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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역사

불교의 역사(87) - 티벳 밀교(1) - 티벳 불교의 역사

by 아미타온 2025. 3. 19.

<불교의 역사(87) - 티벳 밀교(1) - 티벳 불교의 역사>

 

<티벳 승려들의 공부 시간>

 

11세기 인도는 이슬람의 침입을 받게 됩니다.

 

이슬람은 불상을 파괴하고 승려들을 죽이는 등

인도의 불교(밀교)는 커다란 위기를 맞게 됩니다.

 

이슬람의 침입을 기점으로

많은 인도 밀교 수행자들이 티벳으로 넘어갔습니다.

 

티벳으로 넘어간 인도 밀교 수행승들에 의해

티벳 불교는 인도 밀교의 전통을 이어받게 됩니다.

 

티벳 불교의 모습을 통해 인도 밀교적 전통이

어떻게 전승되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티벳 라사의 포탈라궁>

 

1. 티벳 불교의 전래와 수용

 

티벳에 불교가 널리 퍼지기 시작한 것은 8세기 부터입니다.

 

7세기 초반 송첸감포 왕(Srong btsan sgam po, 재위 643∼649)이

작은 부족들을 통합해서 통일 티벳 왕국을 처음 세우게 됩니다.

 

그 때 중국 당나라와 평화 조약 조건으로

당나라 문성(文成) 공주가 시집올 때 

결혼 예물로 석가모니 부처님 불상을 모셔왔다고 합니다.

 

그 불상을 모실 법당을 티벳 수도인 라사에 세웠지만,

불교 교학을 민중에 널리 전파할 발판은 마련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 8세기 후반 티송데첸 왕(Khri srong lde brtsan, 742∼797)이

불교를 국교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국가에서 관리하는 번역청에서 산스크리트 경전과

중국에서 들여온 불경을 티벳어로 번역하면서

티벳은 풍부한 불교 경전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티벳은 불보살님에 대한 공경과 선인선과 악인악과의

기본적인 불교의 가르침이 민중들에게 설해졌습니다.

 

부처님과 보살님, 독각승, 성문승을 숭배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지 않고 악한 행위를 하면 지옥에 태어나거나

나쁜 윤회를 맞이한다는 인과법에 대한 가르침이 널리 설해졌습니다.

 

그리고, 자비와 지혜의 두 가지 공덕을 함께 쌓아야 한고,

10계(10선법)를 지켜 착한 선행을 실천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업(業)에 관한 이론과 고집멸도의 사성제, 연기법법,

나가르주나(용수보살)의 '공성'에 대한 가르침에도 중점을 두었습니다.

 

중국, 중앙아시아, 인도 등의 여러 경로를 통해서

티벳에 불교가 전해졌기 때문에

티벳에 전해진 불교는 상이한 교리와 불교 외적인 개념들도 섞여 있었습니다.

 

<티벳의 성스러운 산, 카일라스>

 

일반 민중들은 어려운 불교 교리보다는

여러 형태의 기도와 신비 체험을 하는 수행을 더 좋아했습니다.

 

특히, 티벳 인들은 히말라야의 거대한 자연의 힘을 두려워했고,

자연 환경 어디에나 신들이 살고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불교가 티벳 땅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그런 성향의 티벳 인들에게 어울리는 요소를 수용해야 했습니다.

 

<파드마 삼바바>

 

그래서, 티송데첸 왕이 인도에서 초청한 대학자인

‘샨타락쉬타(S첺?taraks.ita, 寂護, 725∼788경)’나

‘카말라쉴라(Kamalasヵ?a, 蓮華戒, 700∼750경)’ 등의 논사들의 가르침보다

자연신(自然神)들을 불교의 수호신으로 만든 당대 인도 최고의 밀교 수행자인

‘파드마 삼바바(Padmasambhava, 蓮華生)’의 밀교적 신통력이 더 호응을 받았습니다.

 

티벳의 자연 환경과 티벳 인들의 성향이 밀교가 적합했던 것입니다.

 

한편, 티벳에서는 중국 불교의 수행법을 따를 것인지,

인도불교 수행법을 따를 것인지를 결정할 시기가 왔습니다.

 

티송데첸 왕은 티베트 최초의 사원인

삼예(bsam yas) 사원(755년경 설립)에서

인도와 중국의 양쪽 불교 대표를 초청해서

대토론(792∼794)을 벌인 끝에 인도 불교를 선택했습니다.

 

그 선택에는 정치적인 배경도 있었습니다.

 

중앙아시아의 영토를 사이에 두고

티벳과 중국 사이에는 영토 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중국은 티벳을 문화적으로 침식시킬 방편으로

중국 불교의 영향력을 강화하려고 했기 때문에

티벳 왕은 중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인도와 가까이하려는 결단을 내린 것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티베트의 불경 번역은

인도에서 가져온 산스크리트 경전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9세기 전반의 랄파첸 왕(Ral pa can, 재위 815∼838)은

불경 번역 사업에 주력하고,

사원과 승려들에게 지나칠 만큼 재정적 후원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노역과 병역을 면제해 주었기 때문에

국가의 경제기반과 군사력이 흔들릴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왕의 형인 랑다르마(glang dar ma ,809∼842)는

티베트 토속교인 ‘본’(Bon)교의 지지자들과 음모를 꾸며 

왕을 암살하고 왕위에 오른뒤 불교를 심하게 탄압했습니다.

 

랑다르마 왕은 모든 사원들을 허물고,

승려들을 강제로 환속시켰습니다.

 

그 후 842년에 한 승려가 랑다르마 왕을 살해한 후에

티벳의 정통 왕조는 사라지고 무정부 상태가 되었습니다.

 

불교를 후원하던 왕가가 사라지고,

불교 탄압으로 인해 사원과 승려들이 사라지자

티벳에는 그 후 100년 동안 공식적으로

불교를 가르치고 수행할 장소나 기회가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밀교 경전을 구해서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든지,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수행을 빙자한 도덕적 타락이 횡행하였습니다.

 

불교 수행을 빙자한 타락한 행동이

유행하는 것을 개탄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불교를 정화하고 재건하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되었습니다.

 

10세기 말에 서부 티베트를 중심으로 시작된 불교 부흥 운동은

계율을 철저히 지키는 불교를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아티샤 스님>

 

당시의 서부 티벳 왕은

인도 비크라마쉴라(Vikramasila) 대학의 학장이던

아티샤(Atisha  982∼1054)를 티벳으로 초청했습니다.

 

그래서, 불교 부흥 운동을 벌이고,

도덕적인 불교 수행을 전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아티샤 스님은 당대 최고의 학승일 뿐 아니라,

최고의 밀교 수행자였습니다.

 

그러나, 티베트 인 제자들의 간청에 의해

주로 마음 닦는 법에 관한 가르침을 폈습니다.

 

후대에 어떤 티베트 수행자는 아티샤 스님이

그 당시 밀교를 티벳에 적극적으로 퍼뜨렸다면

많은 티벳 인들이 빨리 성불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을 거라고 한탄하기도 했습니다.

 

밀교는 강력한 수행방법을 사용해서 빨리 성불함으로써

많은 중생들을 도울 수 있는 수행이기 때문입니다.

 

아티샤 스님의 직계 제자들의 계열을

‘카담파(bka’-gdams-pa)’라고 부르는데,

그들은 계율을 철저히 지키는 것을 중요시하고,

마음을 정화하는 것을 주된 수행으로 삼았습니다.

 

아티샤 스님에게서 시작된 마음 닦는 수행은

지금도 티베트 불교에서 중요한 수행으로 전승되고 있습니다.

 

<티벳 스님>

 

2. 제2차 불교 전래

 

10세기 말 이후에 인도에서 검증되고 인정받은

산스크리트 밀교 경전이 티벳에 전래되었습니다.

 

그래서, 티벳 어로 새로 번역하거나,

이미 티벳 어로 번역되었던 밀교 경전을 새롭게 편집했습니다.

 

새로운 밀교 경전을 ‘새 밀교(규사르마, rgyud-gsarma)’라고 부르고,

그 이전에 번역되었던 것을 ‘옛 밀교(규닝마, rgyud- rnying-ma)’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닝마파의 수행을

비정통적인 밀교라고 간주하는 풍조가 생겼습니다.

 

11세기가 되면서 티벳의 여러 곳에

큰 사원이 세워지고 여러 종파가 생겨났습니다.

 

아티샤 스님의 직계 제자들을 통해서

이어진 계열을 ‘카담파’라고 불렀습니다.

 

8세기부터 9세기까지 불교 탄압 이전에

티베트에 들어왔던 불교를 유지하는 계열을

‘닝마파(rnying-ma-pa)’라고 불렀습니다.

 

그 외에 ‘카규파(bka’-brgyud-pa)’와

‘사캬파(Sakyapa)’라는 종파가 생겼는데,

그 종파들은 닝마파의 성격을 반쯤 유지하면서

인도로부터 새롭게 전해진 밀교의 성격을 혼합한

가르침을 펴고 수행했습니다.

 

<티벳 불교 최대 종파 겔룩파의 수장인 달라이 라마>

 

현재 티벳에서 가장 교세가 강한 겔룩파(dge-lugs-pa)는

카담파의 정신을 이어받아 14세기 후반에 새로 생긴 종파입니다.

 

제2차 불교 전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은

인도에서 오랫동안 불교 공부를 하고 온

티벳인 번역가들과 수행자들이었습니다.

 

이때부터 ‘라마’는 티벳 불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라마는

불교의 가르침에 정통하고

수행이 높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경전과 불교 수행에 대해 정확한 설명을 해줄 수 있었습니다.

 

불교경전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자의적인 해석을 한 결과로 타락한 행동이 유행하던 사태를

이미 경험했던 티벳 사회는 제2차 불교 전래 이후에는

스승의 철저한 지도 아래 수행하는 것을 필수적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티벳 사회에서 스승인 '라마'의 위치는 점점 더 확고해졌습니다.

 

특히, 밀교를 수행할 때는

라마에게서 직접 밀교에 대한 설명을 듣고

그 수행을 할 수 있다는 허가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본교의 전통 춤>

 

3. 티벳 불교와 본교의 습합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에는 본(Bon)교가 티베트의 토속 종교였습니다.

 

그러나, 8세기의 티송데첸 왕은

왕권과 맞먹는 세력을 확보한

귀족들과 결탁한 본교 사제들을 견제했습니다.

 

그리고, 국민의 도덕성을 개선시키고,

높은 정신문화를 수용하려는 뜻에서 불교를 받아들였습니다.

 

본교의 입장에서는 티벳에 새로 들어온 불교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불교가 티벳에 처음 들어오는 과정은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본교는 불교경전을 모방해서 경장과 논장을 만들어 퍼뜨리고

오히려 불교가 본교의 경전을 표절했다고 선전했습니다.

 

그래서, 왕은 본교의 문헌들을 모두 압수해서 태우라고 명령했습니다.

 

본교도들은 미래에 적당한 때가 이르면

세상에 발견되도록 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경전을 비밀스런 장소에 숨겨 놓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10세기 초부터 본교의 비밀경전들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발견된 본교의 경전들을 모은 것을 14세기에 와서 편찬했습니다.

 

방대한 본교 경전에 대한 연구가 이제 막 시작됐기 때문에

본교의 원래 모습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본교와 습합된 티벳 불교>

 

우리가 접하는 본교의 경전들은

불교가 티베트에 들어오기 전에

이란과 중앙아시아의 영향을 받으며

만들어졌던 본래의 본교의 가르침이 아니라,

8세기에 불교가 티베트의 국교로 정해진 이후에

본교가 티베트에서 살아남기 위해

불교와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형되어 성문화된 가르침입니다.

 

어쨌든 8세기에 불교와 본교가

티베트에서 경쟁 관계에 있을 때,

티베트에 새로 들어온 불교는

토속교인 본교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본교도 막강한 왕권을 뒤에 업고 있는

불교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불교도 토속적인 민속종교인

본교가 지닌 여러 요소들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티벳 민중 속으로 파고들 수가 없었습니다.

 

본교에서 숭배하던 여러 자연신들을

불교의 수호신으로 수용했고,

본교 의식에서 쓰던 도구를

불교의식 도구로 받아들여서 악귀를 쫓는 데 사용했습니다.

 

<다르조 깃발>

 

티베트 인들이 소원을 빌기 위해서

산 위에 가로로 길게 매다는 깃발(다르조, dar lcog)도

본교의 전통에서 나온 것입니다.

 

달리는 말의 모습과 기도문을 써넣은 오색의 천들을

긴 끈에 여러 개 이어 달아서 바람이 잘 통하는 높은 산 위에 매달고

행운을 비는 것은 티벳 사회에서는 흔한 광경입니다.

 

바람이 부는 대로 행운의 말(룽타, rlung rta)이 달려가서

세상에 수명장수와 부귀와 건강을 가져오기를 기원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풍습이 불교 속에 흡수되면서

이생에서의 이익뿐 아니라,

다음 생의 이익이나 정신적 성취를 얻으려는 목적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밖에도 본교에서 산 짐승을 희생양으로 삼아

공양을 올리던 의례를 변화시켜서

보릿가루와 버터로 반죽을 빚어 만든 형상으로

공양물을 바치고 의식을 행하는 풍습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거울이나 염주나 주사위를 사용해서

미래를 점치는 관습도 불교 문화 속에 흡수되었습니다.

 

본교에서 받아들인 그런 요소들 때문에 티벳 불교를

무속 신앙적이고 기복적인 변질된 불교로 오해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정통 티벳 불교는

결코 주술적이거나 기복적인 불교가 아니라

지혜를 강조하는 상당히 지성적인 불교입니다.

 

<티벳 불교의 라마>

 

티벳 불교는 티벳 사회에 적응해서 발전한 불교를 가리킵니다.

 

티벳 불교는 '라마교'라고 하는데,

‘라마(blama)’는 티벳 말로 ‘최상의’라는 뜻을 갖는

산스크리트의 ‘구루(guru,스승)’를 뜻하는 말로 정착되었습니다.

 

티벳 인들은 불교에 대한 깊은 지식과 수행을 갖추고,

제자들에게 수행을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

‘라마’라는 명칭을 붙여줍니다.

 

티베트 인들은 3귀의가 아니라 4귀의를 합니다.

부처님(불)과 부처님의 가르침(법)과 승가(승)에

귀의하는 것에 더해서 스승인 라마에게 귀의합니다.

 

스승인 라마의 말씀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고,

라마의 생각은 부처님의 마음을 표현하며,

라마의 행동은 승가가 행해야 할 행동을 대표합니다.

 

따라서, 라마에게 귀의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마음과 말씀과 행동에 귀의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티벳 불교는 스승인 라마를 통해서

부처님을 보고, 중생들 속에 잠재된 불성을 일깨우는 불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