戒密)'의 4가지 가르침을 받아왔습니다.
즉, 법화경 공부, 선정 수행, 계율 지킴, 밀교 수행 이라는
소위 4가지 불교를 융합한 종합 불교인 천태종을 들여와
귀국 후 수도 교토의 동쪽에 있는 히에이산(比叡山)에 천태종을 개창합니다.
지금도 일본 천태종의 총본산인 헤이에산 엔랴쿠지(延曆寺)는
그 때 사이쵸 스님이 세운 일승지관원(一乘止觀院)이 모태입니다.
그러나, 그의 행보는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그 시련은 남도 육종의 대표 주자였던
법상종(유식 종파)의 토쿠이치(德一)와의 논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도쿠이치는 인간은 다섯 종류의 서로 다른 능력이 태어날 때부터 결정되어 있으므로
누구라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실제로는 옳지 않다는 5성각별설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사이초는 <법화경>의 가르침에 입각하여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는 일승의 가르침을 설하고 있다며 반론하였습니다.
법상 교학과 논쟁한 다음에 부딪힌 장애는
"계단(戒壇)의 설립" 문제였습니다.
당시에는 정식으로 계를 받아 승려가 되기 위해서는
나라에서 설립한 동대사 계단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이쵸는 히에이산 엔랴쿠지에 일본 천태종의
독립된 계단을 설치하여 대승 보살계를 받기를 원했습니다.
즉, 교리와 실천의 양면에서 대승 불교의 실질적 확립을 주장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현계론(顯戒論)>을 통해서
승관을 두어 승려를 국왕이 통제하는 것은
정도에 어긋난다고 하는 반론을 제기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천태종 독립계단의 숙원은 그의 생애에는 이루어지지 못했으나
그의 사후 7일이 지나 일본 천황의 허가를 받아 새로운 계단원이 설치되었습니다.
다음 해에 새 수계 제도가 시작되고,
5년 뒤에 마침내 천태종의 본산인 히에이산에
천태종의 수계를 하는 독립 계단인 "천태 계단원"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러한 사이쵸(최징)의 활동은
대승 불교의 최고봉인 천태, 선, 화엄, 정토, 밀교 등의
제사상을 총망라하는 법화일승의 통일 불교를 일본에 완성시켰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습니다.
3. 쿠카이 스님의 진언종(진언밀교)
다음은 쿠카이(공해 空海)입니다.
그는 일본 불교 역사상 최고의 천재로 이름높습니다.
그는 당나라 유학 이전부터 유불선 삼교의 우열을 논한
<삼교지귀(三敎指歸)>를 찬술할 정도로 불교에 해박한 지식을 가졌습니다.
쿠카이는 중국에서는 2년 동안 유학하였습니다.
그는 중국 밀교 불공(不空) 화상과 선무외(善無畏) 화상의 제자인
현초(玄超)로부터 각각 금강계와 태장계의 밀교를 배운
장안 청룡사의 혜과(惠果) 스님로부터 진언밀교를 전수받았습니다.
귀국 후에는 왕실의 후원 속에
일본 수도 교토의 도지(東寺)를 진언밀교의 도량으로 만들고
고야산(高野山)에 진언종의 총본산인 콘고부지(金剛峰寺)를 건립합니다.
아울러 쿠카이는 서민을 위한 종합 교육 학교를 설립하여
민중들에게도 크게 지지를 받았습니다.
쿠카이는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그 중 <비밀만다라 십주심론(秘密曼茶羅十住心論)>과
그 요약본인 <비장보약(秘藏寶)>이 특히 유명합니다.
쿠카이는 보살심 발현의 과정을 인간 성장의 단계와 비교하여
10종의 단계로 분류하여 현교(顯敎)와 제종의 각각을 단계별로 두고
최상위에 밀교가 위치하고 있음을 설한 밀교 중심의 수행 체계를 세웠습니다.
오늘날에도 시코쿠 88사찰 순례로 유명한
일본의 '홍법 대사(大師)신앙'의 대상은 바로 이 쿠카이입니다.
쿠카이 스님에 대한 일본인들의 신앙은 민중 신앙의 큰 맥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이쵸와 쿠카이는 일본 헤이안 양대 산맥입니다.
동시대를 살았던 두 사람은
천태종의 사이쵸가 연장자임에도 불구하고
밀교의 부족한 면을 메우고자 제자의 예를 갖추고
쿠카이로부터 관정(灌頂)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제자를 쿠카이에게 보내서
밀교의 가르침을 배워오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타이한(泰範)이라는 제자가
쿠카이 문중에 귀의한 것이 빌미가 되어 둘의 교류는 끊어져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사람의 업적은 후대의 일본 불교에 영향을 미쳐서
사이쵸는 법화일승의 묘법을 통해 대승의 불법을 총섭하려고 시도하였으며,
쿠카이는 진언밀교의 비의를 통해 제사상과 철학을 체계적으로 종합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들은 개유불성과 즉신성불의 정신으로
현실에 대한 구제종교로서의 대승적인 처방전을 일본에 도입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4. 헤이안 불교의 정토 신앙의 태동
헤이안 불교는 중기로 접어들어 귀족불교의 경향을 띠게 됩니다.
특히, 왕실과 귀족의 천태종과의 관계는 깊어지고,
동시에 현세구복을 위한 밀교의 수행이 발달하여 진언종의 영향력도 확대되어 갔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쿠야(空也)의 칭명 염불 포교,
겐신(源信)에 의한 관상염불과 정토 왕생을 기원하는 정토신앙도 출현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와 중국과는 다른 일본 특유의
정토 계통의 불교가 왕성해지는 토대를 형성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전쟁과 전염병의 도래와 함께
말법 시대의 위기감이 일본에 널리 확산되었습니다.
헤이안 시대 후기에 이르러서는 각종 천재지변과 정쟁의 난무,
고대국가의 기반이었던 율령제의 해체 등으로
전통 교단과 교학에 대한 의문이 확산되었습니다.
그래서 관승에서 이탈하여
지경자(持經者), 히지리(聖), 쇼닌(上人) 등으로 불리는
포교자 혹은 개인 수행자들과 특정한 장소를 중심으로 한 염불집단 등도 등장했습니다.
이들은 불교의 민중화를 재촉하는 가운데
가마쿠라 신불교의 여명을 알리는 나팔수로서의 모습을 띠었고
가마쿠라 신불교의 여러 조사들이 배출되면서 일본 불교는 질적으로 새롭게 변화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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