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구경(117) 아라한이 된 삘로띠까 띳사 비구 이야기>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시던 어느 때,
삘로따까 띳사 테라와 관련하여 게송 143번과 144번을 설법하셨다.
어느 때 아난 존자는 탁발을 하다가 길거리에서 지나고 있었다.
그는 아주 초라한 누더기를 입고 찌그러진 그릇에다
음식을 구걸하는 소년을 보고 깊은 동정심을 느껴
그를 데려다가 사미(어린 스님)로 만들었다.
그러자, 그 사미는 자기가 구걸 다니며 입던
초라한 누더기와 찌그러진 그릇을 보자기에 소중히 싸서
수도원 뒷산 나무에 매달아 두는 것이었다.
그는 나이가 들어 정식 비구가 되었을 때
"삘로띠까 띳사"라고 불리었는데,
그 이유는 소년 시절 아주 초라한 옷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비구가 된 이래 그는 과거처럼
굶주리거나 헐벗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그로서는 모든 문제가 아주 잘 풀린 셈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때때로 비구 생활보다는
차라리 구걸을 하며 살던 때가 더 좋았던 것이 아닐까,
그러니 계를 반납하고 다시 옛날의 거지 생활로 돌아가 버릴까 하는
생각이 떠오르곤 하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삘로띠까는 누더기 옷과 찌그러진 그릇을
매달아 놓은 수도원의 뒷산으로 올라가 다음과 같이 자기를 꾸짖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어리석은 자여!
너는 잘 먹여 주고 재워 주며 입혀 주고
또 존경까지 해주는 이곳을 정녕 떠나고 싶은 것이냐?
너는 헤어진 누더기 옷을 다시 걸치고
찌그러진 그릇을 손에 든 채
천대와 멸시를 받으면서
정처 없이 이곳저곳으로 구걸을 다니겠다는 것이냐?"
그는 이런 말로 자기 자신을 꾸짖어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나, 이삼일쯤 지나면 또 그런 생각이 나는 것이어서,
그는 다시 그곳으로 가서 전과 같이 스스로를 꾸짖으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는 이 같은 마음의 갈등을 자주 느꼈기 때문에
수시로 수도원 뒷산을 오르내렸다.
그러자 다른 비구들이 그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겨
거기에 자주 가는 까닭을 물었고, 그때마다 그는
"스승을 뵈러 갔었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왜냐하면 누더기 옷과 찌그러진 그릇이
그에게는 스승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같이 자신을 다잡아 가면서
자기 마음의 변화를 예의 관찰하였고,
수행 주제를 누더기 옷에 두어 열심히 수행 정진했다.
그 결과 그는 마침내 오온이 무상한 것을 깨달아 아라한이 되었다.
그 다음부터 삘로띠까띳사는 더 이상 옛날처럼
누더기 옷과 찌그러진 그릇이 있는 곳에 가지 않았다.
다른 비구들은 그것을 이상하게 여겨 삘로띠까 띳사에게 질문해왔다.
"형제여!
당신은 왜 이제는 스승에게 가지 않는 거요?"
그러자 삘로띠까 띳사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스승이 필요했을 때는 나는 스승을 찾아가야 했지만,
이제 나는 스승이 필요없게 되었습니다."
이 대답을 듣고 비구들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말은 그가 이미 아라한이 되었다는 뜻인지라
삘로띠까 비구가 자기들에게 큰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비구들은 부처님께 가서 이렇게 사뢰었다.
"부처님이시여!
저 비구는 간접적인 어법을 통해서
자기가 아라한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그 비구들을 꾸짖으시며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삘로띠까는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그는 지금 진실을 말하고 있느니라.
그는 그가 말한 그대로 옛날에는 스승이 필요했지만
이제는 과거에 그의 스승이었던 그것들이 필요없게 되었느니라.
비구들이여!
삘로띠까띳사는 스스로 자신을 지도하고
경책하고 꾸짖고 달래면서 열심히 수행 정진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릇된 것인지를 알게 되었으며,
사물의 원인과 결과가 어떠한지 그 성품을 바르게 보아
생사윤회의 근본을 깨달아 아라한이 된 것이니라.
그러므로 그는 이제 그의 옛 스승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게 되었느니라."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다음 게송 두 편을 읊으셨다.
이런 사람은 실로 흔치 않다.
악행으로부터 자기를 억제하고 부끄러움을 알며
스스로 깨어 자기를 다스리나니
마치 준마에게 채찍질할 이유가 없듯
이런 사람에게도 그러하다.
좋은 말은 몸에 채찍이 닿기만 해도 힘차게 달리듯
계속되는 생사 윤회에 경각심을 일으켜 부지런히 정진하여
신심, 계행, 노력, 마음 집중, 그리고
다르마의 정확한 식별의 지혜를 갖추어 수행했기에
그는 한량없는 고(苦, 괴로운 윤회)를 모두 떨쳐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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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와신상담
"와신상담" 이야기가 있습니다.
중국 춘추 전국 시대 오나라와 월나라는 원수지간이었습니다.
오나라 왕 부차가 월나라 왕 구천에게
전쟁에서 패하고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그 패배의 치욕과 월나라 왕 구천에 대한 원수를
갚기 위한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
매일 거친 나무 침대에서 잠을 잤습니다.
그리고, 쓰디쓴 곰의 쓸개를 빨면서
패배의 치욕을 되새기고 원수를 갚기 위한
전의를 다졌다는 일화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시간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굳건했던 결심과 잊지 못할 기억도
시간이 흐르면 약해지고 잊혀 집니다.
그 결심과 기억을 다잡고
의지 박약에 빠지지 않기 위해
거친 나무 침대에서 자고 쓰디쓴 곰쓸개를 빨았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패배의 치욕과 원수에 대한 분노를 잊지 않기 위한
와신상담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요?
부차는 자신의 원수는 갚았지만,
전쟁을 벌여 수많은 백성을 죽이고 월나라에 모욕을 주고
두 나라의 원한은 더욱 깊어져서 "오월동주"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한편, 오나라에 원한을 품은 월나라 구천은 절치부심하며
미인 서시를 보내는 미인계를 써서 부차를 쾌락에 빠뜨리고
결국 구천이 부차에게 재복수하는 것으로 결말은 마무리됩니다.
분노나 원한과 같은 악한 의지를
굳건하게 하기 위한 노력의 결말은 비록 성공해도
많은 사람을 힘든 고통의 구렁텅이에 빠뜨리고 자신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와신상담" 이야기의 뒷끝은 씁쓰름합니다.
악의는 단단하게 키우면 키울수록
괴로움으로 향하게 만드는 속성이 있습니다.
2. 선한 의지
이번 법구경 이야기는 "와신상담" 이야기와 많이 닮아 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부차는 거친 나무 침대에서 잠을 자고
쓰디쓴 곰쓸개를 빨며 분노와 원한의 악한 의지를 키웠다면,
삘로띠까 비구는 초라한 누더기와 찌그러진 밥그릇을 보며
수행자로서의 선한 의지를 굳건히 했다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되어 계율을 지키고
선하고 바르게 살아가고 있슴에도 불구하고
자꾸 예전의 헐벗고 배고프던 거지 때의 생활이
더 그리워지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무엇일까요?
바로 거지 근성이고 중생심입니다.
해야 할 것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욕망에 자꾸 마음이 돌아 가는 것.
이것이 거지 근성과도 같은 중생심의 특징입니다.
중생심에서 벗어난 진정한 성자는
해야할 일을 하고 싶어하고 노력 없이 해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진정한 성자가 되기 전까지는
해야만 하는 것, 선한 의지를 다지기 위해
자신의 마음을 다잡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부처님은 수행은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다는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당장의 생존 욕구나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의지는
물살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한 신념이나 수행의 의지는
물살의 흐름을 역행하여 가는 것입니다.
물살을 거슬러 오르기 위해서는
당연히 물살의 흐름에 역행할수 있는 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뗏목을 만들어 노를 저어가며
물살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입니다.
당장의 생존 욕구나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의지는
노력하지 않아도 그냥 생깁니다.
그러나, 선한 신념이나 수행에 대한 의지는 그냥 생기지 않습니다.
욕구대로 욕망대로 살아온 자신의 삶에 대해 성찰해야 하고 반성해야 합니다.
마치 삘로띠까 비구가 자신의 거지 생활을 돌이켜보고
성찰하며 통렬히 반성하듯 말입니다.
그리고, 선한 신념이나 수행에 대한 의지는
만들어야 하고 유지해야 하고 성장시켜 나가야 합니다.
마치 뗏목을 만들어 노를 저어가며
물살의 흐름에 역행하며 나아가듯이 말입니다.
3. 성자(聖者)
삘로띠까 비구에게 있어
거지 시절 초라한 누더기와 찌그러진 밥그릇은
중생심에 대한 자기 성찰과 반성의 도구였습니다.
그리고, 노를 저어 물살의 흐름에 역행하며
나아갈 수 있는 뗏목이었습니다.
그래서, 거지 근성과 같은 중생심으로 향하는
욕망을 통찰하고 반성하며 선한 신념과 수행 의지를 굳건히 세우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그에게 초라한 누더기와
찌그러진 밥그릇은 방편이면서도 스승과 같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했습니다.
더 이상 자신이 해야할 것, 선한 의지를
힘겨운 노력과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평화롭고 자유롭게 구현하며 사는 경지가 된 것입니다.
진정한 성자가 된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중생심이라는
욕망의 물살을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물살을 거슬러 오르기 위해서
그에게는 뗏목이라는 스승과 방편이 필요했지만
더 이상 그에게는 뗏목이 필요없어졌고
뗏목을 머리에 이고 다닐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마치 잘 달리는 준마에게 채찍질을 할 필요가 없듯이
스스로 깨어나 스스로 자신을 다스리는 사람에게
뗏목은 필요없는 것입니다.
<법구경>의 게송처럼
먼저 거지 근성과 같은 중생심에
경각심을 가지고 자기 통찰을 하고 반성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뗏목을 만들고 스승에 귀의하여
선한 의지와 수행의 열의를 일으켜 노력해야 합니다.
이러한 노력 끝에 나아가야 할 목적지는 어디인가요?
신심, 계율, 노력, 마음 집중,
그리고 법에 대한 정확한 식별의 지혜 라는
5가지 보검을 허리에 차고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평온하고 자유로운 성자의 세계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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