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역사(74) - 신앙의 불교(10) - 미륵 하생과 혁명가 궁예>
1. 메시아, 미륵
한편, 미륵 신앙은 모순된 세상을 뒤엎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혁명적 불교인에게 주목되는 신앙이었습니다.
원래 미륵의 원어인 "마이트리아"는
인도의 광명의 신인 "미트라(Mitra)"에서 왔다는 설이 있습니다.
"미트라"가 중동 쪽에서는 "구원자"를 뜻하는
"메시아"라는 말로 변형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도 미륵 부처님은
어두운 세상을 구원하는 메시아,
즉 구원자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미륵 신앙인들은 미륵의 새로운 세상인 용화 세계를
이 땅에 지금 현재 건설하려는 혁명적 열정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2. 궁예와 미륵 신앙
대표적인 사람이 후고구려(태봉)를 세운 궁예입니다.
궁예는 신라 말기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후고구려를 세웠는데,
원래 미륵을 섬기는 법상종 계통 사찰 세달사 승려 출신입니다.
궁예는 서자 출신의 신라 왕자 출신이라고 하지만,
신라에 반기를 들고 왕위에 올라 스스로 미륵불이라 칭했습니다.
자신의 두 아들을 각각 청광보살(관음보살을 뜻함),
신광보살(아미타불을 뜻함)이라 하였습니다.
그는 머리에 금관을 쓰고 몸에는 가사를 입었습니다.
외출할 때면 항상 채색비단으로 장식한 백마를 탔으며
동남동녀들에게 금깃발과 향과 꽃을 들려 앞세우고
비구승 200명에게 범패를 부르고 염불하며 자신을 뒤따르게 하였습니다.
궁예가 외출할 때의 모습은 용화수 아래에서 3회에 걸쳐 설법한 후
제자들을 이끌고 입성하는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그는 또한 스스로 불경 20여 권을 짓고,
직접 설법을 하며 세상을 교화하는 미륵불로 칭하였습니다.
그러나, 역사서에 나온 궁예의 행적은
미륵 부처님의 평화로운 용화 세계와는 거리가 멉니다.
궁예는 미륵불을 참칭하면서 전제적인 공포정치를 펼쳤습니다.
많은 신하들을 죽이고, 자신의 두 아들과 부인 강씨까지
죽여버리는 참혹한 모습은 결국 자기 자신의 몰락을 초래했습니다.
그는 결국 신하들에게 축출당하고
고려 태조 왕건에게 왕위를 빼앗겼습니다.
미륵의 용화세계를 꿈꾸었던 궁예는
도망하다가 백성들에게 피살되었다고 전합니다.
민중들은 삶이 고단할 때
자신들을 구제해 줄 구원자의 도래를 바랍니다.
불교의 미륵 신앙은 세상의 변혁을 바라는
하층민들에게는 매력적인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나, 궁예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궁예는 민중의 이러한 믿음을 이용하여
미륵의 현신을 칭하고 권력을 추구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입니다.
궁예는 신라의 지배 계급과 세상의 모순에 반대하여
통일 대국을 미륵신앙을 구현하며 민중들에게 큰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후일에는 교만하고 부패하고 타락하여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궁예의 후고구려 건립이었습니다.
이처럼 혁명가들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이상적 모델로서
궁예처럼 미륵 신앙을 이용하려고 했던 측면도 분명히 있습니다.
3. 견훤과 금산사
견훤이 세운 후백제는 미륵신앙이 그다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백제를 계승한 후백제는 미륵신앙이 뿌리 깊었습니다.
견훤은 만년에 아들인 신검에 의해 김제 금산사로 유폐되었습니다.
금산사는 백제 법왕이 짓고 통일 신라 시대 때
법상종의 개조 진표율사가 중창한 미륵신앙의 근본도량입니다.
4. 미륵 신앙과 민중
미륵신앙은 신라 말의 혼란기뿐 아니라
무신정변 이후의 고려 후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의 조선 후기에 크게 유행했습니다.
고려말 우왕 때의 이금은 스스로를 미륵으로 자처하다가
혹세무민의 죄목으로 처형당했습니다.
조선 숙종 14년인 1688년에는 승려인 여환은
“미륵이 다스리는 세상이 온다”고 소문을 퍼뜨리고
자신을 따르는 교도들을 무장시켜 도성으로 쳐들어갈
계획을 세웠다가 역모죄로 처형되었습니다.
이처럼 미륵신앙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미륵 부처님의 불국토를 건설한다는 측면에서
세상의 모순 속에서 억업받던 이들에게
희망과 꿈을 심어주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나, 잘못 왜곡되면 계율과 참회를 중시하는
미륵 신앙의 본질과는 어긋날 수 있습니다.
미륵 신앙의 잘못이 아니라,
그 신앙을 이용하는 사람의 잘못입니다.
아무튼 역사적 굴곡이 심했던
우리 민족에게 미륵 신앙은 민중들 가슴에 파고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 미륵의 불국토인 용화세계가 도래하여
평화롭고 안락한 세상이 오기를 늘 기도했던 것입니다.
경기도 안성에 가면 미륵 불상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외에도 동네에 소박하게 서 있는 많은 미륵불상이
이와 같은 민중들의 미륵 부처님에 대한 열망을 보여줍니다.
소박한 석불 미륵 불상부터
국보 중의 국보인 미륵반가사유상에 이르기까지
미륵 신앙이 아미타불 정토 신앙 못지 않게 널리 성행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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