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 인물사(66) 일본 정토진종의 창시자, 신란(1) -
가마쿠라 신불교 태동 배경(1)>
1. 일본 불교의 특징과 신란 스님
일본 불교는 우리나라와는 다른 역사적 배경 속에서 발전해 왔습니다.
일본 불교는 종합 불교인 우리 나라와는 달리
종파 불교적 전통이 강합니다.
일본 불교는 정토 진종, 정토종과 같은 염불 신앙을 주로 하는 종파,
임제종, 조동종과 같은 선종 계열의 종파,
일련종, 천태종과 같은 법화 계열 종파 등과 같이
종파적 특성이 분명히 나타나는 종단이 많습니다.
이러한 일본 불교의 종파 불교의 골격이 형성된 것은
우리나라 고려 시대에 해당하는 가마쿠라 막부 시대(1192~1334)입니다.
가마쿠라 막부 시대는 지금의 도쿄 서남부의 해안에
자리잡은 카마쿠라(鎌倉)라는 도시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 賴朝)가 무사 권력 기구인 막부를 세워
교토의 천황 세력을 누르고 권력을 잡았던 시대를 말합니다.
고려 시대 무신 정권 시대처럼
일본 가마쿠라 막부 시대도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기였습니다.
가마쿠라 막부 시대 이전에 일본 불교는 국가의 비호를 받으며
천황을 중심으로 국가의 안녕을 비는 호국 불교적 특성을 띄었습니다.
스님은 품계에 따라 국가에서 선발하였습니다.
국가에 의해 선발된 스님들은 불교 공부나 수행 외에
국가 안녕을 위한 기도를 봉행하는 관료승의 역할이었습니다.
이 때의 일본 스님을 국가에 소속된 스님이라는 뜻의 '관승(官僧)'이라고 합니다.
관승들은 민중의 교화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마쿠라 막부 시대에 접어들자
민중들에게 다가가서 불법을 전하는 스님들이 많이 등장했습니다.
이들 스님들은 각자의 종파적 특성이 강한 불교 신행법에 전념하였습니다.
염불이면 염불, 참선이면 참선, 법화 신앙이면 법화 신앙 등의
자신의 전문 종파에 입각한 신앙과 수행법을 민중들에게 제시하였습니다.
이들 스님들의 노력 속에 일본의 많은 민중들이 불교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때 오늘날 일본 불교의 주류를 이루는 많은 종파가 성립되었습니다.
인도에서 소승 불교에서 대승 불교의 시대로 넘어가듯,
가마쿠라 막부 시대에 나타난 일본 불교의 새로운 흐름을
"가마쿠라 신(新)불교"라고 합니다.
가마쿠라 신불교 시대에 <나무아미타불> 염불 신앙을
민중들에게 전파하며 민중들의 구제에 관심을 두고
활동했던 유명한 스님이 있습니다.
바로 신란(親鸞) 스님입니다.
신란 스님은 일본 최대 종파인 '정토진종'의 시조로 불리고 있습니다.
정토진종은 <나무아미타불> 염불해서 극락왕생하는 종파입니다.
이번 시간부터 일본 불교의 신란 스님의 삶과 신앙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무사 권력인 가마쿠라 막부 시대의 격동기를 살아가며
신란 스님이 이전의 불교에 대해 어떤 비판 의식을 가졌는지,
어떻게 염불문에 귀의하여 일본 민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불교 신앙을 펼칠수 있었는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2. 쇼토쿠 태자와 일본의 불교 수용
오늘은 첫번째 시간으로 가마쿠라 신불교 이전의
일본 불교와 스님들의 특징과 동향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그래서, 가마쿠라 신불교가 태동하게 된 배경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일본의 불교 전래는 우리 한반도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538년 백제 성왕이 보낸 불상과 불구,
스님들에 의해 일본에 최초로 불교가 전래되었습니다.
6세기 당시 일본에서 권력을 잡고 있던 소가(蘇我) 가문이 있습니다.
친 백제계로 불교를 받아들이려는 가문이었습니다.
소가 가문은 일본 전통 신앙(神道)를 고집하는
군신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쇼토쿠(聖德) 태자와 함께
적극적으로 불교를 수용하여 불법을 널리 펼쳤습니다.
일본에서 불교가 공인된 것은 쇼토쿠(聖德) 태자의 공헌이 큽니다.
쇼토쿠 태자는 최초의 일본 사찰인 호코지(法興寺)에서
고구려 혜자 스님과 백제 관륵 스님으로부터 불법을 배웠습니다.
<일본 서기>에 쇼코투 태자는 다음과 같이 설했다고 합니다.
"세간은 허망한 것이며 오직 부처님만이 참되다."
"어떤 악도 행하지 말고 모든 선을 행하라."
쇼토쿠 태자는 불법을 포교하기 위해
고구려 담징의 금당 벽화로 유명한 호류지(法隆寺)를 절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일본 17조 헌법을 만들어 불법승 삼보를 존경하고,
불교를 적극적으로 보호하도록 명했습니다.
쇼토쿠 태자 이후 불교는 일본에 정착하였고
불교 교단은 국가의 비호 속에서 크게 발전했습니다.
그리고, 한반도와 중국으로부터 불교 교학을 받아들였습니다.
701년에 일본에서는 정치 규범인 율령이 제정되었습니다.
이 율령에 근거하여 천황 중심의 정치 체제가 성립되었습니다.
이 때 일본에서 승려의 신분을 규정하는 <승니령>이 제정되었습니다.
승니령을 통해 일본 불교는 국가의 통제 속에서
천황을 중심으로 국가의 안녕을 비는 기도를 하는 스님들을 양성했습니다.
이러한 기도를 담당한 승려들이 관료승, 즉 관승이었습니다.
<승니령>에 의해 관승의 신분이 규정되었고,
승려는 독자적으로 승적에 등록되었습니다.
이 법령에 의하면 관승은 전등대법사, 법교, 법안, 법인으로
이어지는 법의 높고 낮음에 따른 4가지 승위(僧位)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국사, 율사, 승도, 승정 의 교단의 운영에 필요한
4가지 승관(僧官)으로 자리가 정해져 있었습니다.
관승에게는 군역 등의 세금의 면제,
의식주의 보장, 형법상의 특권 등이 부여되었습니다.
형법상의 특권이란 예를 들어, 승려가 사형에 처해질 죄를 범하더라도
그보다 한 단계 낮은 형이 부과되는 것입니다.
3. 관승과 진호불교
관승의 특권으로 관승은 거의 귀족층 자제들이 출가하였습니다.
이런 한편으로 관승은 민중 교화의 제약이나
부정한 것을 기피해야 하는 등의 제약도 많았습니다.
민중 교화의 제약이라고 하는 것은
소속 사원의 허가를 받지 않고서
절 밖으로 나가 민중들에게 불교를 설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부정한 일을 기피한다는 것은
사체를 만지는 등의 부정 탈만한 일을 꺼리고 피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일본 스님들이 주로 장례식을 주관하지만,
당시로서는 부정한 일로 기피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제약을 어기면 30일 동안 근신하야만 하는 조항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관승이 되기 위해서는 시험을 치르고
천황의 허가가 필요하는 등 여러 가지 절차가 있었습니다.
천황은 누구를 출가시키고 몇 명 출가시키는 등의
허가권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출가 희망자는 <법화경>과 <최승왕경>을 음과 뜻으로 읽을 수 있는가,
전문 교학에 능통한가 등에 대한 경전 시험을 치렀습니다.
때문에 출가 예비군에 해당하는 예비 승려들은
스승에 해당하는 승려에게 경전을 배울 필요가 있었습니다.
출가 전에 스승에게 배우는 것을
"누구의 방에 들어간다"는 뜻의 "입실(入室)'이라고 불렀습니다.
시험을 보아 합격하면 삭발, 수계, 법명을 받고,
가사 등의 법복을 입는 득도 의례를 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스승 앞에서 10가지 계율을 지킬 것을
맹세하는 수계를 받으면 정식 승려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 절차를 거치면 정식 승려가 되었다는 증명서인 도첩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각 사원에 배속되어 국가의 안녕과 무사함을
기도하는 일을 주로 하며 수도하였습니다.
이러한 관승의 출가 제도는 초기에는 잘 지켜졌으나
가마쿠라 막부 시대 이후로는 형식화되어
누구를 언제 출가시키는가는 각 사원에 맡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렇더라도 관승들의 출가에 대한
최종적인 권한은 원칙적으로 천황에게 있었습니다.
오늘날 공무원의 정원처럼 관승도
정원이 원칙적으로 정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한 사찰에 출가할 수 있는 정원은
매년 10명으로 제약되었고,
천재지변이 닥칠 때 그것을 승려들의 독경이나 기도로
누를 필요가 있었을 때 임시로 출가를 더 시킬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천재지변이 일어나는 것을
눈에 보이지 않는 악귀의 힘이라고 믿었는데,
승려의 독경이나 기도 등에 의해 악귀나 악령을 퇴치하여
천재지변을 진압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는 이러한 불교를 진압할(진 鎭), 보호할(호 護)을 써서
'진호 불교(鎭護佛敎)'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관승들은 일종의 국가 공무원이었기 때문에
가사의 색깔도 품계에 따라 제약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대가 지남에 따라 율령이 형식화됨에 따라
실제 관승들의 색깔도 변화하여 헤이안 시대(10세기) 이후로는
관승의 가사 색깔이 민간인들이 주로 입는 흰 색으로 변해갔습니다.
이렇게 일본 초기 불교는
국가의 중앙집권체제의 정비에 맞추어
국가의 안녕을 위한 기도를 담당하는 승려의 통제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사원의 감독에 관한 법령이 제정되었습니다.
4. 동대사와 동대사 대불
8세기 일본 쇼무(聖武)천황은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741년에 각 지방에 1개씩 국분사(國分寺)의 건립을 명하였습니다.
전국에 국분승사(國分僧寺, 비구사찰)와 국분니사(國分尼寺, 비구니사찰)를 건립하여
중앙에서 책임자를 파견하였습니다.
743년에 쇼무 천황은 당시 일본 수도인 나라 동대사 (東大寺) 에
거대한 청동 대불인 비로자나불을 조성할 것을 발원했습니다.
751년 동대사가 완성되고 대불이 안치되었으며,
이후 동대사(東大寺)는 일본 화엄종의 총 본찰로서
전국의 국분사를 통제였습니다.
즉, 화엄의 세계관에 입각하여
수도에 동대사에 비로자나 부처님을 모시고,
지방에 1개씩 있는 국분사를 통해 화엄경을 통치 이념으로 했던 것입니다.
751년경 일본 수도인 나라를 중심으로 일본 불교는
삼론종, 법상종, 성실종, 구사종, 율종, 화엄종의 6종(六宗)이 있었습니다.
이를 '남조 육종'이라고 합니다.
나라(奈良)시대에 남도(南都) ‘나라(奈良)’를 중심으로 번성한 종파 불교로서
일본 천황의 인가를 받았습니다.
이 6종 중에 율종, 법상종, 화엄종이 강한 세력을 형성했고,
현재까지도 전승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도 삼국 시대나 고려 시대 때
왕들이 국가 지배 체제를 공고히 위한 지배 이념으로 불교를 숭상했습니다.
고구려,백제, 신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인
일본의 지배층도 동일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회적 신분이 높은 귀족 출신들의 출가를 장려하고,
승려들의 품계에 차등을 두어 승려들을 국가에서 통제하였습니다.
대규모 불사를 통해 민심을 모으고 국가 안녕을 위한 기도를 벌이는 등
불교가 민중들 개인보다는 국가나 지배 집단의 안녕을 위해 옹호되었습니다.
신라의 원효 대사가 민중 속으로 들어간 이유는
국가 지배 체제의 안정화를 위한 관승이 아니라
개인(민중)의 구원에 촛점을 맞추어져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원효 대사는 머리를 기르고 천촌만락을 누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마쿠라 신불교가 태동하게 된 배경에는
우리 나라 원효 대사처럼 국가화된 일본 불교에 대한 반성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불교가 국가의 안녕이 아니라 개인의 구원에 촛점을 맞추게 된 것.
이것이 가마쿠라 신불교에서 신란을 비롯한 많은 승려들이
탄생하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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