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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구경

법구경(116) 아라한이 된 산따띠 장군 이야기

by 아미타온 2024. 12. 21.

<법구경(116) 아라한이 된 산따띠 장군 이야기>

 

<국립 청주 박물관 - 불비상>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시던 어느 때,

코살라 국왕 파세나딧왕과 장군인 산따띠와 관련하여

게송 142번을 설법하셨다.

어느 때 산따띠 장군은 국경의 반란을 평정하고 사왓티에 개선했다.

 

그러자 국왕 파사나딧 왕은

그의 승리를 축하하고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많은 하사품을 내렸다.

 

그리고,  그의 명예를 높여 주려고 화려한 연회를 베풀어

어여쁜 기생들로 하여금 그를 7일 동안 모시도록 해 주었다.  

왕이 베풀어 주는 7일 동안의 향연에

산따띠 장군은 매우 만족하여 마음껏 먹고 마시며 즐겼다.

 

그러다 보니 술에 취한데다가 

어여쁜 여인들에게 매혹되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되었다.

 

산따띠가 그처럼 향연을 즐기던 마지막 날

그는 화려하게 장식된 왕실의 코끼리를 타고 강변으로 목욕을 나갔다.

 

그때 마침 탁발을 나오시던 부처님과 마주치게 되었는데,

평소 같으면 내려와서 부처님께 머리를 숙여 인사를 올리던 그가

이 날은 만취하여 부처님을 무시하고 그냥 고개만 끄덕이면서 

어디 가시느냐는 시큰둥한 태도를 보였다.

 

부처님께서는 그의 태도에 대해 미소를 지으실 뿐 다른 말씀이 없으셨다.

 

이에 아난 존자는 부처님께서 왜 미소를 지으시는지 여쭈어 보았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저 장군은 지금 저 모습 그대로 머지않아 여래를 찾아올 것이니라.

그때 그는 여래의 짧은 법문을 듣고 나서 아라한을 성취할 것이며,

아라한이 된 뒤 반열반을 실현할 것이니라."

 

 

산따띠 장군 일행은 이날 하루를 강변에서 목욕을 한 뒤

먹고 마시고 춤추며 노래하며 아주 즐겁게 보냈다.

 

그런 뒤 저녁때가 되자 마지막 밤을 어여쁜 기생들이

춤추며 노래하는 것을 보고 즐기려고 아늑하고 조용한 정원으로 갔다.

 

그날 춤을 출 여인은 산따띠 장군이 아주 사랑하는 기생이었는데,

그녀는 장군의 마음에 들려고 7일 동안

금식에 가까운 정도의 음식만 먹은 상태였다.

 

그 때문에 그녀는 아주 쇠약해져 있었다.

 

그 기생은 그날 저녁 열심히 춤을 추다가

그만 위장에 충격을 받아 쓰러지더니

입을 크게 벌리고 눈을 치뜬 상태로 급사해 버리고 말았다.

이 갑작스런 사태는 산따띠 장군의 술기운을 확 걷어가 버렸다.

 

그는 어여쁜 여인을 잃어버린데 대해

큰 충격을 받고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망연자실했다.

 

그가 받은 충격은 너무나 컸는지 

그는 어디든 가서 마음의 의지처를 찾고 싶은 생각만 강렬했다.

 

그래서, 그는 동행자들에게

부처님이 계시는 기원정사로 가자고 독촉했다.

 

그는 수도원에 도착하여 부처님께 인사를 올렸다.

그러나,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말문을 열지 못했다.

 

그래서, 일행 가운데 한 사람이

오늘 있었던 일을 부처님께 세세하게 말씀드렸다.

 

그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장군도 말문이 열려서 부처님께 이렇게 애원했다.

"부처님이시여!

제발 저로 하여금

이 슬픔과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십시오.

부처님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제 의지처가 되어 주시오.

그리하여 제가 평화로운 마음을 갖게끔 도와주십시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여래의 아들이여!

안심하라.

너는 너를 도와줄 스승을 바르게 찾아왔나니,

여래는 너에게 위안을 줄 수 있는 스승이며,

너의 참다운 의지처가 되어 주겠노라.

 

장군이여!

네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긴 세월 동안 나고 죽는 윤회를 거치면서

그 여인이 죽게 되어 흘린 탄식의 눈물이

이 세상의 모든 바닷물보다도 오히려 많으니라."

부처님께서는 산따띠 장관을 따뜻한 말로 위로해 주신 다음

게송을 읊어주시는 한편 설법도 해주셨다.

 

그 게송의 뜻은 다음과 같았다.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두고

너는 여인에 대해 집착해 왔으나

이제 너는 마땅히 그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너는 미래에 다시는 그러한 집착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고,

집착하려는 마음조차도 먹지 말라.

 

네가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욕망과 색욕은 조용히 가라앉게 되고,

그러면 너는 가만히 네 마음을 관찰하여

마침내 열반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이 설법을 들은 산따띠 장군은 즉시 아라한을 이루었다.

 

 

 

아라한이 된 그는 자기를 관찰해 보고

자신의 수명이 다했음을 알았기 때문에

부처님께 이렇게 사뢰었다.

"부처님이시여!

제가 지금 이 자리에서 반열반을 실현하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이제 저의 시간은 다했습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침묵으로써 응락하셨고,

산따띠는 하늘 높이 자란 야자나무만큼의 높이로 허공에 솟아오르더니

결가부좌를 한 채 불(火)의 삼매에 들어 그 자리에서 반열반을 실현했다.

 

그렇게 열반에 든 그의 몸은

자기 몸에서 나온 불의 기운에 의해

허공에서 스스로 불꽃에 휩싸여 화장되었고,

뼈는 사리가 되어 떨어졌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깨끗한 천을 펴서

그의 사리를 모두 모으라고 하시었다.  

많은 대중이 모인 어느 때 비구들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이시여!

산따띠는 장엄스런 장식이 달린

장군의 관복을 입은 채 반열반에 들었습니다.

 

그를 수행자라고 보아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브라흐민(재가자)이라고 보아야 하겠습니까?"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그는 그 둘 모두로 불러도 좋으니라."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다음 게송을 읊으셨다.

비록 그가 화려한 장군의 옷을 입었어도
그의 마음이 고요하고 번뇌로부터 벗어났고
감정을 다스려 도의 관찰을 이루었고
청정한 마음으로 일체 중생들에 대한 원한심을 버렸다면
그는 브라흐마나이자 사문이자 비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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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직면

 

출가한 비구도 아니고

전장에서 수많은 적을 죽였을 장군입니다.

 

이처럼 단박에 화끈하게 아라한과에 이르는

이번 법구경 이야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전장에서 수많은 적병을 죽이고

적병과 아군이 죽는 것을 눈으로 목격했을 장군은

이와 같은 수많은 죽음의 순간에는 직면의 체험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사랑하는

기생의 돌연한 죽음을 목격하고는

심한 충격으로 직면의 계기를 맞이하고

부처님의 가르침과 인도를 통해 바로 아라한 과를 성취하였습니다.

 

골이 깊으면 산이 높은 것처럼

애착 관계가 강했던 여인에 대한 강한 집착이

여인의 갑작스런 죽음이라는 계기를 통해

오히려 깨달음을 얻는 동기로 작용되어지는 것입니다.

 

집착이 고(苦)의 원인이 되고

탐진치 삼독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를 얻게 하고 낳게 하는 동기로 전환되는 것입니다.

 

'번뇌즉보리'의 상황입니다.

 

고정된 것이 없이 텅 비어 있다는

대승불교의 "공성(空性)"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좋은 예입니다.

 

 

2. 용수 보살과 번뇌즉보리

 

대승불교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용수 보살도

출가하기 전에는 엄청난 바람둥이였다고 합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왕의 여자인 궁녀를 탐하여

궁궐에 친구와 함께 잠입하여 궁녀들과 즐겁게 놀았습니다.

 

그러다가 왕에게 들켜 도망가다가

친구와 궁녀가 잡혀 죽는 모습을 보고

정신이 들어서 불법의 수행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합니다.

 

부처님이 녹야원에서 5비구 다음으로

제도하셨다는 야사 비구도 그렇습니다.

 

바라나시 최고 부잣집 아들에

남부러울 것 없이 쾌락을 향유하며

청춘을 구가하던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쾌락의 삶 속에서도

'이렇게 사는게 아닌데..' 하는

삶의 허망함을 많이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함께 놀다가 추악하게 잠든 여인들의

모습을 보고 쾌락의 종말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녹야원에서 부처님을 만나

5비구보다 훨씬 빠른 시간에 아라한 과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점에서 산따띠 장군은

용수 보살이나 야사의 삶과 많이 닿아 있습니다.

 

 

3. 허망함(무상함)

 

수행자는 허망함(무상함)을 강하게 느껴야 합니다.

 

사랑도 명예도 돈도

다 쓸모없고 부질없다는 것을 강하게 느끼는 순간

그 때야 비로소 불법의 진실과 직면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열린 문 안으로 

발을 딛고 들어가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본인의 그동안 쌓아온

내공과 스승의 인도와 가르침에 의해 결정될 것입니다.

 

아무튼 허망함(무상함)의 자각은

수행자에게 참으로 중요한 직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무상, 고, 무아 를

불교에서 '3가지 진리의 도장(삼법인)'으로 받들까요?

 

이 다르마(진리)의 도장을 찍어야

깨달음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산따띠 장군처럼 허망함을 강하게 느껴야

자신이 정말 의지할 대상을 찾게 되고

허망함에서 벗어날 수 있고

슬픔과 고뇌에서 해방될 수 있는 다르마(진리)를 구할 수 있습니다.

 

비록 그 체험이 산따띠 장군에게는

큰 슬픔이고 괴로움이었겠지만,

그 체험이 아라한 과를 성취하게 하는

그가 맞이한 큰 축복이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수행의 결과는 결코 시간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출가를 했고 머리를 깍았다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허망함을 강하게 체험하는 직면의 기회를

축복의 계기로 만들 수 있느냐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깨어있어야 하고 집중해야 합니다.

스승에 대한 귀의심이 탄탄하게 받쳐줘 있어야 합니다.

 

산따띠 장군이 열반에 드는 장면은

중생으로서의 마지막 졸업식의 장면입니다.

 

동시에 아라한으로서의

위대한 입학식의 장면이기도 합니다.

 

하늘 높이 올라 불의 삼매에 들어 열반에 드는 장면은

이러한 중생으로서의 영원한 졸업과

번뇌에서 해방된 성자로서의 새로운 입학을 축하하기 위한

장엄한 불쇼라고 생각합니다.

 

그 위대한 졸업과 입학을 부처님의 축복 속에서

화끈한 불쇼와 함께 맞이할 수 있는

산따띠 장군은 참으로 복이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록 그가 화려한 장군의 옷을 입었어도
그의 마음이 고요하고 번뇌로부터 벗어났고
감정을 다스려 도의 관찰을 이루었고
청정한 마음으로 일체 중생들에 대한 원한심을 버렸다면
그는 브라흐마나이자 사문이자 비구이다."

 

부처님으로부터 이러한 최고의 찬사와 축복을 받을 수 있다면

산따띠 장군은 얼마나 행복하고 영광스러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축복과 영광과 감동의 순간이

재가에서 수행하는 우리들에게도 찾아왔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