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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구경

법구경(140) 경쟁할 수 없는 큰 공양 이야기

by 아미타온 2025. 3. 27.

<법구경(140) 경쟁할 수 없는 큰 공양 이야기>

 

<예천 용문사>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시던 어느 때,

코살라 국왕 파세나딧 왕이 경쟁할 수 없는

큰 공양을 올린 일과 관련하여 게송 177번을 설법하셨다.


어느 때 코살라 국왕 파세나딧 왕은 아주 장대한 규모로

부처님과 제자 비구들에게 공양을 올린 적이 있었다.

 

그러자 코살라국 백성들도 왕에게 지지 않으려고

전국적으로 힘을 모아 왕보다 더 장대하게 부처님과 아라한들을 공양했다.

 

이에 왕은 다시 더 큰 규모로 공양을 올리게 되어

왕과 국민들 사이에 공양 경쟁이 벌어졌다.

 

그러던 중에 말리카 왕비는

왕비 나름대로 공양 계획을 세웠다.

 

왕비는 왕에게 큰 누각을 새로 지어 달라고 청하는 한편,

왕실에서 쓰는 흰 일산 오백 개와 잘 길들여진

코끼리 오백 마리도 함께 요청했다.

 

왕비는 흰 일산과 코끼리를 오백 명의 아라한에게

각각 한 조식 배당하여 아라한들을 모셨고,

따로 공주 이백 오십 명을 동원하여

공주 한 사람이 아라한 두 분을 모시면서 부채질을 해 드리도록 했다.

 

그리고 누각의 한 가운데에는

배 열척을 준비하여 거기에 향수와 향을 가득 채웠다.

 

일반 백성들은 도저히 이 같은 방식으로

부처님과 아라한을 공양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백성들에게는

공주도, 흰 일산도 코끼리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왕비는 이런 초특급의 공양으로써

백성들이 왕실과 경쟁하려는 의도를 찍어 버리려 했던 것이다.

 

왕비는 이같은 장엄하게 준비된 외적 규모에다

그에 걸맞는 좋은 음식을 충분히 준비하여

부처님과 오백 아라한들에게 정성스럽게 올렸다.

 

그리고 그 공양이 끝난 뒤

거대한 누각과 공양에 쓰여진 코끼리와 일산 등

많은 물품들을 값으로 계산하여

일백 사십 만이나 되는 황금을 교단에 시주했다.

 

<예천 용문사 대광명전>

 

이때 공양 의식에 왕실의 장관 두 사람이 참석하고 있었다.

 

이들 두 장관 가운데 '준하'라는 이름을 가진 장관은

왕이 자기 재물을 아낌없이 부처님과 교단에 올리는 것을

매우 기뻐하며 찬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같이 성대한 공양을

올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국왕뿐이며,

왕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이런 공양은

올리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국왕은 이 같은 공양을 통해서 얻어지는 공덕을

모든 국민들과 함께 나누는 사람이므로

장관인 자기에게도 공덕이 돌아오리라 여겨 매우 기뻤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또 다른 장관인 '깔라'는

왕이 단 하루만에 일백사십 만이나 되는 황금을

부처님과 비구 교단에 바친 것을 지나친 낭비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실컷 먹고 난 비구들이 수도원에 돌아가면

모두 누워서 잠이나 잘 뿐 아무런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는다고 여겨

비구들을 비난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부처님께서는 공양을 마치시고 청법 대중을 둘러보시다가

깔라 장관이 지금 어떤 마음을 일으키고 있는지를 아셨다.

 

부처님께서는 만약 여래가 이런 때

공양으로 받게 되는 이익에 대해

지나치게 길게 찬탄하게 되면

깔라 장관은 불만이 더욱 커져서

마침내 공양 공덕 자체를 의심하게 되어

그 과보가 다음 생애에 큰 고통으로 나타나리라는 것도 아셨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깔라 장관을 가엾게 여기시고

법문을 짧게 마치신 다음 곧 기원정사로 돌아오셨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공양 공덕에 대한 법문을

길게 해주시리라고 기대하고 있던 빠세나디 왕은 매우 당황했다.

 

그는 이것은 자기가 부처님께 해야 할 의무를

다하지 못했기 때문일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부처님 뒤를 따라와 기원정사로 갔다.

 

<예천 용문사 대장전 목각탱>


부처님께서는 국왕이 오자 이렇게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당신은 이번에 그 누구도 경쟁할 수 없는

장대하고 장엄하며 풍부한 공양을

매우 성공적으로 잘 올렸소.

 

이 일은 모든 사람들이 매우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찬탄해야 마땅한 일이었소.

 

이 같은 공양은 흔히 있는 것이 아니니,

오직 한 부처님이 출현하실 때 단 한번씩 있을 뿐이오.

 

그러나 대왕이여!

대왕의 장관인 깔라는 이번 대왕의 공양에 대해

아무런 의미도 없는 낭비라고 여기고 있으며,

매우 못마땅하여 기쁘고 감사한 마음이 없었소.

 

그런데, 이때 여래가 만약 공양 공덕을 찬탄하여

긴 시간 동안 설법하게 되면

그는 더욱 불만이 커져 마음이 편안치 못할 것이오.

 

그리하여 그는 대왕과 여래에게까지

착하지 못한 마음을 일으킬 것이고,

그 결과 다음 생에 큰 고통을 받게 될 것이오.

 

그 때문에 여래는 오늘 설법을 짧게 한 것이오."

 

부처님께서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어리석은 자들은 다른 이들이

공양 베푸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음으로써

가난하거나 낮은 세계에서 태어나게 되는 것이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이 공양을 베푸는 것을

자기 일처럼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며

함께 하는 마음을 갖기 때문에

그 공덕을 바꾸어 가질 뿐만 아니라

마음이 너그러워지며 덕도 쌓게 되는 것이오.

 

이것은 탐심과 시기심이 없는 마음으로

큰 공덕을 이루는 근본이 되오.

그는 이 같은 공덕으로 복 있는 생활을 하고,

나아가 다음 생에 천상에 태어나게 되는 것이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다음 게송을 읊으셨다.


인색한 자는 천상에 가지 못하고
어리석은 자는 남의 베풂을 찬탄할 줄 모른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남의 베풂을 기꺼워하나니
그리하여 그는 이 세상에서 행복하고
다음에 천상에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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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무제와 달마 대사 이야기

 

양무제와 달마 대사간의 일화가 있습니다.

 

스토리는 비슷하지만,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는 많이 다릅니다.


수많은 절을 짓고 승려들에게 공양하고

자신의 몸까지 절에 시주하면서까지 공

양 제일의 왕으로 불렸던 양무제!

 

이러한 양무제의 큰 공양에 대한 

선가(禪家) 버젼에서의 시각은

차갑고 비판적입니다.

 

공양을 한 공덕이 얼마나 크냐는 양무제의 질문에

달마 대사는 "공덕이 없다"라고 차갑게 잘라 말합니다.

 

달마 대사의 법문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공양을 많이 한다는 것을 넘어

공양을 잘 한다는 것의 의미를 알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최고의 공양자라는

뽐내거나 자랑하는 마음까지 없이

공양을 올린다는 상이 없는 마음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법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달마와 양무제 이야기는 곡해될 소지가 많습니다.

 

마치 뽐내는 마음이나

자랑하는 마음이 있는 공양은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이런 공양을 하느니 차라리 공양하지 말라는 식이 될수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재산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공양은

전시성이고 백성을 착취한 추악한 공양이라는 식으로 

확대 해석하는 우를 범할 수 있습니다.

 

이번 법구경 버젼에서는

엄청난 큰 공양을 행한 파세나딧 왕가에 대한

부처님의 시각은 아주 따뜻하고 우호적입니다.

 

국민들보다 더 좋은 공양을

올리기 위해 경쟁적으로 공양했고

공양하는 마음 속에서 분명 뽐내고

자랑하고 드러내고 싶은 마음이 있슴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은 이 엄청난 공양을 받으시면서 

물리치지도 않고 당당하게 통크게 받으시고,

왕의 공양의 공덕에 대해 아주 크게 찬탄하십니다.

 

그 누구도 경쟁할 수 없는 통큰 공양이며

부처님이 출현하실 때에만 있는 

아주 스페셜한 공양이므로 큰 공덕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2. 공양의 가치

 

달마 대사와는 아주 대조적으로

공덕이 아주 아주 많은 

최고의 공덕이라고 아주 아주 크게 칭찬하십니다.

 

왕의 이와 같은 엄청난 공양에 대해

국가 재정을 파탄내고 백성들의 살림살이를 어렵게 하고

승려들의 무위 도식을 부추긴다는 식의 경제 마인드를 가진

신하의 불만에 대해 오히려 "쯧쯧..."하시며 걱정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공양을 베푸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고 불만을 품는 사람은

낮은 세계나 나쁜 악도에 떨어진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공양을 베푸는 것을

자기 일처럼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사람은

선하고 너그러운 마음의 바탕이 되어

내생에 천상에 태어나는 인연을 짓는다고까지 하십니다.

 

중국에서 주지육림을 했던 걸왕은

자신의 쾌락과 향락을 위해 나라 재산으로

술로 연못을 만들고 고기로 숲을 만들었습니다.

 

온갖 악행을 하면서

국가를 파탄낸 왕이 돈을 쓰는 방식에 비하면

파세나딧 왕의 공양이 비록 상이 있는 공양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욕을 먹을 만한 공양인가요? 

 

백성들은 왕의 이러한 공양을 보며

수행자를 공양하고 수행자를 공경하는 문화를 갖게 되고

부처님 교단은 이러한 공양물을 받아

수행할 수 있는 공간과 물품을 통해 수행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같은 돈이라도 공양에 쓰는 그 돈의 공덕과 가치는

결코 폄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은 공양의 공덕을 아주 크게 찬탄하십니다.

 

비록 자신이 공덕을 자랑하고

내세우고 싶은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아낌없이 수행자에게 자신의 재산과 물품을

베푸는 공양 행위 그 자체의 공덕은 결코 훼손되지 않는

훌륭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뽐내고 싶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공양을 올리는 행위를 하는 것이

공양을 올리지 않는 것에 비해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신에게 유익과 공덕을 준다는 것을 깊이 통찰할줄 알아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고려 시대 때

왕들의 많은 기복 불사와 승려들의 부패로 인해

국력이 쇠잔하고 조선 시대 때 불교가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공양을 받은 승려들이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상구보리 하화중생하는 수행자의 본래 목적과 가치를 잃고

부패와 무능 속에 빠진 그 잘못에 대한 주된 비판이 되어야지

공양 그 자체에 대한 비난으로 확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