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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역사

불교의 역사(73) - 신앙의 불교(9) - 신라의 미륵 신앙과 원효 대사

by 아미타온 2024. 12. 29.

<불교의 역사(73) - 신앙의 불교(9) - 신라의 미륵신앙과 원효 대사>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1. 미륵 신앙과 화랑도

 

백제의 미륵 신앙처럼

신라도 미륵 신앙이 성행했습니다.

 

특히, 신라는 현실 정토적 미륵 신앙이 널리 퍼졌습니다.

 

신라의 화랑 제도는 미륵 신앙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진지왕 때

미륵 부처님을 섬기는 흥륜사의 승려인 진자 스님이 

미륵 불상 앞에서 미륵 부처님이 화랑으로 화신하여

세상에 나타나기를 빌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륵 부처님이

백제 웅천(현재의 공주) 땅에서 ‘미시’라는 이름으로 나타나

7년간 화랑의 우두머리인 국선으로 모셨다고 하는 '미시랑' 설화가 전합니다.

 

또한, 화랑 시절 김유신이 자신을 따르는 낭도들을

'미륵 부처님께 향을 바치는 낭도들의 무리'라는 뜻의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불러습니다.

 

용화세계는 미륵 부처님이 오시면 건설한다는 정토(불국토)입니다.

 

즉, 미륵 부처님이 오시면 향을 바치는 화랑 향도라고 부를 정도로

미륵 신앙이 성행했슴을 알수 있습니다.

 

이는 당시 신라에 널리 퍼져 있던 미륵 하생 신앙을 느낄 수 있습니다.

 

 

2. 원효 대사의 <미륵상생경종요>와 참회 

 

한편, 원효 대사도 미륵 신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면서

<미륵상생경종요> 등 미륵과 관련된 많은 저술을 남겼습니다.

 

원효 대사는 '미륵 보살님'을 염불하기만 해도

도솔천에 왕생할 수 있다고 민중들에게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원효 대사는 <미륵상생경 종요>에서 

미륵 신앙의 핵심은 참회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미륵 보살님이 계시는 도솔천으로 상생을 하거나,

하생하는 미륵 부처님을 좀 더 빨리 모실 수 있으려면,

이 세상이 또는 자신이 어떠해야 하는가 라는 조건이 필요합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조건은

자신이 과거로부터 저질러왔던 잘못에 대한 깊은 참회가 필요하고,

그 참회를 바탕으로 해서 십선법을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선법은 십악에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십악은 <천수경> 외울 때 나옵니다.

 

‘살생중죄금일참회, ’투도중죄금일참회....‘ 등으로 쭉 나갑니다.

 

살생, 도둑질, 사음의 몸(행동)으로 짓는 잘못 3개,

거짓말, 이간질, 꾸미는 말, 악구의 말로 짓는 잘못 4개,

탐욕(탐), 분노(진), 어리석음(치)의 생각으로 짓는 잘못 3개를 합해서 십악입니다.

 

십선은 이것과 반대되는 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선은 선(善)이기 때문에

살생을 하지 않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려주는 적극적인 행위를 해야 합니다.

 

훔치는 것을 그만두는 것으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보시를 해야 합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고 진실만을 말해야 하고,

이간질하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화평하게 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꾸미는 말을 하지 않고 수다스러운 말,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고 딱 할 말만 하고,

상처주는 말 대신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고

위로해주는 말을 해야 합니다.

 

탐욕을 멈추고 베풀고,

화내지 않고 인욕과 자비를 행해야 하고,

어리석은 마음을 내지 않고 부처님의 가르침인

연기법과 사성제에 입각한 삶을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와 같은 법을 설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자신이 저질러왔던

십악을 돌이켜서 십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결국 십악에 대한 참회를 하면

십선을 행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따로 십선에 대한 얘기를 할 필요가 없이

진정한 참회를 한다면,

'해라' , '하지마라'고 할 것도 없이 십선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3. 원효 대사의 미륵 사상과 참회의 가치

 

이것은 심리적으로 굉장한 통찰입니다.

 

‘그래 내가 착한 일을 해야지, 뭘 해야지.’라고

아이들처럼 뚝 시작한 일은 언제든지 물러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악을 행하면서 한편으로 선을 행하는

이중적인 모습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이와 같은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모습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진실로 참회를 할 수만 있다면,

이와 같은 모순적이고 이중적인 모습에서 탈피해서

한 점의 티끌도 묻지 않은 선의 길로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원효 대사가 그렇게 참회를 강조한 것은,

계율을 강조해서 그 사람을 억압하거나,

아니면 억압시키고자 하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만 볼 것이 아니라,

참회가 가지고 있는 순수함, 근본적인 면을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원효 대사가 <미륵상생경종요>에서

말하고자 했던 핵심 내용입니다.

 

결국 참회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실질적으로 보고 있는 모습은

선한 모습도 있고, 악한 모습도 있지만,

왜 악한 모습이 그렇게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가에 대한 깊은 반성과 통찰이라는 것입니다.

 

어째서 많은 사람들이 사회 변혁을 꿈꾸고,  운동을 하고,

이러저러한 종교를 만들고, 제도를 바꾸고, 교육을 하고, 계몽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은 혼탁하고, 악이 만연되어져 있고

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꼬리를 물고 나타나는 것인가요?

 

중생의 무명심 때문이다,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넘어가게 되면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깨달음에 힘쓰라는 말밖에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깨달음에 히쓰라는 것은

방편적인 면에서도 그렇지만,

실제적인 구현의 문제에서 보았을 때,

너무 추상적이고 어려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추상적이고 어려운 문제를 

보다 쉽게 그 눈을 뜨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했을 때,

각 개인적인 참회는 깨달음 보다는 훨씬 쉽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통감하고,

자신의 잘못과 악업에 대해서 깊은 뉘우침을 하는 모습은

세상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연기의 이법을 통찰해 내는

깊은 지혜가 필요한 깨달음의 자각보다는 훨씬 쉽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성적인 것, 학문적인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성과 자신의 잘못을 돌이켜볼 수 있는 정신만 가지면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된다는 것을,

그렇게 보는 것으로써

신도 변하고 세상도 정토로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원효 대사는 이와 같은 문제를 명확하게 통찰하고

미륵 신앙의 본질은 참회에 있다는 것을 설한 것입니다.

 

이처럼 아미타 부처님에 대한 미타 신앙에서는 볼 수 없었던

'참회'의 가치가 미륵 신앙에서는 선명하게 보여지는 것입니다.

 

미륵 신앙과 미타 신앙은 똑같이

'상생(上生)'을 이야기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미륵 부처님이 내세의 부처님이라고 한다면

아미타 부처님은 타방세계의 부처님으로서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미륵 신앙과 미타 신앙의 결정적 차이점이 무엇이냐고 했을 때,

그것은 미륵 신앙은 참회의 신앙이고 참회의 불교라고 딱 집어놓은 것입니다.

 

이것이 원효 대사의 뛰어난 점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