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 인물사(70) 일본 정토진종의 창시자, 신란(4) -
신란의 고뇌 >
1. 출가
신란(親鸞)은 1173년 일본의 수도였던 교토의 하급 무사
후지와라 아리노리(藤原有範)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가 4살 때 아버지가 집을 나가고,
8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불행을 겪게 되었습니다.
부모와의 이별을 통해 그는 내생에 대해
깊은 의문과 고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신란은 작은 아버지의 인도로
12살 때 교토에 있는 일본 천태종 도량인
'쇼렌인(청련원 靑蓮院)'에서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습니다.
쇼렌인은 교토에 있는 유명한 절입니다.
일본에서는 왕족이 출가하여 주지가 된 절을
'몬세키(문적 門跡) 사찰'이라고 합니다.
교토에 있는 쇼렌인은
교토 왕궁과도 가까워
교토의 대표적인 몬세키 사찰입니다.
신란이 출가했을 때는
벗꽃이 흐드러지게 핀 어느 봄날이었다고 합니다.
왕족 출신으로 후일 일본 천태종의 종정이 된
천태좌주 지엔 앞에서 신란은 출가를 청했습니다.
그런데, 해가 저물 때가 되어
지엔은 신란에게 내일 다시 만나 출가를 의논하자고 했습니다.
그 때 어린 신란이 지엔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바치면서
오늘 당장 출가하자고 말했다고 합니다.
"내일도 피어 있으리라 생각했던 그 벗꽃.
한밤중에 비바람에 떨어진다는 것을 모르네."
화려하게 피어 있지만,
비바람이 불면 떨어지는 벗꽃처럼
우리 인생의 무상함을 말하는 시였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출가하여 도를 닦고 싶다는 말이었습니다.
그 시를 들은 지엔 스님은 깜짝 놀라 내일을 기다리지 않고
그날 밤에 당장 머리를 깎아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2. 수행
쇼렌인에서 출가하여 사미 생활을 보내던
신란은 15세가 되자 히에이산(比叡山) 엔랴쿠지(延曆寺)로 갔습니다.
히에이산은 교토 동북쪽에 있는 해발 800m의 큰 산으로
천태종의 총본산으로 '엔랴쿠지 (延曆寺) '라는 큰 절이 있었습니다.
신란도 천태종의 정식 승려가 되기 위해
천태종의 총 본산인 히에이산 엔랴쿠지에 보내진 것이었습니다.
엔랴쿠지는 8세기 무렵 중국 유학승이자 천태종의 개조인
사이쵸 스님이 세운 천태종의 사찰이었습니다.
고야산(高野山)의 진언종과 함께 가마쿠라 막부 이전
헤이안 시대부터 일본 불교의 양 기둥으로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히에이산 엔랴쿠지는 국가에서 공인받은 관승이 되기 위한
수계 독립 계단이 있던 몇 안되는 절이기도 했습니다.
교토의 왕족, 귀족 출신의 출가자들은
대부분 히에이산 엔랴쿠지에서 수계를 받고 정식 승려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일본 종파 불교를 이끈 큰 스님들이
대부분 히에이산 엔랴쿠지에 출가하여 공부를 해서
히에이산 엔랴쿠지는 '일본 불교의 산실(産室)'로 불립니다.
그런데, 히에이산의 천태종 수행은
힘든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습니다.
히에이산 엔랴쿠지는
천태종 개조인 사이초 스님이 제정한
엄격한 수행 프로그램에 입각하여 치열하게 수행했습니다.
계율, 독송, 좌선, 참회, 밀교 수행 등의
종합 불교적인 천태 수행법은 매우 힘들었다고 하는데,
신란은 이 천태종 사찰에서 힘든 천태종 수행을 진지하게 임했습니다.
그러나, 그 힘겨운 수행 속에서도 원하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약 20년간 출가 수행자로서의 수행을 해왔던 신란은
그 동안 닦아 온 자신의 수행과 학문에 결코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였습니다.
당시는 무사 권력의 내전 속에서
귀족 사회로부터 무사 사회로 권력이 이동하며
봉건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질서가 모색되던 시기였습니다.
당시 헤이안 불교는 왕족과 귀족들의
열성적인 귀의와 보호를 받던 귀족 불교였습니다.
귀족들은 조정의 본을 떠 절과 탑을 세우는데 힘쓰는 한편,
기도와 법회를 자주 열어 그 권세를 자랑하였습니다.
이렇게 귀족들과 연결된 승려들은 세속적 권력과 결탁하게 되었고,
절은 귀족으로부터 기부받은 토지를 지키기 위하여
승병까지 두게 됨으로써 많은 폐단을 낳게 되는 근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승려 사회도 수행의 결과보다
그 집안 출신에 따라 출세가 결정된다는 사실로 신란은 깊이 실망했습니다.
신란은 히에이산에서 상행당에 머물면서
귀족들의 내생을 위해 기도하며 염불하는 당승(堂僧)의 소임이었습니다.
당승의 소임 속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노력했지만,
신란은 히에이산에서는 깨달음을 얻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자신의 번뇌와 당시의 부패한 불교 사회,
그리고 막부 정권 하의 혼란한 시대 상황 등으로
그는 말법 시대라는 강한 시대 인식을 하게 되었습닏.
그리고, 그 혼탁한 시대를 살아가는 승려로서
자신의 구원을 강하게 갈구하였습니다.
3. 계시
신란은 29살이 되던 해 당시 엘리트 불교의 메카였던
히에이산 엔랴쿠지 수행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하산했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수행을 원하는 승려들처럼
산을 내려가 암자에서 혼자서 자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쇼토쿠 태자가 건립했다는
교토의 육각당(롯카쿠도 六角堂)에 머물렀습니다.
육각당은 일본 불교의 개조인 쇼토쿠 태자의 원불인
여의륜 관세음보살 좌상을 모신 전각(관음전)입니다.
여의륜(如意輪) 관세음 보살님은 이름처럼 뜻대로
소원을 들어주는 '여의주'와 악귀를 무찌르는 '윤보'를 가지고 계십니다.
6도 중생 중에서도 천(天)계를 윤회하는
중생들의 미혹을 구제하는 관세음보살님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교토 육각당 여의륜 관은 보살님은
수명 연장, 질병 치료, 난산 순산 등의 가피가 있고,
쇼토쿠 태자의 원불로 유명하기 때문에
지금도 일본 간사이 지역 33관음 중 한 분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히에이산에서 수행의 성취를 보지 못하고 좌절했던
신란은 어떤 돌파구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신란은 육각당에서 여의륜 관세음보살님께
100일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95일째 되던 날 새벽에
여의륜 관세음보살님이 꿈에 나타나서
다음과 같이 계시를 주셨습니다.
"수행자가 전생의 인연으로 만약에 여인을 범하게 된다면
내 그대의 여인이 되어 드리겠소.
그리고, 평안하게 일생을 보내게 하고,
즉음에 이르러서는 극락에서 태어나게 하리라."
이 계시를 통해 신란의 고뇌를 알수 있습니다.
신란은 히에이산 생활을 청산하고 어떤 앞길을 걸어야 하는지와
출가 승려로서 불끈불끈 성욕(욕망)의 치성함으로 인해
악도에 떨어질지 모른다는 고뇌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의륜 관세음보살님은 꿈에서 나타나
여인의 모습으로 너의 성적 욕망을 다 풀어 주겠다고 하시고,
너를 잘 인도해서 내생에는 극락 왕생의 길로 이끌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육각당에서 여의륜 관세음 보살님의 계시를 받은
신란은 마음의 안심을 얻었습니다.
자신의 수행의 길에 대한 번민과
치성한 욕망의 억압 때문에 고뇌하던 신란은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 생활을 하면서도
행복하게 정토 신앙의 길을 갈 수 있다는 안심을 얻었던 것입니다.
육각당 여의륜 관세음보살님의 계시를 통해
자신을 억누르던 고뇌에서 벗어나
이제 신란의 독자적인 길을 갈 수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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